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season2. 14. 집행부(3)
season 2
14. 집행부(3)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다.
기찬이 정민수가 마음에 든다고 정민수도 기찬을 좋아하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기찬의 입장에서는 정민수가 갑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은 그의 마음을 사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건 안 되겠네요.”
기찬의 말에 정민수가 살짝 당황했다.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찬은 그의 오해가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곧바로 설명을 보충했다.
“연락은 제가 책임지고 해드릴게요. 하지만 그 양보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 학교, 과를 위한 일인데 무슨 조건씩이나….”
그러면서 거부의 이유까지 명확하게 밝혔다.
“3학년 개강 파티 장소는 오랜 전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대에서 그 전통 팔아먹었다는 소리 들으시면 안 되죠.”
기찬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민수는 그런 기찬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이 새끼, 뭐지? 심하게 맘에 드네.’
사람에게 첫인상은 무척 중요하다.
의지와 무관하게 선입견을 만들기 때문이다.
기찬은 알지 못했지만, 지금 정민수의 경우에는 그 반대로 기찬에 대한 편견을 깨는 작용이 됐다.
서울대 수석, 김재영의 애인, 가요제 대상 수상 등, 기찬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민수 또한 너무 잘난 놈에 대한 반발심 내지는 경계심 같은 게 있었다.
그건 정민수가 속이 좁거나 편협해서가 아니다.
강하거나 뛰어난 상대에게 털을 세우는 건 수컷의 본능이다.
그럼에도, 조금 전 기찬의 태도는 그런 정민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에 더해 호감까지 심어주었다.
기찬도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정민수의 동공이 확장되는 걸 보는 순간, 기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어. 일단 빗장은 푼 것 같다.’
기찬은 친해지고 싶은 선배에게 지금 막 눈도장을 찍었다.
이제 어디에서건 기찬의 이름이 귀에 들어오거나 눈에 보이면, 아마 그는 이 기특한 후배를 챙겨주려 할 것이다.
‘기왕이면 성기찬’이라는 생각이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게 됐기 때문이다.
- 당장 손해 보는 것 같고 아쉬움이 남더라도, 정도를 걷는다.
그것이 기찬이 전생을 통해 배운 깨달음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하나씩 엮어 가는 거다.’
기찬은 흡족한 마음에 미소를 숨기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첫 집행부 소집에 3학년 선배들이 함께하게 됐다.
예정됐던 건 아니지만, 재영이 덕분에 기찬으로서는 구성과 회의 진행이 한결 수월하게 됐다.
“저기, 솔직히 저는 기찬이한테 이의제기하려고 나온 건데요.”
유세현이 회의 내내 선배들 눈치를 보다가 총무라는 직책이 확정되자 볼멘소리를 냈다.
그의 말마따나, 왜 원치도 않는 집행부원에 제 이름을 올렸냐고 한바탕 따질 요량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선배들의 등장에 눈알만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관없어. 알다시피 집행부 구성은 과대 추천제야.”
선배 중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유세현의 주둥이가 댓 발 나왔다.
“하지만, 본인이 하기 싫다는데 억지로는….”
안타깝게도 그는 불만을 마저 토로하지 못했다.
정민수가 그의 말을 자르고 나섰기 때문이다.
“기찬이를 과대로 추천한 게 너라며?”
화를 낸 것도, 눈을 흘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 대화 나누듯 조용히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유세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네? 아, 그, 하지만 그건….”
정민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기찬이 추천해도 되고, 기찬인 너 총무 추천하면 안 돼? 그게 무슨 경우야?”
“그, 그게, 그러니까….”
세현은 당황하거나 수세에 몰리면 버벅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참 찌질해 보였다.
사람의 감정은 다 비슷하다.
다른 선배들도 세현의 그런 찌질함이 꼴보기 싫었는지, 한마디씩을 보탰다.
“앞으로 의사 하겠다는 자식이, 이타적이기는커녕 저만 생각하네.”
“그러게. 되게 이기적인 새끼네.”
“선배인 우리 앞에서도 저렇게 제멋대론데, 과대 말 듣겠냐? 그냥 시키지 마.”
세현은 카운터펀치 연타에 어질함을 느꼈다.
숨도 못 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선배들에게 다구리 당하는 동기의 모습이 안됐는지, 기찬은 세현을 돕겠다며 나섰다.
“운영이 미숙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습니다.”
모두 기찬을 주목했고, 그제야 나름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 다른 애들도 다 같은 상황에서 받아들였거든요. 책임감을 함께 나누겠다면서…. 그래서 세현이도 그럴 줄 알고 그만….”
기찬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얼빠진 세현을 바라봤다.
당사자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추천한 저의 잘못을 시인하며 사과했다.
“네 말이 맞아. 물어보지도 않고 추천해서 미안하다. 세현아.”
갑작스러운 정중한 사과에 세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기찬이 자신을 낭떠러지로 밀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와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그는 기찬의 가증스러움에 기가 찼다.
하지만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슬쩍 선배들의 눈치를 보고는 빠르게 판단했다.
늦었지만, 최악은 피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건 생존본능 같은 것이었다.
“미, 미안하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일단 기찬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선배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헤헤.”
말 더럽게 못 하네.
눈치도, 주변머리도 없고.
이런 새끼가 어떻게 서울대에 들어왔지?
기찬이 세현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라이 못난 새끼야.’
‘공부만 잘한다고 다 의사 되냐.’
‘기찬이랑 겁나 비교되네. 넌 졸업할 때까지 좀 괴롭겠다.’
어쨌거나, 잠깐의 우여곡절 끝에 유세현이 총무직은 맡기로 했다.
이로써 과대 성기찬, 부과대 박혜수, 총무 유세현 등등, 여섯 명의 2학년 집행부 구성이 마무리됐다.
“그럼, 저희는 회의 끝나는 대로 행정실에 가서 정미연 선배님께 내용 전달하겠습니다.”
의대 학생회의 조직도가 이제 완성됐기 때문에 갖춰야 하는 서류가 있었다.
그 신고를 말하는 것이었고, 선배들은 그런 절차를 잘 알고 있는 기찬이 대견했다.
“잘 아네. 그렇게 해.”
“네. 최창섭 선배님이 전에 알려주셨습니다.”
기찬이 일부러 조교 선배의 이름을 언급했다.
최창섭과 정민수,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인맥 버프를 받아보려는 속셈이었다.
의도대로 꽤 효과적이었다.
“창섭이가? 의외네. 그렇게 친절한 녀석이 아닌데….”
친구의 냉정한 성격을 잘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기찬은 그 말을 통해, 그리고 후배를 바라보는 정민수의 시선에서 호의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기찬과 다르게, 다른 2학년들은 놀란 눈을 했다.
3학년 선배가 한참 위 기수 선배인 최창섭을 친구처럼 말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당황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동갑내기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기찬은 뒤늦게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얼른 동참했다.
“죄송하지만, 최창섭 선배님이 한참 선배 아니신가요? 아무리 없는 자리라지만,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기찬이 정색하며 선배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섰다.
물론 전부 쇼였고, 그런 기찬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선배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하.
“성기찬. 여기 민수 형이 학교를 좀 늦게 들어왔어. 두 사람, 친구야.”
누군가의 말에 2학년들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구나.
오오.
기찬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연기를 했다.
“네? 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귀까지 빨개지는 멋진 연기였다.
그리고 선배들에게는 그런 기찬이 나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창섭이한테 전해줄게. 너한테 반말했다고 발끈하는 후배가 있다, 그렇게 말해주면, 좋아하겠네. 훗.”
정민수가 귀엽다는 듯 기찬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섰다.
“아, 미연이한테 회의록이랑 조직도 줄 때, 말 좀 전해줘.”
3학년 선배들이 회의실을 나가던 중에 정민수가 기찬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같이 못 들어가니까 먼저 가라고.”
갑작스러운 뚱딴지같은 소리에 기찬이 대꾸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자, 정민수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정미연, 내 여동생이다.”
기찬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너무 닮았다.
부리부리한 눈, 선이 굵은 콧날과 턱선, 두터운 입술까지.
그런데, 기찬은 놀라움 뒤로 의문을 느꼈다.
왜 굳이 지금 그 사실을 밝힌 걸까?
그사이 선배들이 사라지고, 옆에서 누군가 쑥덕였다.
“야, 저 산적이, 미연 선배 오빠래.”
“와, 진짜 몰랐다.”
“나 미연 선배 포기.”
“앞으로 미연 선배한테 눈길 주지 말자. 걸리면 좆 된다.”
학교에서 그녀는 꽤 유명했다.
그녀가 지나가면 남자들은 다들 한 번씩 꼭 돌아본다.
단, 예뻐서는 아니었다.
‘미연 선배 별명이… 젖소지.’
꿀꺽.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괜히 마른침이 넘어갔다.
동시에 기찬은 자신의 반응을 살폈다.
옆에 혜수가 있어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그런데, 혜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아, 상대적인 박탈감.’
알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저도 모르게 혜수의 가슴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런데, 하필 그녀가 기찬의 시선을 봐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