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300화
페레니케 300화
“네가 입증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군.”
창가에서 사자와 실랑이하던 소녀가 왕을 보았다. 에피키데스가 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엇을 어찌 했느냐?”
“무엇을….”
“네 양모에게.”
“저는 단지, 살펴드리고 싶었어요. 아프시지 않게요. 미미한 일이었어요. 악시오테아 님께 결코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았어요.”
페레니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허공에 번쩍 들렸다. 그는 아이를 창틀에 앉히고 몸을 숙여 눈을 맞추었다.
“짐이 어찌 생각하면 좋을까. 키벨라우네가 수십 일이나 찾지 못한 해답이 네 작은 머리통 속에 있었다는 것을.”
“폐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조금도 알지 못하겠어요.”
“바실리오스의 딸아. 글라우케 샘에서 알테아를 각성할 때, 무엇을 숨겼느냐?”
고요한 음성이 물었다. 소녀가 정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샘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어요. 언제나 증인이 있고, 제 증인은 저와 악시오테아 님을 미워하는걸요…….”
“미워해? 너와 악시오테아를?”
“그 늙은 무녀의 주인에게 물어보세요. 키벨라우네니까요.”
‘저와 양모를 미워한다’. 아이다운 표현이었다. 에피키데스는 억울하게 찌푸린 아이의 미간과 진실한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 몸을 들었다.
“네가 악시오테아에게 한 일을 설명해.”
“저는 아무것도…….”
페레니케의 말이 허공에서 멎었다. 왕이 갑자기 단검을 꺼내 그의 손바닥을 길게 벤 까닭이다. 그가 단조롭게 입을 열었다.
“말로 할 수 없다면, 이것으로 설명해도 된다.”
에피키데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덤덤하게 권유했지만 그의 왼손에서는 벌건 피가 흘렀다.
페레니케는 그를 정신 나간 자 보듯 보는 대신, 순전히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그 피가 제 몸에 닿지 않게 창틀에 앉은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왕이 그녀에게 피 흘리는 손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무릎이 에피키데스의 피로 젖어들어갔다.
“고쳐라.”
“폐하. 저는 배움이 일천하고, 재주는 미천하여…….”
“일천하고 미천하다 조잘거리는 것을 보아, 너는 이미 네 나이보다 많이 배웠다.”
“감히 폐하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나이다.”
목소리는 뻣뻣하고 어조는 튀어오르듯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비의 눈앞에서 제가 저질렀던 짓 따위는 까맣게 잊고, 얼마나 사람이 미쳐야 저런 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숨 쉬듯 저지를까 생각하며 제 손을 숫제 뒤로 뺐다. 에피키데스가 웃었다.
“악시오테아의 몸에는 그 손을 댈 수 있었고?”
“악시오테아 님은, 이해심이, 넓으시니까요…… 또한, 저를 사랑하시고…….”
“지금은 짐도 넒은 마음으로 널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과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짐의 이 넓은 마음도 줄어들겠지.”
“당장 나가면 사방에 무녀와 신관들이 있지요. 제가 당장 훌륭한 시빌레를 모셔오겠어요! 물론 제가 위병들에게 끌려가지 않게 폐하께서 제 신분을 확실히 보증해 주시기만 한다면요…….”
“과연 네 아비의 딸이다. 왕의 피 앞에서 조건을 붙이다니, 바실리오스답게 충성스럽구나.”
칭찬도 아닌 말에 페레니케가 대충 칭찬을 들은 양 고개를 부지런히 끄덕였다. 그는 건조하게 제 말을 되짚었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필요 없다. 짐은 지금 네 알테아가 필요해.”
“하지만 제가 폐하의 몸을 감히, 그러니까, 왕국을 잘못되게 할까 겁이 납니다…….”
“왕국을?”
거창한 우려에 에피키데스가 전에 없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는 것이 정말로 재밌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피를 저렇게 많이 흘리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페레니케는 에피키데스 몰래 눈을 사납게 샐쭉 떴다가 그가 눈을 내리자 서둘러 눈을 내리깔고는 말을 이었다.
“폐하. 저는 성소 사람이 아니고, 제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알테아를 어떻게 쓰는 게 옳은지 아직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고,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럴 것이라 들었지.”
“혼자서, 재미로 알테아를 갖고 놀아본 것이 전부였는데……. 만약 이런 질 나쁜 것이, 폐하의 고귀한 몸에 닿았다가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그것으로 제가 죄를 짓게 되면 저는 억울해서 어떡하지요……?”
“결국 짐이 아니라 네 안위가 문제라는 것 아니냐.”
그가 우스운 소리를 들은 양 가볍게 지적했다. 페레니케가 조심스레 눈을 들었다.
“폐하, 약조해 주실 수 있나요?”
“무얼?”
“만약에 제가 폐하의 손을 잘못……. 조금 불편하게 만들어도, 제 죄를 면책해 주실 것을요.”
아이가 무엇을 잘못하든 이곳은 칼리케였고, 잘못을 ‘수리’할 수 있는 이야 사방에 넘쳐났다.
왕은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공포에 질린 소심한 음성으로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제가, 그럴 리는 없지만, 시키신 일을 잘해내면, 죄를 짓지 않은 셈이니 그 한 번의 면책권을 계속 갖게 해 주시는 거예요…….”
“…….”
“제가 앞으로 무슨 죄를 짓든 한 번은 폐하의 권세로 용서 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고 죄를 짓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일생이 평안할 테니까요…….”
대단히 겁먹은 양 굴고는 있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배짱뿐인 말이었다. 이를테면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장사꾼이 붙잡고 싶지 않은 손님에게 늘어놓는 말처럼.
네 손을 고장 내고 싶거든 제게 내놓으라고 자기 실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는, 그게 들어먹히지 않을 것 같으면 속주의 총독과 같이 면책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키벨라르의 신관들이 가득한 곳에서 고작 반 뼘짜리 자상을 치료하고.
알테아를 가졌고 능히 치유할 능력이 있으면서 목전에서 왕이 피를 흘려도 일단 치유의 값부터 높이 셈하는 자신의 어린 백성을, 에피키데스는 가만히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실리오스 아이의 셈법은 확실히 칼리케의 방식이 아닌 동시에, 근원적으로 칼리케의 방식이었다.
“고작해야 손바닥의 자상인데 셈이 지나치구나.”
“하지만 저 같은 것이 감히…….”
“알겠다.”
그는 별다른 유감없이 대꾸하고는 단검을 들고 뒤돌았다. 페레니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스킬라!”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 꼬리를 살랑이며 일어났다. 도망치라고 부른 것을 이리로 가까이 오라고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스킬라가 그들에게로 다가왔고, 페레니케는 창틀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단검을 든 왕은 느긋하게 사자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폐하!”
피 흘리지 않는 사내의 손이 높이 들렸다. 허공에서 날이 반짝인 것은 찰나였다. 창 아래 엎어진 페레니케가 서둘러 일어나 왕에게로 달려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자가 천진한 눈으로 왕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왕의 왼손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폐하. 할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어요…….”
페레니케가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날붙이가 아래로 호선을 그리며 스킬라의 등을 길게 그었다.
비명은 소리 없이 터져나왔다. 소녀의 손이 왕의 옷자락을 비틀며 움켜쥐었다. 그러다 이내 암사자의 등에서 피가 실처럼 긴 선을 그리며 새어 나오고, 미숙한 짐승의 입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날 무렵 던지듯 그 옷자락을 놓았다.
스킬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페레니케가 넘어지듯 스킬라에게로 가서 곧장 알테아를 일으켰다. 상처의 깊이는 아주 얕았다. 페레니케도 손을 댄 순간 그것을 바로 알았다.
왕의 단검은 대단히 균일한 힘으로 가죽의 표면만 길게 그어놓았다. 그가 아까 제 손을 대충 깊게 그어버린 것에 비하면 성의를 갖춘 상해라 할 법 했다.
다급한 나머지 얕은 상처에 알테아를 넘치게 쏟아부어 겉으로 보기에만 긴 자상을 순식간에 요란하게 치유해버린 페레니케는, 에피키데스가 어느새 제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스킬라의 환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잠자코 머리를 굴렸다.
짐승이 피를 흘리자 네 발로 기어가서 고쳐놓았는데, 정작 왕이 피를 흘릴 때에는 온갖 말로 도망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왕의 손을 잘못되게 만들겠다고 하고, 어쩌다 고치면 좋은 것을 내놓으라고 했지.
페레니케가 슬그머니 에피키데스의 왼손으로 손을 뻗어 빛을 틔웠다. 미적거리며 어설픈 흉내를 내는 알테아가 갈라진 살갗을 밖에서부터 접붙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에피키데스가 건조하게 품평했다.
“사자는 이리 고치지 않던데.”
“……폐하께서 성심으로 사자를 가엽게 여기시고, 상처를 아주 미약하게 내놓으신 것을 미처 알지 못했어요.”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 불필요한 고통이었을 뿐이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혹여 저를 대단한 천재로 잘못 여기실까 봐, 바실리오스의 양심으로 폐하께 실토해요. 폐하. 스물일곱 번째 제사장을 아시나요? 그자에게 이번에 여러 가지를 졸속으로 배웠는데…….”
페레니케는 단번에 레온 헬리오도스를 팔아치웠다. 에피키데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 이름을 들으며 한동안 아이가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었다.
그의 손은 이미 흘러나온 피로 더러워진 것 외에는 안팎으로 깨끗하게 달라붙어 멀쩡해졌다. 과정이 어설프기 짝이 없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말끔했다. 그는 벌겋게 물든 제 손을 들어 남의 손처럼 들여다보고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바실리오스의 딸에게는 에브도키아의 왕보다 한낱 짐승이 중하다는 것을 네 아비에게 어찌 묻는 것이 좋을까.”
“……폐하, 저같이 어리고 무지한 여자아이가 무엇을 알까요?”
페레니케가 맹하니 되물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무엇이든 모른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군. 악시오테아가 널 재판소에 세워두고 키운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재판소처럼 한 가지 판가름을 하자면, 검을 드신 것은 폐하셨어요.”
“…….”
“폐하께서는 상처 입기를 스스로 선택하셨죠. 스킬라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고요.”
남자가 손에서 천천히 눈을 돌려 소녀의 눈을 응시했다. 유순한 얼굴을 한 아이의 눈에 잔불처럼 희미하게 남은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폐하께서 검을 들고 스킬라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킬라는 폐하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인사했어요. 폐하께서 자신을 귀여워 하실 것이라 믿고요.”
“…….”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스킬라의 등 위로 칼이 떨어졌죠. 제가 스킬라의 피를 두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폐하. 이 모든 것이 고작 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
“반면, 폐하의 피 앞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죠. 이 왕국에서 폐하의 손보다 귀중한 손은 없어요. 그러나 그 귀중한 손을 해친 것은 폐하의 또 다른 고귀한 손이셨죠. 그건 애초에 제 손이 아니었어요.”
“…….”
“제가 한낱 짐승의 피보다 펠라곤의 피를 하찮게 여겼냐고요? 아니요. 폐하의 고귀한 육신을 경멸하신 것은 폐하십니다.”
에피키데스는 여전히 페레니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 눈을 감히 피하지 않고 되물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시험하시는데,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정작 그로부터 어떤 대답이 돌아올 것은 알지 못했던 페레니케가 눈을 깜빡였다. 젊은 왕의 입가로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페레니케 바실리오스. 네 말이 옳다.”
“…….”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물을 떠 놓은 곳으로 가 손을 씻는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페레니케는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느긋해진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피키데스가 아마포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뤼케로 귀환하면 바실리오스 가에 공식적으로 면책권을 하사하마. ‘약속대로’. 물론 네 아비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오로지 네 몫이 될 것이다.”
“…….”
“권리를 베푸는 자의 이름은 에피키데스 알칸드레 펠라곤. 기한은 단지 짐이 죽는 날까지고, 짐의 아들들에게는 상속되지 않는다. 특별히 바라는 공증인이 있느냐?”
“…….”
“달리 없다면, 네가 아까 네 아비를 팔아가면서까지 지킨 메티온 타소스에게 권리의 공증을 맡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