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114화 연회
‘뭐지?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샤를 백작은 기도하고 있는 부인을 보면서 조금 전에 보았던 여인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들이야 그랜드 마스터니, 뭐니 떠들지만 아직은 소드마스터 극에서 어떤 한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다.
하지만 감각만큼은 그 누구보다 예민했다.
‘헛것이 아니야. 분명히 사람의 움직임과 기척이었다.’
기도하고 있는 부인과 너무나 닮은, 아니 닮았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똑같았던 존재.
하지만 고민한들 무엇하나 샤를 백작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치고는 부인의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부인이 기도가 끝나고 일어서 자신을 지긋이 보고 있는 샤를 백작을 보고는 살짝 웃어 보였다.
“뭐예요?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뭐, 여긴 내가 해야 할 일도 없으니, 정원에 잠시 갔다 오기는 했지만 혼자 가니 재미없더군. 같이 나가겠소?”
샤를 백작의 권유에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좌궁에서 나와 정원을 걸어 본궁에 다다랐을 때였다.
“부인과 함께 오다가 본 호수를 걷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샤를 백작이 자신들의 호위를 맞은 칼리움쪽 기사를 보며 물었다.
자신을 호위할 필요가 없으니 의전과 어느 정도의 감시 역할일 것이다.
백작의 질문에 커다란 덩치의 호인족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요. 백작님이 원하시는 곳은 보안구역 외에는 어디든 가실 수 있으십니다. 다만 저희 수도방위 사령부 경호팀이라는 혹을 달고 다니셔야 하긴 하지만요.”
“하하하. 그 정도야. 그런데 수도… 방위사령부라고요?”
“네. 칼리움을 방위하는 부대입니다. 아. 제국으로 말하면 제국 방어 기사단? 정도 되겠군요.”
“으음. 뭔가 좀 특이하군요.”
백작이 신기하다는 듯 관심을 가지자 얼굴에 작은 상처가 있는 호인족 경호팀장이 웃으며 여러 가지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뒤로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샤를 백작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부인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고 부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도시 중앙의 호수를 향했다.
질문하고 싶은 건 경호팀장인 수도방위 사령부 2대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백작 부인의 정체를 묻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분명히 로즈 양과 뭔가 관계가 있을 거야. 저렇게 똑같이 생겼을 수가 있을까?’
백작 부부가 도시를 걸을 때 그들은 이상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인족의 호위와 제국에서 온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신분이 높은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는데 유독 백작 부인을 보고는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그들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백작 부인은 오히려 밝게 웃으며 그들에게 같이 손 인사를 해 주었다.
“사람들이 참 친절해요. 붙임성 있고.”
백작 부인의 밝은 웃음에 샤를 백작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도 로즈 양인 줄 알고 인사하는 것이겠지.’
수도방위 사령부 2대대장만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
수많은 사람들이 도열하고 사신단을 위한 본격적인 연회가 준비 완료되었다.
다른 왕국이나 영지였다면 파티를 나온 사람들은 모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친목을 가장한 정치적인 대화나 모임이 주를 이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치 파벌도 거의 없고 강력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계인 상태라 그들은 순수하게 파티를 즐기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바람 계열 드래곤인 칼리움 베르다나스의 상징인 푸른색을 바탕으로 한 예복을 갖춰 입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내 양옆으로는 여섯의 부인이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브리에 걷는 것 괜찮아?”
“누가 들으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어요.”
“아니. 그게…. 그냥.”
하긴 임신 중에도 적당한 운동은 필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다만 걱정스러운 건 이브리에의 자궁에 머문 마리신의 화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마리신과 담판을 지어야겠어.’
사실 이브리에의 자궁에 머무는 마리신의 화기는 나와의 관계로 많이 억눌러놓은 상태지만 하루라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성욕이 들끓었다.
‘내가 없는 2개월간 어떻게 버텼을까 생각했는데. 아이를 가져서 별일 없이 넘어간 거였어.’
“그런데 로즈는?”
“아. 로즈 양은 방에 있어요. 아직 배울 게 많아서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나오지 말라 했어요.”
“음. 그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뻔했는데.”
내 말에 관심을 가진 건 미스티였다.
“낭군님? 재미있는 일이라니요?”
“미스티, 공적인 곳에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아. 넵.”
이브리에의 말에 그녀가 고개 숙여 답하며 다시 물었다.
“주군. 재미있는 일이 뭐예요?”
“사신으로 온 샤를 백작의 부인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백작 부인을요?”
“응. 다들 깜짝 놀랄 거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연회장에 다 왔을 때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며 말했다.
“모두 입장하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안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빛날 칼리움의 빛 드래곤의 후예 칸 팬 베르다나스 국왕 전하 입장입니다.”
그 순간 안쪽에서 드워프들 특유의 타악기 소리와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던 예식을 담당하는 찰스 행정관을 보면서 말했다.
“저런 낯부끄러운 말은 누가 정한 겁니까?”
“저런 게 좀 있어야 그럴듯하지요.”
그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게 보였다.
나와 여섯의 비들이 모두 입장하자 연회장 안에 순간 조용해졌다.
가끔 기침하는 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만 들리고 조용한 홀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오늘 제국의 사신께서 오셔 환영의 마음을 담아 준비한 연회니 모두 즐겁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비서실 직원이 전해준 술잔 하나를 들어 올리자 모두 함성과 함께 술잔을 들어 올려 마시며 연회가 시작되었다.
샤를 백작은 칼리움의 국왕이 들어오자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신호를 보냈다.
날카로운 눈매를 한 키가 큰 사내가 조용히 샤를 옆으로 다가가 섰다.
“옆에 있는 여인들이 국왕의 비들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대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샤를 백작의 말에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의 시선이 한 사람씩 자세히 살폈다.
“국왕의 바로 우측에 있는 분은 이브리에 성녀임을 아실 겁니다.”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좌측 끝에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저먼 왕국의 셋째 공주 루비나 공주입니다.”
“으음. 역시. 지크프리트와 디올이 저먼 왕국을 칠 때 칼리움이 참전한 이유가 있었군!”
“그리고 나머지는…. 흠. 나머지 비들은 누군지…. 아! 잠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수첩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넘기던 그는 어느 부분에 멈춰서 수첩과 앞을 번갈아 보다가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국왕의 왼편에 있는 분홍 머리 여인 보십시오.”
조금 당황한 듯한 그의 목소리에 샤를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여길 보십시오.”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가 수첩을 들어 샤를 백작이 보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정교하게 그려진 초상화와 그 아래 적힌 특이 사항.
- 미스티 칼리프, 분홍색 머리카락, 상당한 미인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특이 사항이 있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칼리프라면? 그 칼리프?”
“그렇습니다. 칼리프 공작의 사생아로 공작이 매우 아끼는 여식입니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외모와 특징까지 모두 일치합니다.”
샤를 백작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국왕 일행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는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자네는 지금 바로 제국으로 가게 칼리프와 칼리움은 혼인 관계야.”
“네!”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가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의 일행이 샤를 백작 앞에 섰다.
*
“이보시오. 대공.”
흰색 천으로 전신을 덮고 있는 자의 호흡이 불규칙했다.
“말씀하시지요.”
알론하퍼스 대공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표정으로 앞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클클,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시. 기분이 나빠지려 하고 있오.”
“서로 기분이 좋을 상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런가?”
“그런데 무슨 일이요? 그대의 요구를 들어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변수가 생겨서.”
“변수?”
“부끄러우니 내용은 묻지 마시고. 이번엔 내가 제국에 빚 좀 져야겠는데.”
그의 말에 알론하퍼스 대공의 눈이 번들거렸다.
“빚이라. 이자가 높다는 건 아시겠지?”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깟 이자쯤이야.”
“흠. 천하의 바이른 가롯이 저 자세군.”
“그렇다고 빈정대지는 마시요.”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는 흰 천 안의 손에서 검은색 마기가 꾸물꾸물 올라오는 걸 본 알론하퍼스 대공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그래, 뭐가 필요하시오?”
“내 후손의 목숨이 필요하오.”
바이른 가롯의 말에 알폰하퍼스 대공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황족은 건들지 않기로 하지 않았소?”
“그랬지. 그런데.”
바이른 가롯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보기 좋지요? 클클클클.”
바이른 가롯은 와락 구겨진 알론하퍼스의 얼굴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의 얼굴은 다가오는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눈사람 같았다.
“지금 그 모습 때문이요?”
“그렇지요. 가룟 영지에서 키우던 내 가축들이 갑자기 다 없어지는 바람에.”
자기 후손들을 가축이라 표현하는 그를 보면서 알론하퍼스가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그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요?”
“그렇게 됐소. 뭐 이놈 저놈 모으면 되기야 하겠지만. 순수혈통 하나만 못하니.”
“황제는 안되오.”
“당연하지. 그 있잖소. 당신이 빼돌린….”
알론하퍼스 대공은 바이른 가롯의 말에 놀랐으나 겉으로는 놀라지 않은 척하면 말했다.
“내 주변에도 눈을 심어 놨소?”
“아! 오해는 마시요. 당신을 감시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그냥…. 음~, 뭐랄까. 본능적인 느낌?”
알론하퍼스는 고민했다.
전 황제의 큰아들, 낳다가 죽은 걸로 처리했던 녀석이다.
물론, 가롯가의 적통인 왕비의 동의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어릴 때부터 자신의 충실한 꼭두각시로 키워 온 녀석이니까.
하지만 바이른 가롯이 힘을 잃게 된다면 그 계획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자. 매우 비쌀 거요.”
“아무렴. 그럼, 3일 후에 보도록 하지.”
칼리움의 연회장.
“로드, 바이른의 기운이 느껴져요.”
한참 샤를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내게 바이올렛이 다가와 귓속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