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99)
513.
그냥 문자 메세지 하나 일뿐인데....
세 글자에 물음표 하나 일 뿐인데....
민희는 마음이 뜨듯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서있는 자신만 느껴졌다.
민희는 핸드폰을 쥔 채 가슴에 올렸다.
보고 싶다....
울 오빠.
하지만 이곳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음을 떠올리고....
바로 추스른 채 일단 자리를 피했다.
자신을 보는 시선에 의구심을 가진 듯한 모습이 절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 저어... 음식 좀.... 더 가져올께요? "
양해라고 하기엔 거의 통보와 가까운 말 한마디 남기고 다리를 옮겼다.
그리고....
음식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 뭐가 필요하세요? "
들어서자마자 도우미로 와계신 아주머니가 바로 말을 걸어왔다.
민희는 빠르게 답했다.
" 아! 반찬 더 달라고 해서요. "
" 아하! 뭐 필요하데요? 저기 담아놓은 거 있는데.... 아니, 새로 담아드릴까요? "
"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가져갈께요. "
민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일회용 접시를 들었다.
아주머니도 알았다는 듯 몸을 비켜주며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찬들 이것저것 담고 과일도 따로 접시 하나를 더 꺼내서 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 어머... 뭘 이렇게 가져왔어요? 고마워요! "
누군지 가물거리는....
새로운 일행이 웃으며 민희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그새 또 다른 사람이 온 듯 한데 친척분의 아는 지인인지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 아니에요.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잽싸게 몸을 빼서 다시 종종걸음으로 입구로 향했다.
그리곤 신발을 찾아 신고는 그대로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 화장실....
들어가자마자 비어있는 곳....
그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바삐 움직이는 손가락.
[ 괜찮아 오빠 이따 연락할께 ]
전송되자마자 문자를 보내고....
그리고 바로 사라지는 숫자 1을 보면서....
다시 핸드폰을 가슴에 둔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
핸드폰 너머 문자를 읽고 있을...
우태가 보일 것 같았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빠....
우태 오빠....
머리끝까지 찌르르 울리는 느낌 속에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벽에 기대섰다.
마음은 당장 통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곳에도 누군가 들을 수 있었으니 애써 참았다.
한참....
그렇게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접객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소리 속에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은 바로 석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검은 상복을 입고...
팔에 완장을 차고 있는 그....
천천히 돌아서며 민희를 보았다.
언제나 같은 표정.
같이 함께 했던 시간 내내....
보았던 그의 얼굴....
그의 표정.
지금도 똑같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민희는 어쩌면....
지금 남편 얼굴.....
그 아래 담겨 있는 모습은....
조금 다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민희의 오해나 착각이었을지....
아니면 진짜 그런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석진의 시선 속에서 분명.....
미묘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다.
**************
할 일이 없다는 건....
누군가에게 팔자 좋은 상황이긴 했는데....
지금 우태에겐 전혀 반대였다.
박 부장과의 통화로 회사 일까지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어지자....
정말 아무 것도 해야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울 기분도 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졸리지도 않았다.
밤새 서울까지 올라오는 동안....
잠 한 숨 자지 않았는데도....
졸리거나 잠이 올 거 같은 조짐은 아예 시작조차 없었다.
그냥 일광욕이나 할까 하는 심정으로....
햇볕을 받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희에 대한 생각.
민희가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결국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눈에 불을 켠 우태가 찾은 건 청소였다.
아까 간단히 보이는 것만 정리했던 집 안을 둘러보다가 입술을 꽉 다물며 아주 작정을 하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철 지난 옷들도 싹 꺼내서 빨 것은 빨고 치울 것들은 싹~! 박스에 넣어서 정리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별로 일거리가 되지 않았다.
평소 우태가 입는 옷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보니 금방 끝내 버렸다.
일단 세탁기를 돌리고는 다시 둘러보는데....
이번엔 여기저기 쌓아놓은 물건들이 보였다.
고장 난 가전제품부터 안 쓰는 물건들....
그리고 하나 둘 방구석에 쌓아놓은 박스와 함께....
책 같은 것들이 각각 빌딩처럼 세워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전부터 정리해야지 생각은 했던 것이긴 한데....
한번 손대면 일이 점점 커져서 실로 대공사가 되고도 남아...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짐을 끄집어내고 정리하다 보면....
거실에 발 딛을 곳 하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예전에 한번 청소한다고 했다가...
거의 일주일을 방구석 빈자리에....
웅크리고 자야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엄청 빡세게 청소했었는데....
어느새 또 세월이 지났다고 이렇게....
물건들이 쌓여버렸다.
암튼....
싹 버려야 하는데....
흐음.....
막상 버리려고 마음먹고 정리하면....
보이는 물건마다 이상한 애착이 생기면서....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곤 했었다.
결국 차곡차곡 잘 정리하고 힘들게 고른 것만 버리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 결과로 남았다.
어찌 됐든....
그 뒤로는 귀찮기도 하고....
회사 일에 지쳐서 돌아온 몸으로....
다시 그런 청소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
지금까지 방치해버렸다.
하지만 지금 딱 필요한 것이 그런 대공사(?)였기에...
우태는 바로 박스 정리부터 손을 댔다.
회사에서 받은 선물....
대충 담아놓은 잡동사니.....
전기코드와 어디에 썼는지 가물가물한 어댑터선 등등.....
박스를 열어볼 때마다 온갖 생각지도 못한 수집품(?)으로....
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어대게 만들었다.
청소의 시작이자 끝은....
결국 모두 버려 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일단 손을 멈추고 집에서 나와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쓰레기봉투 큰 것을 몇 장 구매하면서 마실 음료 등을 사가지고 돌아와서는 본격적인 청소에 들어갔다.
아낌없이 버리는 나무...
아니, 사람이 되어 그간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을....
그냥 마구잡이 봉투에 담았다.
재활용 쓰레기 같은 것은 따로 하얀색 비닐 봉투에 담아서 묶어버리곤 거실 구석에 쌓았다.
한참을 치우고 나니까 아까 샤워했던 것은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간을 잘도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한참 물건을 꺼내고 분류하고 버리는 동안에 어느새 서서히 집안은 어두워졌다.
우태는 일단 끌어냈던 쓰레기봉투들이 집 밖으로 내놓고....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듯 싶자 꼈던 목장갑을 벗고는....
잠시 소파에 가서 앉아서 음료를 마셨다.
오랜만에 바닥을 드러낸 방바닥을 보면서....
문득 그 박스 뒤에 있는 책상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 책상은 옛날 어린 시절 자신이 쓰던 물건이긴 한데....
낡기도 하고 자신이 쓰기엔 작아져서 더 이상 쓰지 않은 지 한참 된 골동품이었다.
괜히 공간만 차지하는 것 같아서 아예 이 참에 저것도 버려버릴까 하는 생각에....
남은 음료를 그대로 한 번에 마셔버리곤 엉덩이를 들어 책상 쪽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군데군데...
녹슨 자국이 보이는 책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 무거운 박스들이 올라가 있었음에도...
워낙 튼튼했던 탓에 변형도 되지 않았다.
큰 서랍을 열자마자 옛날 학창 시절....
중, 고등학교 시절 물건들이 안에 채워져 있었다.
검은 잉크가 묻어 있는 볼펜들부터 수정액....
싸인펜, 현광펜 등등등....
온갖 문구용품들이 굴러다니고 심지어 그 와중에 학생증도 보였다.
앳된 자신의 얼굴이 박혀 있는 학생증을 보니....
우태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어린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아직 고등학교 입학 전이라 그런지....
더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땐 힘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 시작되자마자 후다닥 밥을 먹고는....
운동장에 내려가 남은 시간 전력으로 농구를 뛰고도....
오후 시간 수업 다 받고는 또 농구를 한 뒤에 집으로 갈 정도였다.
그렇게 뛰고 또 뛰고 한참 농구에 빠져 살았는데....
그건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키가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뛰고 또 점프하고 농구를 했더니....
갑자기 어느 순간 키가 쑥쑥 커져서는....
반 중간이었던 우태의 번호는 뒤로 확 밀려버렸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받았던 터라...
어느새 뒷자리에 앉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자유(?)를 즐기게 되었다.
특히 맨 뒷자리 창가에 앉게 되면...
간간히 수업 중에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 아닌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었다.
언제 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푸르른 학교 앞 나무숲을 보면서....
얼굴 가득 느꼈던 바람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아무튼....
그래봐야 지금은 완전 오래전 기억이었고....
그때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곤 지금 연락이 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마치 책상 속 문구용품들처럼....
빛바래고 쓸 데 없는 물건이 되어.....
기억에서도 거의 떠오르지 않을 정도 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