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38화. 씻고 와, 오빠.]
선배가 당황해서 한 번 더 불렀을 때였다.
다희는 아주 귀찮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키세요."
"어...?"
"시야 가리니까 좀 비키시라고요."
건조하다 못해 서늘한 목소리.
선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절도 아니고, 아예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 취급이었다.
"아니... 나는 그냥 인사나 좀 하려고..."
"저, 술친구 필요 없어요."
다희는 선배의 말을 딱 자르며, 그 잘생긴 얼굴을 벌레 보듯 훑어내렸다.
"그리고 수준 안 맞는 대화는 딱 질색이라.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가던 길 가세요."
"......!"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잘생긴 선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갓 입학한 1학년 후배에게,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모욕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등 뒤쪽 테이블에서 킥킥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헐, 대박. 야, 김민준 까인 거야?"
"와... 맨날 예과에서 깝치더니 꼴좋다."
상황을 지켜보던 예과 여자 동기들이었다.
평소 얼굴만 믿고 가벼운 행실을 아니꼬워했던 그녀들에게, 신입생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그의 모습이 속이 후련했다.
쏟아지는 시선과 동기들의 노골적인 비웃음을 견디지 못한 선배는, 결국 욕설을 삼키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예과 최고의 킹카조차 다희에게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역시 내 동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민우는 내심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눈 높은 여왕님이 유일하게 집착하는 남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민우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다희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구석에 있는 민우와 눈을 맞췄다.
찌릿.
하지만 다희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민우의 치명적인 척하는 표정에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곧장 민우의 아랫도리와 목덜미를 훑었다.
킁.
거리가 꽤 멀었지만, 그녀의 콧날이 미세하게 벌름거리는 게 민우의 눈에 포착되었다.
'...어라?'
민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 상황을 보자.
테이블마다 놓인 고급 와인 잔과 플레이트 위 치즈 플래터, 스테이크 조각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 은은한 레드 와인 향과 구운 고기 버터 냄새, 그리고 신입생들의 긴장한 땀 냄새가 섞여 진동을 한다.
거리는 10미터.
'잠깐... 이 아비규환 속에서 내 냄새를 골라 맡는다고?'
민우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저건 생물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 난장판 속에서 어떻게 내 냄새를 골라 맡는 거지?
설마... 쟤도 나처럼 각성한 건가? 오빠 한정 체액 감지 Lv.99?
전생에 개였나? 진짜 무섭네, 다희 저년.
민우가 혼자서 혼자 망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정확했다.
다른 암컷(차수현)의 냄새를 감지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하고 지배적인 암컷의 냄새가, 자신이 아껴둔 오빠의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다는 사실에 극도로 불쾌해하고 있었다.
다희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았다.
그리고 혼자 실실 쪼개고 있는 민우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입모양으로 말했다.
(쪼개지 말고. 씻. 고. 와.)
그 순간, 다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오빠의 목덜미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민우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
민우의 입가에 걸린 자칭 비장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초능력이든 개코든, 결론은 하나였다.
걸렸다는 것.
하지만 다희의 눈빛은 단호했다.
당장 가서 빡빡 씻고 오지 않으면, 집에 가서 가만 안 두겠다는 살벌한 경고였다.
민우는 저도 모르게 꼬은 다리를 풀고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민우가 아직도 다희의 시선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고 있을 때, 갑자기 연회장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며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자자, 주목! 교수님들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외쳤다. 캠퍼스 권력의 정점, 교수진이 등장했다.
"의대 최고의 잉꼬 부부이자 엘리트 부부, 산부인과 강유하 교수님과 정신의학과 박준영 교수님입니다!"
함성 속에 강유하가 걸어 들어왔다.
주변의 헐렁한 과잠 사이에서, 그녀의 실루엣은 날카로울 만큼 이질적이었다.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얇은 실크 재질의 펜슬 스커트.
특히 치마 정중앙을 과감하게 가르고 올라온 깊은 앞트임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 안쪽을 아슬아슬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민우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훑었다.
얇은 실크 블라우스가 유선형의 부드러운 젖살을 빈틈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브래지어 컵 위로 둥글게 밀려 올라온 뽀얀 가슴이 서로 맞닿아, 그 사이로 깊고 아찔한 골짜기가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러운 살결이 출렁이며 블라우스 원단을 팽팽하게 밀어 올렸다.
그녀가 인사를 마치고 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자 섬유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민우는 들을 수 있었다.
투둑-.
유난히 눈이 가던 엉덩이가 의자에 눌리며, 슬릿이 깊게 파인 스커트 옆선이 하체를 조여오고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꼬는 순간.
매끈한 다리가 교차되며 스커트의 트임이 스르륵 벌어졌다.
검은색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 안쪽 살결이, 의자에 눌려 갈 곳을 잃고 트임 밖으로 묵직하게 비어져 나왔다.
다리를 꼬는 힘에 슬릿이 더욱 벌어지며 안쪽 깊은 곳이 드러났다.
팽팽하게 당겨진 천 위로, 음부의 두툼한 틈새가 세로로 갈라져 민망할 정도로 선명한 윤곽이 찍혀 있었다.
시선을 강탈한 것은 그 틈새의 색깔이었다.
허벅지가 맞닿아 비벼지는 가장 깊숙한 곳의 스타킹 원단이, 끈적한 습기에 반짝거렸다.
안쪽에서 배어 나온 점액이 팽팽하게 당겨진 스타킹 원단을 적신 탓에, 조명을 받을 때마다 세로로 갈라진 틈새 위로 질척한 액체가 은은하게 번들거렸다.
'......축축해 보이는데.'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같았으면 시선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 당신도 날 원한다는 거지? 어디 한번 덤벼봐.'
민우는 용기를 내어 강유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유하의 입꼬리가 진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와인 잔을 들어 민우에게 건배를 제의하듯 까닥거렸다.
옆에 앉은 남편 박준영 교수의 시선은 분명 민우가 어딜 훔쳐보는지 알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안경을 추어올리며 웃어보일 뿐이었다.
“당돌하네? 귀여워라.”
강유하의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녀의 여유로운 미소 앞에서, 민우가 부리던 치명적인 척은 그저 귀여운 재롱으로 전락해 버렸다.
'젠장... 만만치가 않네. 당황해서 도망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먹이를 앞에 둔 것처럼 암사자처럼 입술을 축이는 꼴이라... 좋아, 이 정도는 돼야 굴복시키는 맛이 있지.'
그때였다.
"야, 예과 1학년. 너 지금 누구 앞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어?"
민우의 왼쪽 어깨 위로 묵직한 하중이 실렸다.
복학생 선배의 두툼한 손가락이 민우의 어깨 살점을 강하게 움켜쥐며 짓눌렀다.
셔츠 너머로 선배의 축축한 손바닥 땀이 배어들었다.
코끝에는 술냄새와 고기 기름기가 섞인 습한 숨결이 닿았다.
‘하... 좋았는데 기분 잡치게 진짜.’
하지만 참아야했다.
"이민우입니다."
"이민우? 너 아까부터 눈깔을 어디다 둬? 교수님들 안 보이냐?"
선배가 민우의 어깨를 아래로 거칠게 짓누르자, 테이블 위 빈 잔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선배의 벌건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고, 그의 충혈된 눈동자 속 핏줄이 민우의 시야에 박혔다.
그는 민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낮게 읊조렸다.
"너 같은 놈들이 꼭 본과 가서 사고 치더라.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와. 너 같은 놈은 정신 교육부터 다시 해야겠으니까."
선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민우의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주변 예과생들은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였고, 연회장의 소음이 민우의 주변에서만 썰물처럼 빠져나가 멀어졌다.
민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자신의 빈 잔에 와인를 채웠다.
투명한 액체가 잔을 채우며 찰랑거렸다.
민우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방 방문은 사양하겠습니다, 선배님."
민우는 곁눈질로 멀리서 자신을 응시하는 다희의 가늘어진 눈매와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아 와인 잔을 만지는 강유하 교수의 손가락 끝을 확인했다.
"저는 이미 VIP 예약이 꽉 차 있어서요. 시시한 자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의대 수석 입학생과 의대 최고의 엘리트 부부의 손이 민우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에.
복학생의 선배의 눈꼬리가 떨리며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민우가 단숨에 잔을 비우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의 열감이 가슴팍까지 번졌다.
선배의 손아귀 힘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민우는 어깨를 가볍게 비틀어 그 압박에서 벗어났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선.배.님.”
***
포식자들의 눈빛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등 뒤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손을 흔들던 진수의 테이블로 이동해 자리했다.
"야, 왔냐? 앉아, 앉아."
진수는 민우가 오자마자 반색하며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반가워하는 목소리와 달리, 녀석의 표정은 뭔가 씹다 뱉은 껌처럼 떫어 보였다.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