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12화 경사
“영주님, 알론하퍼스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나이 지긋한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레오나드로 샤를 백작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장인어른께서? 어쩐 일이지? 연락도 없이.”
샤를 백작이 깃털 펜을 헝겊에 쓱쓱 닦아 꽂아 넣으며 일어섰다.
“호위 몇 명만 데리고 오신 걸로 봐서는 그냥 개인적인 방문 같습니다.”
집사의 말에 샤를 백작이 시종이 건네주는 따듯한 물에 적신 수건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면서 그러나. 데이지에겐 알렸나?”
“부인께는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잘했네. 일단 가보지.”
빠른 걸음으로 알론하퍼스 대공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하는 샤를 백작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샤를이 문에 들어서며 공손히 머리를 숙이자 알론하퍼스가 고개만 돌려 손짓했다.
“됐어. 오늘은 그냥 자네 장인으로 온 거니 편하게 와서 앉게나.”
샤를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차 하나부터 입는 옷 색깔 하나까지도 그날의 일과 날씨, 기분, 또 그날 처리해야 할 주요 업무에 맞춰 철저하게 계산해 입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샤를이 공손히 묻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됐네. 요즘 소화가 잘되지 않아 저녁은 종종 건너뛰고 있네. 간단히 먹을 간식과 차면 충분해.”
대공의 말이 끝나자, 옆에 대기하던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시종들도 모두 데리고 나갔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온건 아니군!’
샤를도 속으로 생각했다.
대공은 아무 곳에서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젊은 적 독살 시도를 경험한 이후 그는 자기 집 외에서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오죽하면 황궁에서조차 황제가 먹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런 그가 차와 간식을 내오라고 하는 건 두 사람이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물러나라는 말이었다.
“데이지는 보이지 않는군?”
“지금은 기도드리는 시간이라. 끝나면 바로 데리고 오라고 사람을 보낼까요?”
“아니야. 됐어. 봐봐야 서로 얼굴만 붉히지.”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다 날 너무 닮아서 그런 걸, 아니지 나보다 더한가? 17년이나 지났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쯧”
혀를 한번 찬 알론하퍼스 대공이 의자 팔걸이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카인드 전권대사가 죽었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칼리움은 기회를 줬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강경하게 접근한 제국의 실책입니다.”
망설임 없는 샤를 백작의 말에 알론하퍼스 대공의 미간이 살짝 꿈틀했다.
“제국은 제국 중심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사신의 목을 벤 것이 아니고 기회를 줬음에도 그들의 말을 무시한 제국 탓이지요.”
“뼈를 때리는군!”
알론하퍼스는 샤를이 제국이라고 말했지만, 이 모든 걸 지시한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협정서를 보내려고 하는데, 내일이면 출발할 걸세.”
“부디 에스케 캅스 경의 목은 붙어 있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사위의 가시 있는 말에 알론하퍼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자네가 대표로 다녀왔으면 하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와 자네의 군대가 말일세.”
부탁이 아닌 명령이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이번 일에 대해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경고하길 바라는군요?”
“그렇지. 제국 최강의 검이라는 자네와 자네의 기사단이라면 충분한 경고가 되겠지.”
알론하퍼스 대공이 문을 나서며 말했다.
“배웅은 필요 없네. 데이지에게 안부나 전해 주게.”
멀어지는 대공을 보면서 샤를 백작이 낮게 중얼거렸다.
“경고라기에는 너무 과하군요.”
황제의 검이라는 샤를의 기사단.
샤를을 비롯한 28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제국 정예 중의 정예다.
기사가 28명의 기사라면 그 아래 딸린 병사와 종기사만 해도 100명이 넘는 부대다.
황제의 검 기사단 종기사라고 하면 평범한 기사단의 기사급 전력이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내키지 않아 침실로 향했다.
“어머? 오늘은 일찍 끝내셨네요?”
마침,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부인과 마주쳤다.
“지금까지 기도하신 거요?”
“네.”
샤를 백작은 수척한 부인을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부인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겠소?”
데이지 부인은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를 잃어버리고 찾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한 어미가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쯤이야.”
샤를은 그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장인께서 다녀가셨소.”
샤를의 말에 데이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또 저에게서 뭘 빼앗아 가려고 오셨나요?”
데이지의 경계에 샤를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요. 이번에 칼리움이라는 곳에 사신으로 다녀와 달라는 부탁을 하시려 온 것이요.”
“칼리움 이요? 칼리움이라면 그 잃어버린 도시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소.”
“세상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데이지가 관심을 가지자, 샤를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당신도 함께 가지 않겠소? 바람도 쐴 겸.”
데이지 부인은 17년 전 두 살 된 딸을 잃어버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외출하지 않고 백작성에 마련된 기도실에서 매일 기도만 했다.
그때는 사이가 좋았던 알론하퍼스 대공의 저택을 방문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아이를 잃어버렸지만 한참 내전 중이던 때라 대공의 지시로 아이를 추격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데이지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매일 기도만 했던 터였다.
“저도요?”
다른 때와 다리 관심을 보이는 데이지 부인을 보고 샤를 백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듣기로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니 한번 다녀와 봄이 어떻소?”
“하지만 기도를….”
“기도는 가면서 마차에서 해도 되고 칼리움은 마리 교와 월교 두 종교가 국교라고 하니 기도드릴 곳이 많이 있을 겁니다.”
“월교요? 세상에 그건 이교도 아닌가요?”
하지만 월교라는 말 때문인지 데이지의 눈이 더 흔들렸다.
사실 그녀 역시 지금은 이렇게 잃어버린 딸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지만 알론하퍼스 대공을 가장 많이 닮은 딸로 알려질 만큼 예전에는 호전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왕비가 마리 교 성녀인 이브리에라고 하더군요.”
결국 데이지는 샤를의 설득에 넘어가 17년 만에 성 밖 외출을 결심했다.
그녀의 풍성한 금발을 쓰다듬으며 샤를이 모처럼 부인을 안아 주었다.
*
“내일이면 제국의 사신이 도착하겠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를 불러와요.”
내 지시에 노틀이 보고서를 들썩이다가 말했다.
“벌써 말입니까? 이번에도 제대로 된 문서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번에도 저번 같은 조서나 칙서 같은 게 온다면 이젠 더 이상 대화는 없을 겁니다.”
“제국을…. 등 지시려는군요?”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노틀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 우당탕탕.
“로즈 양. 그렇게 들어가시면….”
문을 박차듯 들어온 사람은 금발의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로즈였다.
“주군, 주군. 큰일이에요. 엄~청 큰일이다. 이거예요.”
“로즈?”
로즈는 내 앞까지 뛰어왔고 그녀를 저지하려던 경비병들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이자 쫓아오던 걸 멈추고 돌아갔다.
“무슨 큰 일이기에 그래?”
내 물음에 로즈가 내 앞에 서더니 갑자기 짧은 치마를 번쩍 추켜올렸다.
“로즈, 이젠 속옷도 입는다. 이거예요. 주군.”
“커흡.”
“흡.”
나와 노틀이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켜자, 로즈는 노틀을 한번 돌아보고는 짓궂게 웃으며 다시 치마를 내렸다.
“아! 다른 사람이 있었네? 로즈의 몸을 볼 수 있는 건 주군뿐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주군.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노틀이 무안한지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로즈가 그런 그와 나를 돌아보면서 씩 웃었다.
“로즈. 아직도 그런 소리 하면 이브리에에게 혼나지 않아?”
“으음…. 스승님도 포기했다. 이거예요.”
“포기해?”
“로즈도 언젠간 스승님이나 다른 후궁 언니들처럼 주군과 잘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거예요.”
“하… 참. 그래서 이브리에가 그러겠데?”
“음. 로즈 하는 거 봐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거예요.”
“이브리에 또 말하다가 말렸군! 그런데 큰일이라니.”
“아참. 큰일이에요. 스승님이 음식을 먹지 못해요. 먹으면 토하고, 먹으면 토하고 그런다. 이거예요.”
“뭐? 언제부터?”
“오늘. 아침?”
나는 벌떡 일어서 이브리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의사는?”
“지금 스승님 방에 갔을 거예요. 조금 전에 에듀 귀비님이랑 루시 비 님이 와서 의사를 부르러 갔거든요.”
빠르게 이브리에의 방으로 향하자, 그녀의 방문이 열려 있고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길을 비켜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대충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받아 주고 이브리에를 향해 다가갔다.
“이브리에.”
“아! 오빠.”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원래 하얗던 이브리에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루 종일 고생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고 입술도 말라 있었다.
“밥을 못 먹는다니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지….”
“어. 음식이 문제라도 있던 거야?”
“아니. 나. 엄마 된대.”
“응? 무슨 말이야? 엄마라니?”
그때 내 옆에 있던 의사와 시녀들이 머리를 숙이며 동시에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주군. 왕후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에 나는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이브리에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나를 보며 말했다.
“축하해 오빠. 아빠가 된다네.”
조용히 그녀 옆으로 다가가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하해 이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