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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season2. 4. 2학년 과대(1)


season 2 4. 2학년 과대(1) 기찬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이진주 실장의 뒤통수를 보며 쓰게 미소를 삼켰다. ‘봤네, 봤어. 쓰읍.’ 회의 직전, 모두 아래층 회의실에 가 있을 때를 떠올렸다. 대표의 말대로 1층에는, 특히 대표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외부에서는 들어올 수 없고, 몇 안 되는 내부 직원들은 전부 회의실에 있었으니, 그녀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기찬은 회의를 준비하느라 가장 분주한 이진주 실장이 신경 쓰였다. 대표의 개인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어 언제든, 무슨 일로든 대표실을 드나들기 때문이다. 처음 이 회사에 방문했을 때, 재영과 기찬을 맞아주고 대표실로 안내해 준 것도 그녀였다. ‘아마, 회의 준비됐다고 알리러 왔다가 들었겠지.’ 합리적 추측과 동시에 절로 한숨이 났다. 대표실에서 대표와 정사를 나눈 게 한두 번이 아니기는 하지만, 대부분 아무도 없을 때였다. 이번엔 확실히 너무 안일했다. 유난히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신음을 내지르던 김선주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후회보다는 수습을 고민하는 게 옳았다. 후우. 기찬은 다시 한번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입막음할 일이 생겼으니, 몸이 또 바빠지겠구나, 본능처럼 든 생각 때문이었다. ‘자지로 흥한 자, 자지로 망한다고, 정말 남자는 좆 잘못 놀리면 패가망신이다.’ 예정에 없던 육체적 관계 하나가 부채(負債)로 쌓이는 순간이었다. * * * 2학년 전공 수업 시간이었다. 수업 시작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교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실은 각자의 잡담으로 시끌벅적했다. 그 소음 중, 기찬의 귀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다. “허동훈, 괜히 기찬이네 따라 가요제 나갔다가 개망신당하고 휴학하더니, 미국에 어학연수 갔다던데?” “미국? 와, 어떻게?” “걔 아빠가 주재원이었잖아.” “아, 맞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중학교 다니다 왔다고 더럽게 자랑했었지.” 95년, 이 시기만 해도 해외여행이나 유학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서울대생들에게도 어학만을 목적으로 하는 해외 연수는 낯설고 특별했다. 소위 말하는 상류층 일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찬은 딱히 관심 없는 일이었음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허동훈 같은 소인배의 하찮은 적의(敵意)쯤이야 쌩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미국 어학연수라….’ 그가 지금이야 허접한 인간이지만, 사람 일은 모른 거다. 인성이 후졌을 뿐, 머리가 좋고 집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충분히 미래에 장애물이 될 만한 요건은 충족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적대감이 삶의 동기부여가 되는 이상한 놈이야.’ 기찬은 피로감을 느끼며 미간을 구겼다. 계획한 일만 해도 정신없는데, 쓸데없는 일이 자꾸 느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귀찮아도 할 건 해야 했다. ‘불씨를 그냥 둘 필요는 없지.’ 웅성대는 소음 속에서 나름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단상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주목.” 무섭기로 소문난 조교 선배였다. “야, 이 새끼들아. 늬들이 국민학생이야? 왜케 시끄러워! 그리고, 선배가 들어왔는데 인사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탕. 그가 교탁을 내리치며 눈알을 부라리자, 강의실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선배는 좌에서 우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사납게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94학번 못 쓰겠네. 문제 많아?!” 다시 한번 교탁을 내리쳤다. 타앙.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에 모두 움츠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기찬은 눈빛을 반짝였다. ‘아, 네가 최창섭이구나.’ 그는 기찬의 머릿속에, 그러니까 정보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혜수에 관해 잘 몰랐을 때는 그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지금은 기찬에게도 무서운 선배인 건 마찬가지였다. “개념 없는 새끼들, 쯧.” 존재감을 한껏 뽐내며 단번에 기선제압에 성공한 조교 선배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그제야 용건을 꺼냈다. “1학년 과대였던 놈이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휴학하고, 부과대는 황당하게 연예인이 돼서 휴학하고….” 그는 잠깐 제 성질을 죽이느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마저 이어가다가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총무라도 대리 해야 하는데, 교통사고로 입원했다고 휴학이야. 그럼, 인수인계는? 어?! 조교가 한가하게 1학년 따까리나 하는 사람이야?!” 그쯤 되자 기찬은 조교 선배의 방문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새 학년 새 학기, 과대가 열심히 학과 사무실을 드나들며 전달해야 하는 보고와 공지들이 많을 때였다. 그런데 어찌 된 게 2학년은 아무도 그걸 하지 않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야 교수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조교는 공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로 잔소리를 듣게 돼 뿔따구가 난 것이다. ‘누구든, 안 해도 되는 일을 떠맡게 되면 짜증이 나는 법이지. 그럼그럼.’ 자꾸 예정에 없던 일들이 튀어나와 머리가 복잡한 지금의 제 심정과 동질감을 느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 작은 움직임을 선배가 놓치지 않았다. “야, 성기찬. 넌 뭐가 좋다고 헤실거리면서 고개를 까딱거려. 전체 수석이면, 선배 말이 좆같지?!” 아니, 왜 말이 그렇게 흘러? 기찬은 엉뚱하게 튄 불똥에 당황스러웠다. 잘못했다가는 본보기가 되어 저 더러운 성질을 옴팡 뒤집어쓰게 생겼다. 하지만 그의 냉정함은 위기에 더 빛을 발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오늘 주식 배당금 받은 걸 생각하다가 그만…. 선배님 말씀하시는데 딴생각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기찬의 씩씩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강의실을 쩌렁 울렸다. 분명한 사과였는데, 조금도 위축되거나 구차하지 않았다. 오히려 듣는 이들 모두 그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고 태도였다. 스물한 살. 아직 사회 경험도 없고 대인관계의 경험도 부족한 어린 나이다. 보통 누군가 다그치면 우물쭈물하게 된다. 특히나 지금처럼 억울한 상황에선 변명을 하느라 진땀을 뺀다. 그런데 지금 기찬은 지적받은 잘못에 대해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곧장 사과부터 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태도의 이유까지 밝혔다. 그러면 상대는 더 화를 낼 수 없게 된다. “…….” 역시나, 조교 선배도 그만 입을 다물고 잠시 노려만 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화가 좀 풀렸는지, 노기를 거둔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주식 하냐?” “네, 선배님.” “무슨 주식 가지고 있는데?” 조교 선배가 기찬의 배당금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기찬은 선배의 최대 관심사를 알고 일부러 주식 배당금 얘길 꺼낸 것이다. “삼성전자, 포항제철, 한국전력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했습니다.” 동기들은 기찬의 빠릿한 군대식 대답이 낯설었다. 게다가 이때만 해도 대학생이 주식에 관심을 두던 때도 아니어서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선배의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최창섭은 정확히 알아듣고 궁금한 걸 물었다. “왜 금성전자가 아니고 삼성전자를 가지고 있어? 가전제품은 내수시장이며 수출이 금성이 더 좋은데.” “선배님, 금성전자가 올 1월에 LG전자로 사명이 바뀌었습니다.” “아, 그렇지.” 기찬은 먼저 자신이 시장의 동향이나 소식을 잘 알고 있음을 과시한 후 선배의 질문에 답했다. “영국 경제 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안에 전자 회사의 밥줄이 메모리 반도체가 될 거라고 해서요.” 해외 언론이나 잡지, 정보에 어둡던 때다. 그래서 기찬은 일부러 세계적 권위의 잡지를 언급하며 자신의 말에 신뢰성과 전문성을 높였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일본에 이어서 64K D램을 개발, 생산해서 해외에서는 LG보다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아.” 조교 선배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그런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주가의 추이나 호재 뉴스 등을 기대했는데, 기찬은 그 수준을 넘어 경제 전문가처럼 내용을 알고 투자했다는 얘기였다. “그렇구나…. 그럼, 지금 악재가 많은 포항제철은 왜?” 선배의 질문만으로도 그가 기찬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기찬은 조금 더 지식을 뽐내보기로 했다. “포항제철이 지금은 좀 어렵지만, 작년에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올해는 런던증권거래소 상장된다는 소문도 있고요.” “아, 그래?!” 선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기찬은 선배의 기대감을 만류했다. “선배님, 혹시 주식 하십니까?” “어, 조금 가지고 있어.” 알면서 물었다. ‘자, 판은 깔렸다.’ 기찬은 독사 같은 선배에게 찍힐 상황에서 오히려 점수 딸 기회로 만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거, 무슨 종목이든 크게 손해 보고 있는 것 아니면 다 처분하세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선배가 놀라 물었다. “왜?” “국내 뉴스에서는 안 보이지만, 해외 경제 뉴스나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 경제 시장에 버블 현상이 포착된다는 경고가 있어서요.” 기찬은 일부러 어려운 말을 써 가며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어차피 말해 봐야 못 알아들을 것이다. 무엇보다, 곧 IMF 금융 위기 닥치면 주식시장은 개박살 날 것을 알기 때문에 겁을 준 것이다. “너, 너는?” 역시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주었다. “저도 올해 안에 다 처분할 겁니다. 현금화 해놓고, 다시 진입 시기를 봐야죠.” “아….” 기찬의 전문적인 설명은 알아듣지 못해도, 저리 잘 아는 애가 어떻게 할 거라고 하니, 그건 참고할 만 했다. 그게 선배 감탄사의 의미였다. 기찬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확실한 팁 하나를 던져주기로 했다. 선배가 기찬의 조언 덕에 큰 손해를 면하고 오히려 이득을 보게 되면, 최창섭과의 관계에 완벽한 기름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그만큼 기찬의 미래 인맥 풀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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