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70)
484.
술에 취한 듯...
목소리가 컸던 것도...
한몫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과 여자애들...
선배...들도 있었는데...
그 애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랬을까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애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등에 닿아있는 벽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간간히 들어오는 담배 냄새가...
날 괴롭혔다.
머리에 지끈 거리는 두통을 부르는...
그 독한 냄새....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내 이름이 계속 흘러나왔으니까.
" 민희 봤냐? "
" 흐흐. 그러게.... 오늘 무슨 날이길래 민희가 다 여길 왔데? "
" 흐흐.... 소문대로 진짜 걸레이긴 한가 보지... 그간 참았다가 더 이상 못 참아서 나온 거 아니겠어? 큭큭..... "
" 씨발... 쿨타임 찼냐? 못 참아서 나온 게 뭐냐? 크흐흐흐.... "
처음엔....
내가 잘 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걸레?
걸레...라고 한 거....
맞아????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왜 걸레라고 하는 거야????
그 애들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다고 해서....
전혀 누군지 몰라 볼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 같이 수업도 듣던...
애들이었다.
웃으면서 대화도 나누었던...
같은 학번 동기들.
가끔 툭 치면서...
아는 체 하며 장난 아닌 장난까지 걸어오던...
그런 애들이었다.
뭐라고 계속 떠들어 댔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귀담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다시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익숙한 이름이 다시 내 정신을 찾아왔다.
" 크흐흐... 아씨... 오늘은 성현 선배 차례인가 보다. 씨발. "
성...현 선배?
성현 선배 차례라는 게 무슨 의미?
심장이 쿵쿵 거리는 가운데...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지라....
귀만 쫑긋 세웠다.
" 그러게.... 언제 민희 옆에 붙었데? "
" 하... 복학생들 진짜... 주제파악을 못한다니까! "
" 으휴... 진짜 나이 어디로 먹었는지... 쯧쯔.... "
" 오늘 민희 오자마자 애들한테 설레발 딱~! 쳤잖아. "
" 엥? 정말??? "
" 그래! 민희 오는 순간... 바로 담에 자기 쏜다고 옆자리 비면 자기가 갈 꺼니까 모두들 가만히 있으라고 바로 전달하라고 시켰다니까! "
난 소름이 끼쳐서....
아예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성현 선배가 내 곁에 온 것이....
첨부터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온 것이라니....
" 헐... 미쳤다.... "
" 씁... 저번부터 그럴 거 같았어. "
" 응? 그게 뭔 소리? "
목소리가...
살짝 변하더니....
낮게 깔렸다.
" 저번 술자리 있잖아. 그때 성태 형이 얘기할 때.... 그 형... 졸라 음흉하게 보고 있었잖아. 참나.... "
" 엥? 그때 성현 선배가??? "
" 그래! 구석 자리 벽에 딱! 기대앉아서는 졸라 안 듣는 척 하더니만.... 순 뺑기였잖냐.... 씨발.... 암튼 그 형도 졸라 여자 밝힌다니까! "
" 푸헐.... 정말? 대박... 난 전혀 몰랐는데..... "
" 푸하... 졸라 귀도 어둡네.... 그 형.... 알고 보면 졸라 여자 밝히고 바람둥이래. 딴 과하고 소개팅 자리 생길 때마다 주선자한테 끼어달라고 졸...라 진상 짓 한다더라. "
" 엥??? 푸하... 그런 얘기 첨 들어. 하하... 그냥 술.. 잘 사주고 밥 잘 사주는... 좋은 선배인 줄 알았는데 크흐... 그게 아니었어? "
" 야! 괜히 술 사주고 밥 사주겠냐? 다 꿍꿍이가 있는 거지. 오늘도 딱 봐! 민희 옆에 왜 애들이 없겠냐? 옆에 있던 일학년들 조용히 떼어낸 것도 다 성현이 형이 시킨 거래, 임마! "
" 크하하... 정말 오늘... 날 잡았네... 그 형... 크흐흐.... "
" 그나저나... 민희 그년이 젤 웃긴다니까? "
" 응? 뭐가? "
" 씨발... 저번에 같이 술 먹자고 했는데... 그땐 졸라 튕기더니... 오늘은 왜 왔는지 진짜... 모르겠다니까? "
" 푸하.. 넌 또 언제 민희한테 그런 말도 다했냐? "
" 씁.... 몰라 임마! 한번 말이나 던져 봤는데.... 대차게 까였잖아... 씨바.... 저번에도 까더니만... "
" 푸하하하.. 씨바... 넌 또 뭐냐? 푸하하... 열심히도 도전했네... 크하하하... "
" 씨발... 그만 웃어라... 졸라... 빡치니까.. 암튼.. 졸라 웃긴 년이야... 진짜.. 몸이 간질거려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씨발... 원래부터 우태 형이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니까.... 졸라 까지긴 했을 거야. 퉷.... "
" 쩝... 군대 가있는 우태 형만 불쌍하지 뭐.... 군대에서 뺑이 치는데... 민희.. 그 년이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우태 형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테니까... "
" 그러니까 군대 가기 전에 차라리 헤어지고 가야 한다니까? 군대 갔는데 씨발... 고무신 꺼꾸로 신으면 아, 욕 나온다.... 바로 총 들고 나와야지 뭐..... 씨발 것들.... "
" 야! 담배 다 폈으면 이제 들어가자... 떠들었더니 씁... 목.. 졸라 마르다. "
" 크흐흐.... 그래 씨발.... 마시자.. 마시고 죽자! "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뛰었던 거 같다.
일단...
그냥 반대편으로...
달렸다.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스치며 마구 흩뿌려졌다.
박성태....
그가 안 보이는 것만으로 안심했던 내가...
너무 바보였다.
그가...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지...
이제 알았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정말...
그때...
법에 그를 넘겼어야 했을까...
후회 속에서...
절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나를 향한 시선 속에...
저런 얘기가 흘러 다니고 있었다니....
가슴이 막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특히 더....
날 아프게 하고 가슴이 터질 듯...
힘겹게 만든 것은....
나하고 우태 오빠와의...
예쁜 추억이....
저런 애들 입방아 속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더럽혀졌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어딘지 모를....
빈자리...
사람이 없는 공간에 들어서자....
순간 벽을 잡고는....
뜨거운 것을 토해냈다.
속이 뒤집어지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힘차게 쏟아져 내렸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화장을 고치고는....
다시 주점으로 들어갔다.
우태 오빠와...
게임 속....
무슨 보스를 잡으러 가는...
그런 전사의 마음처럼....
아니...
역사 속 누군가처럼...
날카로운 칼을 품에 품고....
적장의 천막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향했다.
주점 안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자리....
나래와 성현 선배 둘 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둘 다 거의 동시에 나를 봤는데...
나래가 먼저 일어나며 물었다
" 얘! 민희 너... 어디 갔었어? 너... 하도 안와서 화장실에 나가봤잖아. 거기에도 없고.... "
걱정했다는 말은....
나래의 얼굴이 이미 가득...
적혀 있었다.
성현 선배도 무슨 일 있었냐는 물음을 가득 단 채....
날 바라보는 중이었다.
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아... 그랬어? 미안... 나... 집에서 연락이 와서 통화하느라.... "
" 엉? 민희 너.. 집에서 전화 왔었어? 여기 온다고... 말 안한 거야? "
뜻밖이라는 나래의 물음.
당연했다.
우태 오빠가 군대에 간 뒤....
그렇게 빗발치던 집에서의 단속 전화가....
천천히 옅어진 것을 아는 그녀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 하니...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 엉? 집에서 전화 왔었구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
그때 들리는 성현 선배의 목소리.
난 그를 살짝 보고는....
나래를 향해 대답을 이었다.
" 응.... 오늘 오랜만에 모임 간다고 미리 얘기는 했는데... 그래도 걱정 되셨나 봐. "
" 아하... 울 민희... 집이 좀 엄하신가 보구나? 하하... "
분명 대답은 나래에게 했는데 성현 선배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 네에. 부모님이 좀... 엄하세요. 훗.... "
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노려본 것이었지만...
입가의 미소 때문에 그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싶었다.
" 하하.. 민희 네가 귀한 딸이라 그런가 보지, 뭐. 하하하.... "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 성현 선배의 모습.
하지만...
난 그의 웃음을 그대로 받아드릴 수 없었다.
아까 들었던 얘기 때문이었을까...
성현 선배의 웃음 속에는...
왠지 비웃음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걸레 주제에...
무슨 집에 엄해?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의 웃음소리 속에...
이런 소리가 섞여 있는 듯 싶었다.
난...
거칠어지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어느새 채워진 내 잔을 들어....
탄산이 빠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핏 보이는 곁눈에....
나래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
#23. 궤도를 벗어난 열차처럼. (4)
언젠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다란....
생각을 해본 적 있었다.
착하기만 하고...
뭐든 좋은 게 좋은...
그런 아이가 아닌....
똑바른 소리를 잘도 하며....
양보하지 않는...
그런 나.
그건 어쩜...
같은 반이었던...
누군가를....
동경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던 그 아이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는....
태양 같은 존재감을....
뽐냈다.
애들 사이에서도...
혼자서만 꼬리날개를 편 공작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그런 삶은....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부러웠던 듯 싶다.
그렇게...
인생의 주인공인 양....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과 결정으로...
똑부러지게...
앞장서서 나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생각 속으로만...
품었을 뿐이었다.
난 여전히...
소심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쪽을 택했고....
또 그게....
편하기도 했다.
변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딱딱하게...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취한 척 하기로 했는데....
정말 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현 선배와 이렇게 희희덕 거리고 있다니...
웃는 척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진짜 웃고 있었다.
진짜....
미친 년 처럼...
나래가 옆에서 말렸지만....
난 개의치 않고 연신 그와 잔을 부딪치면서....
술을 마셔댔다.
2차 노래방에서도....
내 곁에는 성현 선배가 있었다.
나래도...
소미도 같이 2차까지 오긴 했지만....
노래 부르고 노는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
특히...
나래는 1차 주점에서처럼 내 옆에 종종 와서....
말을 걸어주고 있었지만...
이번엔 내가 건성으로 받아 넘겼다.
걱정하는 시선.
염려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나래를 보면서....
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