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08)
522.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 간다고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던 얼굴들.
특히나 마음에 걸리는 얼굴 중 가장 으뜸은....
역시 민희의 남편....
석진이었다.
이전에 짧게 만났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사실 그전....
옛날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말끔한 인상.
결혼식장에 많이 걸려 있는...
그런 흔하디 흔한 신랑의 얼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기억에 담기엔....
그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민희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남겨 놓을 여유가 전혀 있지 못했다.
아니...
애초 기억에 담아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 옆에 서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민희가....
다른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그것을 선언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듯 옅은 미소를 품은 채 앞을 보는 사진 앞에 서서....
이미 그것을 본 순간부터....
내 정신은 반쯤 날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래에게서 청첩장의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에 휘몰아쳤던 폭풍과는 비교도 되지 못하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멀리서 보았던.....
환한 조명 속 민희의 모습.
담담하게 보고....
조용히 나오자란 결심에서....
난 얼마나 충족시키고 물러났는지....
평가하기 조차 부끄러운 하루의 기억.
그 모든 것에서....
민희의 남편이란 사람의 기억은....
희미하기만 했던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가 만나자고 연락을 보내며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건...
불과 얼마 안 된, 정말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눈 그 시간 또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부드러운 말투.
정중한 표현.
그리고....
여유 넘치는 태도까지.
사실 나였으면....
그렇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지는 못했으리라.
내 아내가 과거의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아니 그게 무슨 이유이든....
어떤 시간의 남자이든....
절대 그런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무언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상태이긴 했지만....
내가 남편의 입장이었다면 절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게 민희인데....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얼굴에 분노....
있는 감정 없는 감정 모두 드러낸 상태에서....
공격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을 게 뻔했다.
대화 자체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 내 얼굴은....
어떤 상태였을까.
그때 이미 유부녀인 것도 알고 있었고....
임자 있는 몸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민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얼른 좋아라....
뛰쳐 나가서 만나고 있던 난.....
분명 그에게 주눅 든 모습을 보였으리라.
죄인의 마음으로...
죄인의 자세로....
그를 맞이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문득 비교되었을 내 자신의 모습에 좀 더 새침해졌다.
그랬기에....
이번에 만나면 당당해지자....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그때와 달리....
이미 선을 넘어서....
아예 비교가 안 될 입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뻔뻔하고 몰염치한 사람이 될 지라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고 나니....
몸이 먼저 경직되어버렸다.
그건 내 손 아래 있던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그녀의 어깨도 금세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았을까.
하긴....
이미 내 얼굴은 굳어져서는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나마.....
둘이 좌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는.
내가 밀어냈든....
민희가 밀치고 떨어졌다면....
뒤에....
작은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생각지도 못한 만남....
준비가 안된 우리들(?)의 만남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이 되어....
민희... 나... 그리고 석진....
세 사람을 감싸 안았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멈춰진 것 같은....
일촉즉발의 시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찰나의 시간이었다.
채 일초도 안 되는 시간.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은....
어이없이 순식간에 끊어져 사라지고....
멈췄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석진의 목소리.
" 훗.... 우리.... 구면이죠? "
엉겁결에 잡아버린 손.
나는 석진이 다가와서는 손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마주 잡고 말았다.
딱딱한 느낌.
약간 마른 손의 감촉과 함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렸다.
동시에....
느껴지는 석진의 손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는 정반대였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렇게 맞이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짧은 악수가 끝나고 손과 손이 떨어진 뒤....
그는 민희를 보고는 미소 만을 보여준 채 천천히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고....
사람들 사이로 석진이 사라진 뒤 민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구...면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
목소리에 끌려서 자연스럽게 민희의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엔 하얀 얼굴의 그녀가 있었다.
눈동자엔 조명등이 가득한 상태에서....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자리잡은채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말을 얼버무렸다.
" 이...일 때문에 만난 적이 있었거든. 그땐.... 물론 전혀 누구인지 몰랐고. "
" 일??? 방송 때문에 석진 씨를 본 적이 있었다고??? "
" 응.... "
하지만 민희의 눈동자에는 의문의 기운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하긴....
이런 거짓말로 민희의 의구심을 채워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입에 나오는 대로 뱉어낸 말일 뿐.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지어낸 거짓말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때 내 머리엔.....
그냥 아수라장의 시작을 너무도 가볍게 지나갔다는 사실 만으로....
감사하다고 여기느라....
거짓말이고 뭐고....
상관조자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내가 한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짧게....
옅은 숨을 내쉬곤 최선을 다해 억지로 미소 지었다.
" 인사드리러 가자. 아버님께. "
그제서야 왜 우리가 이곳에 서있었는지....
깨달은 민희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걷기 시작하자 그 뒤를 말없이 쫓아왔다.
석진이 나온 방향으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역시나 익숙한 얼굴과 이름이 보였다.
민희의 아버지 성함.
그리고....
사진 속 얼굴은....
내 기억 속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사진이라서 더....
세월을 먹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보정이 들어간....
그의 얼굴은....
오히려 젊어 보였다.
그리고...
엄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는 두 눈동자 또한....
그날의 기억과 거의 똑같은 모습....
그대로 였다.
만약.....
민희가 자신의 집에서....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사귀고....
깊은 관계가 되었을 때....
우리가 결혼을 생각하고....
함께 하자고 약속했을 그 시기에...
말을 했었다면....
미래가 바뀌었을까?
인생에서 이프(IF)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일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특히...
과거의 일을 두고....
만약이라는 단어를 자꾸 붙이게 되면....
점점 현실에서 뒤떨어지게 된다는 말 또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처럼....
나약하고 후회 많은 존재가 있을까.
과거의 잘못....
과거의 회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숨을 몰아쉬게 되는 기억의 순간....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하는 건....
천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 많은 인간 중 하나 였기에....
수많은 후회의 순간이 있었고 그 중 대표적인 하나가....
민희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었다.
민희가 울면서 내게 했던 말처럼....
그냥....
그 순간만 아닌 척....
모른 척 숨길 수 없었냐는...
그 울부짖음처럼....
아니, 미리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되새겼다.
민희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집에서....
가장 큰 반대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선 존재는....
역시 이 사진 속 주인공....
민희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보았던 짧은 단면이었지만....
그는 가장의 위치에 서서....
왕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이를 먹은 뒤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도....
내가 민희와 만나는 순간에는.....
그 어떤 절대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그런 아버지였겠지.
인사드린 뒤....
갑자기 귀가 시간이 생기고....
그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던 민희가 떠오르며.....
심장이 찌르르 울려왔다.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뒷머리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코로 숨을 들이키고는 민희 아버지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는....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안내 데스크에서 일어서며 작게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누나! 어디 갔었어?! 엄마가 찾.... "
아마 내 뒤에 있는 민희를 향한 말인 듯 싶었는데....
이내 그 시선이 나를 향하면서 바로 말을 멈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이 또래를 봐선 민희의 막내 남동생이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예전에 봤던 기억이 가물거려서 그런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서 그런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도 했고....
남동생이라 생각되는 인물 또한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뒤에 있던 민희가 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 응, 종석아 알았어. 오빠... 들어가자. "
이내 팔을 이끌며 앞서는 민희를 보며...
그리고 당황하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던 남동생을 지나쳐....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장례식장의 풍경.
그곳엔....
또 하나....
익숙한 얼굴이 있었으니.....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