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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화 363화


페레니케 363화 「무어, 그래. 짐승을 건드리는 것이 더 쉽지. 그런데 내게 이미 청탁해 놓고는 그 손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들이 좋아하시는 그림을 그려요.」 「보기 좋기는 하구나. 얼마나 더 걸리느냐?」 다이몬이 하품하는 인간처럼 물었다. 시빌레의 이 저속한 그림은 원래 아주 오래 걸렸다. 조잡하지만 대단한 정성도 들여야 했다. 어린 날 페레니케는 바로 이 그림으로 남이 잘 안 되길 비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구차한 일인지 배웠다. 일단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을 수배해야 하고, 저주를 바랄 만큼 싫은 인간의 물건도 수배해야 했다. 그렇게 홀로 숨어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 일을 해내야만 했다. 이것이 모르는 이의 눈에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아는 이의 눈에는 악신을 받드는 것과 같은 중죄였던 까닭이다. 비록 자질구레한 불행이나 바란 것이 전부라 해도. 「거의 영원을 사시면서, 고작 이 시간도 못 참으시다니.」 「몇 마디라도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 진귀하기는 하다만, 차마 이리 저급한 수준을 계속 맞추고 있기가 어려워.」 「아하.」 「비록 네가 인간 같지 않은 것이라 해도 말이지. 아느냐? 우리처럼 귀한 존재가 네 미약한 소리를 들으려면 땅에 계속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단 말이다. 잘 들리지 않으니 너처럼 작고 조잡한 것에 귀도 갖다 붙이고, 보아라. 이토록 고생스럽게…….」 「네에.」 「애써 그리 소리를 모아 들어도 아주 희미해. 나처럼 귀가 밝고 젊은 다이몬이 아니면 네가 아무리 시끄럽게 지껄여도 듣지 못한다.」 「그래요. 제가 마음에 드셔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마셔요. 부담스러우니까요.」 「펠라곤이 이 옷을 걸치면 아주 우습겠군. 땅 밑에 잠든 다이몬들도 죄다 일어나서 고개를 빼고 쳐다볼걸.」 「바로 그거예요.」 “페레니케 님?” 장막 너머에서 그녀를 찾는 시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페레니케가 그 소리를 인식한 순간 그대로 다이몬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제는 전적으로 정신을 집중해 귀를 기울여도 잡기 어려운 소리였으니 당연하게도. 입 안으로 조용히 혀를 찬 그녀가 대꾸 대신 그림을 완성시켰다. 손끝이 지나갔던 자리마다 일순간 일시에 빛이 일어 하나의 표식을 그렸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에피키데스의 옷 안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때, 문가를 떠났던 시녀가 다시 가까워졌다. “페레니케 님, 여기 계셔요?” “응. 나 여기 있어.” 그제야 조심스레 장막이 걷혔다. 시녀가 잰걸음으로 그녀에게 걸어오며 장난스레 분통을 터트렸다. “아까도 여기서 아가씨를 찾았는데!” “못 들었어.”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으셨어요. 그새를 못 참고 어디로 또 몰래 튀어 나가셨나 하고요.” “바깥에 비도 오는데 어딜 가? 훈련장에 잘못 갔다가는 데우칼리온의 학당으로 잡혀갈걸.” 페레니케가 심드렁하니 대꾸하며 악시오테아의 간이 응접실로 나왔다. 멍하니 무언가 골몰한 악시오테아보다 먼저 그녀를 발견한 메티온이 제게로 오라는 듯 나른하게 손을 뻗었다. 아이가 순순히 메티온에게로 가서 그 곁에 앉았다. 메티온의 팔이 소녀의 작은 몸을 한 번 꽉 끌어안고는 제 옆에 붙여놓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턱을 괴고서. 그제야 맞은편의 페레니케를 본 악시오테아가 얕게 한숨을 내쉬며 제 형제에게 주의를 주었다. “메티온 타소스. 경박하게 굴지 마라. 몇 번을 말하느냐? 니케는 여아야.” “아, 부디. 우리가 혼약을 맺을 뻔했다는 말씀은, 누님께 지난 백 년간 백 번쯤 아뢰었지만 징그러우니 잊으세요. 이 어린 애랑 혼인한다는 상상만 해도 노인네가 된 것 같으니.” “징그러워. 내게서 떨어져요. 나도 숙부 같은 신랑감은 싫어요.” “아주 이르면 열서넛에 혼인하는 소녀들도 있다. 심지어 바다 건너에서는 그리 이른 일도 아니라지. 니케는 열 살이야.” “아, 불쌍하게도.” “듣고 있느냐? 그 애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라고.” “아직도 이 되바라진 애더러 내 아가, 하며 어르고 달래는 것은 누굽니까?” “…….” 악시오테아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메티온이 고집스레 페레니케의 정수리에 입을 쪽 맞추었다. 페레니케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털었다. “니케를 방패 삼지 말고, 네 이야기로 돌아가. 메티온.” “결론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알키오네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 “그녀는 이미 제 것입니다.” 제 누이 앞에 드물게도 완고한 대꾸였다. 페레니케가 눈을 위로 굴려 흘끗 그가 있는 쪽을 보았다. 제 머리 위에 있으니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선을 느낀 듯 메티온이 그녀의 몸을 토닥였다. 페레니케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메티온 타소스. 내 말의 의미를 알지 않아.” “본래 주인에게요? 그 불쌍한 분이 알키오네의 이름을 기억하시기는 합니까?” “메티온.” “옛날에 자신이 지은 한낱 어린 노예의 이름 따위는 물론이고, 조카인 우리조차—.” “—그만.” “그 애가 돌아간다면, 예. 좋습니다. 어디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 애의 옛 주인은 이제 자신이 돌아갈 곳조차 알지 못하는데.” “조부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고모님 또한 그 오두막에 갇혀 남은 여생을 보내실 이유가 없다.” 페레니케는 제 존재의 단조로운 역할을 잘 알았다. 이 한 쌍의 타소스 가 오누이가 각자 내뱉는 말을 제어하게 만들고, 대화에 날이 서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지루하다는 표정이나 지으면서. 그녀가 따분한 표정으로 메티온의 물잔을 들고 포도나무 양각을 매만지고 있자,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악시오테아가 말씨를 가다듬었다. “조부님의 불안도, 그토록 보호해야만 하셨던 것도 이해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어. 세상은 알키페 타소스라는 이름을 잊었고.” “누님. 우리의 어머니가 누구의 손에 돌아가셨습니까?” “그때의 라브렌티오스는 이제 없어.” “그러나 누님의 남편이 여전히 살아있지요. 그 자가 바로 그 라브렌티오스입니다.“ “…….” “왕은 선대 라브렌티오스 공의 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고모님을 알지 못해.” “우리를 소거하면 조부의 약점으로 그녀 하나가 남습니다.” “그가 고모님을 해칠 리는 없어. 그건 확실해.” “에피키데스 펠라곤을 믿으시는군요.” 메티온은 공손한 어조로 조소했다. 그러나 페레니케가 탁자 아래로 악시오테아 몰래 제 다리를 톡톡 치는 것을 보고는 이내 가볍게 어깨를 들먹였다. “메티온. 고모님은 조금 더 자유롭게, 이를테면, 케레스나 알데이라 같은 곳에서…….” “우리의 가여운 알키페 타소스가 자유를 기억하겠습니까?” “그곳에 있는 우리의 땅에서, 남은 생은 자유를 누리셔야 해. 지금처럼 옥살이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벼랑 앞에 세 살배기 아이를 풀어놓고, 즐겁게 놀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알데이라든, 케레스든,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하지. 고모님께서 곁을 내어주는 노예들이 거의 없는 것을 알지 않니. 알키오네는.” “누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유의 들판에 고모님을 풀어놓는 것과 별개로, 그 또한 싫습니다.” “그렇다면 네 곁에 측실을 달고 혼인할 것이냐?” 악시오테아의 말끝에 날이 섰다. 메티온이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애를 그렇게 칭하실 것 없습니다.” “단지 노예라 칭하면 족하겠느냐? 식솔의 태반이 그 애가 네 침실 시중을 드는 것을 알아.” “누님.” “소 타소스 공의 측실이 되는 것이야 그 애 신분에 차고 넘치는 일이지.” 그녀가 냉소했다. 메티온이 페레니케의 정수리에 괴었던 턱을 떼어내며 말했다. “알키오네는 그리 되지 않을 겁니다.” “혼인할 때에는 정리해라.” “예.” “잘도 대답하는구나. 애초에 혼인을 하지 않을 심산이니 저 좋을 대로 대답하는 것이 분명해.” “언젠가는 합니다.” “정녕 떨칠 수 없다면, 이전에도 말했지 않아. 알키오네를 해방시켜 주고, 자유민으로 만든 다음, 지방 귀족의 양녀로 보내라. 나는 네게 이미 양보했다. 그 애에게 정당한 신분을 주고, 정당한 아내로 거두든지. 그것이 싫다면 측실로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할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든지…….” “…….” “그도 아니면 네게서 멀리 보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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