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season2. 25. 먹이사슬(1)
season 2
25. 먹이사슬(1)
처음부터 기찬은 김하익과 송지연 사이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
충성심이나 이타심은 고사하고, 한 배를 탔다는 공동의 일체감도 없다.
그래서 세운 계책이 바로 이간계였다.
처음 송지연이 차에서 자신을 유혹해 무언가를 녹음하려 했던 계획을 실패한 후였다.
‘내가 김하익이라면….’
분명 유혹에 성공해 성관계까지는 했는데, 녹음기를 분실했다.
그쪽 방면으로 프로인 그녀가 스물한 살 애송이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이유로 계획에 실패했다.
의심 많은 김하익이 그 사실을 순순히 믿을 거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분명 송지연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발아했을 거로 확신했다.
그러니, 앞으로 그 의심을 잘 키워주면 될 일이었다.
마침 다음에 만난 자리에서 김하익이 먼저 송지연을 언급했다.
기찬의 생각이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뻔한 속셈을 읽었고, 옳다구나 하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만 보니, 송지연도 기찬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또한 기찬의 예상 범위에 있었다.
자신했던 계획이 실패했으니, 제 부족함보다는 상대의 대단함을 강조해야 조금이라도 책임을 덜 수 있다는 심리 때문이다.
이후에도 기찬은 틈날 때마다 송지연을 언급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라도 기찬이 송지연을 신경 쓴다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그래서 김하익의 무의식중에
‘이 년놈들,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라는 억하심정이 생기도록 말이다.
그런 덕분인지, 송지연이 다시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 본 날 곧바로 섹스까지 했으면, 분명 두 번, 세 번, 다양한 방법으로 엮으려 들었을 법도 한데, 어떤 시도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변화의 조짐을 보인 건 김하익이 아닌 송지연이었다.
가끔 사무실에 들르면 마주치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따로 연락해 만나서는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그에 더해 김하익과 자신의 관계를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때 기찬은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음을 확신했다.
이간계가 통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됐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했다.
바로 그녀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찬이 송지연의 활용 방법과 시기를 고민하던 때, 이번 일이 발생했다.
원하는 때, 필요한 일에 그녀를 쓰고 싶었던 기찬에게는 오히려 그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다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는 오명환이 저들의 목표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은원관계나 연관성이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두 번째는 김하익과 송지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조금 전 송지연이 겪은 상황은 엄연한 테러였고, 아무리 둘 사이가 틀어졌어도 너무 극단적이었다.
기찬이나 그녀나, 당연히 김하익의 사주로 확신했다.
기찬으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러 정황을 판단의 근거로 삼고 송지연을 자신의 휘하에 두기로 한 기찬은, 그 목적에 맞게 대화를 이끌었다.
굳이 피해도 되는 김선주와의 관계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다행히 송지연의 경계심을 한 겹 더 열 수 있는 열쇠로 유용했다.
기찬의 노력이 반영된 건지, 송지연의 설명이 한참이나 길게 이어졌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특히 그녀가 이번에 험한 일을 당한 이유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와, 정말 놀라운데?”
사실 기찬은 이 일에 자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나, 내심 걱정했다.
혹시 김하익이 기찬과 그녀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나 달라진 관계에 대해 알게 됐다면, 충분히 배신감을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찬의 우려와 달리, 송지연의 설명은 전혀 다른 일로 인한 것이었고, 바로 그게 놀라웠다.
‘그러니까, 이 여자, 대체 정체가 뭐냐고.’
송지연은 김하익의 의뢰를 받고 일을 하면서 그의 일정이나 계획 등을 수시로 김종태 회장에게 보고해 왔다.
일종의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걸 들켜서 조금 전 큰 일을 당할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답할 리 없잖아. 당연히 모른 체 했지. 그랬더니….”
그녀는 자신의 멍든 목과 옆구리, 그리고 젖가슴 위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단순히 강간을 목적으로 한 위협 수단의 폭력이 아닌,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생긴 고문의 흔적이었다.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일의 전개가 흥미로웠다.
몸에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심각성과 호기심을 두루 담고 있는 기찬의 얼굴을 보며, 송지연이 화제를 전환해 물었다.
“그런데, 놀라우면서도 궁금한 건, 어떻게 알고 왔어?”
질문을 예상했던 건 아니지만, 밖에서 충분히 고민했던 개연성 문제이기에 기찬은 준비된 대답을 내놓았다.
“주차장에서 누나 보내고 나도 막 시동을 거는데, 검은 세단 하나가 급하게 누나 차를 뒤 쫓더라고.”
사실에 기반해 거짓을 적당히 섞으면, 꽤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누나 마주치기 전에 김하익 봤다 그랬지? 왜 그랬는지, 그 순간 그가 떠오르면서 누나 걱정이 됐어.”
그래서 송지연의 집으로 달려왔고, 주차장에서 그녀의 차가 없는 걸 확인한 얘기까지 다 풀어놨다.
간략하게 요약된 설명이었지만, 기찬의 얘길 듣는 내내 송지연은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들 특유의 본질에서 벗어난 질문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날 구하러 온 거네?”
굳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리 느끼도록 포장한 것이니 말이다.
“봤잖아. 이 야밤에 문 두드리고 고성방가 한 거. 물론, 김하익이 아닌 이런 덩치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기찬은 그때까지도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는 사내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큰일 날뻔했다는 말을 말이 아닌 제스처로 한 것이다.
그런 기찬을 가만 보고 있던 송지연이 다시 한번 입가에 묘한 미소를 그렸다.
‘성기찬. 이 남자, 볼 수록 갖고 싶어.’
그녀는 그때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가만 내려놓았다.
그건 기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호텔에서만 해도 송지연은 기찬을 옭아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 애써도 그와의 섹스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일전에 기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도 그와 좋은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난 너와 적이 될 생각이 없다,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기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외려 정체만 드러낸 꼴이 된 것 같아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그를 제 편으로 두려면,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구애하거나, 방법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김하익의 방법을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중년 남자의 자지 위에서 몸을 흔들던 이수정의 젖가슴을 보면서 내린 것이었다.
그래, 저년을 써먹어 보자,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조금 전 생각이 바뀌었다.
그때까지 계획했던 모든 것을 다 지워버렸다.
기찬은 자신보다 나이만 어릴 뿐, 본인이 쉽게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게다가,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미 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굳이 소유욕 때문에 욕심부리다가 이 관계마저 틀어지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직전의 섹스였다.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달콤한 쾌락과 자극적인 절정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의 명품 대물은 자신에게 극강의 쾌락을 선사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게 있었다.
그의 손길, 몸짓, 속삭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배려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전보다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섹스 능력을 보였다.
하다못해 누나라는 호칭까지, 관계 내내 살가움을 느끼게 했다.
그런 것들이 전부 하나로 섞이며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안정감, 따뜻함, 그리고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짜릿함.
역시 그를 놓칠 수 없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동시에 자신은 기찬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저 본능처럼 느낀 것이다.
소유할 수 없지만, 그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게 뭘까.
고민의 새로운 방향이 정해지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자신에게 매달리던 그 많던 사내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 꼴사납게 굴지는 말자.’
구걸할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라는 결론이 의외로 쉽게 나왔다.
방법도 간단하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주면 된다.
기찬이 항문에 삽입하려고 했을 때,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원하면, 주면 된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기찬이 쓰러져 있는 사내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앞으로 김하익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를 물었다.
송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찬씨는 김종태 회장님, 잘 모르지?”
질문한 기찬은 그녀의 조금은 엉뚱한 대답에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믿는 구석이 있구나.’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기찬은 김종태 회장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처럼 직접적인 어떤 교류를 통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전생과 백년의 서를 통해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송지연이 믿는 구석이 김종태 회장이라면, 김하익의 위협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건강하던 김종태 회장이 급사한다.’
전생에서는 꽤 시끌벅적한 사건이었다.
당시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후계 경쟁을 벌이던 삼 형제 중 누군가의 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난 그 일의 범인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