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season2. 16. 각자의 셈법(2)
season 2
16. 각자의 셈법(2)
기찬은 본능처럼 김하익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건장한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검은 정장 차림에 짧은 머리, 까맣게 그을린 피부, 각진 턱,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와 거친 손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힘 좀 쓰는 사내였다.
그가 김하익의 보디가드인지, 다른 쓰임이 있는 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오명환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감독님이 오전에 체육협회에 들른 이후 일정을 확인해 봐야겠다.’
기찬이 순식간에 당황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한 것과 달리, 김하익은 아직 어리둥절해 있었다.
마치 뭔가 잘못을 저지르려다가 들킨 초딩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명환과 김하익은 접점이 없는데…. 서로 아는 사이기는 할까? 게다가, 사주를 하면 했지, 직접 움직일 위인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김하익의 시선이 기찬에게 걸쳐진 오명환을 슬쩍 살피고는 못 본 척하는 걸 봤다.
그 작은 행동 하나로 기찬은 확신했다.
‘역시, 오명환을 알아봤다.’
물론 오명환이 한때 워낙 유명했던 스타 복서였기에 알아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기찬의 감은 구린 무언가를 감지했다.
한번 의심을 시작하니 그의 모든 행동이나 눈짓이 전부 암호처럼 여겨졌다.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초면은 아니다.
하지만 기찬은 굳이 아는척하지 않았고,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여기에서 약속 있으셨나 봐요?”
그 말에 김하익은 정신이 드는 듯 기찬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어, 맞아. 그래.”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기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새가슴이 어떻게 그렇게 큰 죄를 짓고 살았나 몰라.’
전생에 그의 비리나 범죄 관련한 기억들이 스르륵 지나가며 든 생각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김하익은 아직 악당 초기 버전인지도 모른다.
기찬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그에게 가볍게 물었다.
“몇 층 올라가세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려고 물은 건데, 김하익은 살짝 당황하더니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겨우 대답했다.
“어, 난 저기, 스카이라운지.”
그러면서 본인이 직접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떤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11층에서 승강기 문이 열렸고, 기찬은 김하익에게 인사를 남겼다.
“사장님, 그럼 볼일 잘 보시고 가세요. 다음에 뵐게요.”
그러자 김하익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어, 그래. 다음에 봐.”
기찬은 승강기 문이 닫히기 전에 이미 오명환을 끌고 돌아서서 복도를 걸었다.
일부러 김하익에게 객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움직이는 소리를 확인한 기찬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함께 있는 취객은 누구인지,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 호텔에 묵고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다.
‘진짜 이 시간에 약속이 있었다면, 여기가 아닌 제 호텔에서 만났겠지.’
평소 김하익의 행동 패턴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미행이라면 나와 있는 것도 다 봤을 텐데.’
기찬은 두 가지를 가정했다.
첫째, 오명환을 미행한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고 온 경우다.
오명환이 잔뜩 취해서 제 방으로 올라갔다는 보고를 받고, 계획한 일을 처리하려고 왔을 수 있다.
시간상으로도 오명환이 객실로 옮겨지고 혼자 누워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찬이 오명환의 술주정을 다 받아주고, 웨이터와 몇 마디를 나누고, 승강기를 기다리느라 짧지 않은 시간이 지체됐다.
‘만약 그렇다면, 그 웨이터는 보고자가 아니다.’
웨이터의 행동이 수상쩍었는데, 정황상 일단 김하익의 하수인이라는 의심 대상에서 제외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가정은 오명환이 어떤 상태인지 상관없이 그저 그를 만나러 온 경우다.
그럼에도 모른 체 한 이유는, 뜻밖에 기찬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오명환과의 관계를 내게 감추고 싶었던 거다.’
그 경우라면, 김하익은 오명환과 기찬이 아는 사이일 거로는 생각 못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즉, 그로서는 기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가 된다.
‘방문 목적이 우호적이지 못했을 테니까.’
동행한 사내를 보건데, 폭력이 동원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다툼이나 협박 등이 불가피한 만남으로 예상했다.
기찬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저에게 매달려 축 처져있는 오명환을 돌아봤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화 당사자가 인사불성 상태인 것을 봤으니, 굳이 지금 만날 생각을 접었겠지.’
기찬은 감독을 객실로 옮겼다.
침대에 눕히기만 하고 다른 건 챙기지 않았다.
굳이 수발을 들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감독님. 편히 주무세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의 무의식에 예를 갖추고 객실을 나왔다.
‘오명환. 체육협회 일 말고, 또 무슨 일을 준비 중인 거냐.’
그 짧은 복도를 걸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쉼 없이 팽팽 돌았고, 몸은 무의식에 저절로 승강기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강한 향수 향이 확 풍겼다.
그 자극에 기찬은 여러 상념에서 깨어났고, 아니나 다를까, 승강기 안에는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자 둘이 있었다.
“어머.”
두 여자는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산만한 남자가 서 있어 놀랐는지, 바로 내리지 못하고 주춤했다.
기찬은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도 뒤늦게 놀랐다.
‘아!’
두 여자 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송지연?!’
짙은 화장과 야한 옷차림에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송지연이었다.
하지만 기찬은 빠른 눈치로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놀라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는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하며 옆으로 돌아서서 길을 터주었다.
그러자 두 여자가 승강기에서 내려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기찬은 빈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두 여자가 사라지고 있는 복도 끝 모퉁이를 지켜봤다.
혹시 송지연이 돌아보지 않을까,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송지연의 고개가 기찬을 향해 살짝 돌았다.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기찬을 그녀에게 눈으로 말했다.
‘하려던 거 해. 우린 나중에 얘기하자.’
일종의 텔레파시라고 해야 할까.
기찬의 마음이나 의도가 전달된 건지, 이미 평정심을 찾은 그녀 또한 눈으로 화답했다.
‘네. 다음에 봐요.’
기찬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러 가지를 가정했다.
특히 짚이는 몇 가지와 의구심에 집중했다.
김하익이 오명환과 은원관계가 있을까?
둘이 얽힐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있다면, 사채업을 하는 김하익에게 돈을 가져다 쓴 정도일 텐데, 그 또한 가능성이 희박했다.
오명환의 재산이 얼만데.
평생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부자다.
그의 제주도 집 차고에 부가티나 람보르기니만 팔아도 어지간한 급한 돈 융통은 된다.
‘돈이 급할 일도 없겠지만.’
기찬은 제가 생각해도 어이 없어서 혼자 픽 웃었다.
그때 문득, 뒤늦게 김하익의 아버지 이름이 떠올랐다.
‘가만? 김종태 회장도 원로 복싱선수잖아!’
오명환이 체육회 일로 서울에 온 지금, 전대 체육회장이었던 김 회장이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거, 냄새가 나.’
단서 하나가 생기자 막혔던 생각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야말로 머리가 다시 팽팽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강기가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기찬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 풀 수도 있겠는걸.’
* * *
1107호실 문 앞에서 송지연이 잠깐 멈춰 서 있었다.
‘성기찬,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뜻밖의 장소에서 그와 마주친 것 자체가 놀라움이었지만, 하필 지금 제 본 모습을 그에게 보인 게 영 못마땅했다.
물론 일전에 자신의 본래 일 등에 관해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었다.
하지만, 그게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건, 마지막 그의 눈빛이었다.
‘날 걱정하는 눈빛이었어.’
그녀는 다음에 보자는 의미의 기찬의 속 마음을 멋대로 착각해 버렸다.
오해는 또 한 걸음 더 나갔다.
‘설마, 안타까워한 거야? 날? 이런 일 하는 날?’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제깟 게 뭔데 날 안쓰러워해?
화가 나는 것 같다가도,
혹시 험한 일 생길까 봐 걱정 한 건가?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하게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는 건,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운 자신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남자를 일 때문에, 혹은 필요에 의해서 마음껏 후리고 다녔는데.
그중에 잘나지 않은 놈이 없었다.
대기업 재벌 손자들도 여럿 있었고, 해외에서 실력 인정받아 외국계 기업 책임자로 들어와 있는 천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영양 만점의 먹잇감이었을 뿐, 단 한 번도 송지연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딴 애송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저도 모르는 제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아랫도리가 움찔대는 느낌을 뒤늦게 인지했다.
‘아….’
기찬을, 그의 대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벌써 젖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마침 곁에 있던 임무 파트너가 송지연의 팔을 툭 쳤다.
“뭐 해? 열어.”
그러면서 살짝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언니, 저 늙다리 돈 많다그래서 어떻게 뜯어 먹을까 고민하는 거지? 꿈 깨. 언니 차례도 안 갈 거야. 내 보지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