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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화. 젊음의 샘, 공유되는 감각]


상식? 그딴 건 이미 개나 줘버렸다. 집 밖은 자유가 아니라, 규칙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덥치려는 짐승들만에 세계인 야생 그자체 정글이었다. "집에만 붙어 있으면 맛있는 밥도 해주고, 씻겨주고 다해주는데, 거기다 언제나 내편이잖아. 거기다 아름답고... 내말이면 다 들어주는데." '차라리 미녀들이 서비스해주는 우리집이 진정한 5성급 호텔인거지.' '내가 미쳤지. 아름다운 미녀의 젖냄새가 가득한 호텔을 놔두고 육중한 몸매에 아줌마들이 가득한 정글에서 노숙을 하려 하다니.' 정신을 차려보니, 민우는 어느새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재혁이 걸어 나왔다. 재혁은 담배를 피우며,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민우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어떠냐. 네가 도망간 곳은 천국이더냐?" 비웃음이 아니었다.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씁쓸한 동질감 같은게 느껴졌다. 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아니. 개고생만 했어. 아저씨, 나 배고파." "들어와라. 밥 먹고... 이제 진짜 '사는 법'을 배워야지." 재혁은 민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민우는 제 발로 감옥... 아니, 낙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혁이 손을 내밀었다. 민우는 그 손을 잡으려다, 문득 밖에서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 떠올라 물었다. "아저씨,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볼 게 있어." "음?" "이 마을... 뭔가 이상해. 아까 도망치면서 봤는데... 왜 여자는 전부 40대 이상은 안 보이는 거야? 그리고 난 왜 이걸 이제야 깨달은건지 모르겠어." 분명 말투는 아줌마인데 얼굴은 아가씨였던 기괴한 경험들. 재혁은 민우의 예리한 질문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재혁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새벽 공기 속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잠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가 흩어졌다. “좋은 질문이야.” 그는 민우의 어깨에 올린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이 삐걱 열리며 안쪽의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집 안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세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민우야? 왔니?” 재혁은 대답 대신 민우를 더 깊이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오직 민우만 들리게 속삭였다. “마을이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이제야 ‘보게’ 된 거다.” 민우의 발이 멈칫했다. 재혁은 그걸 느끼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21살이 되면서 네 눈이 열렸다. 그전엔 그냥 스치고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 선명하게 보이는 거지. 여자들 얼굴, 나이, 그 모든 게… 원래 그랬어. 네가 몰랐을 뿐.” 민우는 입을 벌렸다. 묘하게 어색했던의 편의점 아줌마, 요구르트 배달부, 청소부… 모두 외모는 기껏해야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였는데, 말투와 행동은 훨씬 나이 든 어른들이었다. “그럼… 왜…?” “왜냐고?” 재혁은 담배를 땅에 비벼 끄고, 민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장난기도, 동정도, 그리고 깊은 확신이 섞여 있었다. “네 소원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민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작은 신. 왜곡된 소원. 그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혁은 민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 들어가자. 배고프다며? 밥 먹고, 씻고, 쉬고…그 다음에, 천천히 다 알려줄게.” 현관문을 지나자, 세희가 앞치마를 두른 채 웃으며 나왔다. 뒤로는 서란과 다희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 있었다. “민우야, 빨리 왔네. 배고프지? 아줌마가 네 좋아하는 거 듬뿍 해놨어.” 다희가 호다닥 뛰어 달려왔다. “오빠! 나 기다렸어! 이제 같이 놀아줄꺼지!” 서란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 “도망은 잘 쳤냐? 나가보니 집이 최고지?” 민우는 그 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러나 이제는 그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재혁이 민우의 등을 밀며 속삭였다. “들어가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민우는 제 발로 집 안 깊숙이 들어갔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달칵. 이제 끝이다. 더이상 내겐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 "들어와서 씻어라. 거울을 보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재혁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짧은 가출 소동은 끝이 났다. 이제 민우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이 유쾌하고 미친 세계의 일원이 될 준비를 마친, 각성자였다. ***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민우는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온몸이 무거웠고,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이불 속 따뜻함과 익숙한 향기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며 눈부시게 눈꺼풀을 자극했다. 민우는 찌뿌둥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하루 만에 가출하고 돌아온 탓인지, 어깨와 허벅지가 뻐근하게 결려왔다. 침대에서 내려서자마자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차가움이 온몸을 깨웠다. 그는 습관처럼 욕실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아직 따뜻한 습기가 남아 있는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자, 단 하루 만의 가출이었는데도 퀭하고 피곤한 모습이 그대로 비쳐졌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 민우는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았다. 얼굴을 푹 숙여 세수하자, 찬물이 피부를 때리며 정신이 조금씩 들었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쩐지 낯설기까지 했다. 치익. 쉐이빙 폼을 손바닥에 짜내 턱에 바르며, 민우는 문득 어제 아저씨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왜 이 마을 여자들은 전부 40대 이상이 안 보이는 거야?'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21년을 살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을까? 어딘가 이상한 어른 스러운 말투를 쓰지만 피부는 팽팽한 여자들. 몸빼 바지를 입은 젊은 아줌마들. 분명 눈으로 보고 있었으면서도, 마치 뇌의 일부분이 마비된 것처럼 그 위화감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에 안개를 씌워놓았던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어제 아저씨가 명확히 이야기 해주자, 그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재혁이 들어왔다. "일어났냐? 어제는 푹 잤고?" 재혁은 상의를 탈의한 채 자연스럽게 민우 옆에 섰다. 4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탄탄한 등 근육이 습기 찬 거울에 비쳤다. 민우는 거울 속에서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다. "아저씨. 어제 내가 물어본 거... 좀 더 자세히 알려줘." "음?" "이 마을 여자들 말이야. 다들 미친 것처럼 젊잖아. 근데 난 왜 그걸... 21년 동안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치 어제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어." 민우의 질문에 재혁은 칫솔에 치약을 짜며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그동안은 네가 '보호'받고 있었으니까." "보호?" "애벌레가 고치 속에 있을 땐 바깥세상이 안 보이는 법이다. 네가 성인이 되고, '진짜 수컷'으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이 마을의 본모습이 네 눈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그게 작은신의 축복이야." 아저씨의 말에 민우의 머릿속에서 윙, 하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몰랐던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았던 거다. "나도 그랬다. 딱 네 나이 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희가, 그녀들이 갑자기 '여자'로 보이더구나. 징그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말이다." 재혁은 쉐이빙 폼을 자신의 턱에 바르며 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눈이 뜨인 거야. 축하한다, 민우야." 재혁은 면도기를 들었다. 민우도 무심코 면도기를 턱에 갖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사각- 사각-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은 타이밍. 나란히 선 두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45도 각도로 젖히고, 입을 '오' 모양으로 벌려 인중을 늘렸다. 면도날이 피부를 긁어내리는 박자, 중간에 면도기를 물에 헹구는 리듬, 심지어 턱 끝을 들어 올리며 짓는 미묘한 표정까지. 거울 속에는 마치 한 사람의 과거와 미래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데칼코마니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 민우는 묘한 기시감에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뿌연 안개가 걷히는 듯한, 찌릿한 현기증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처음 겪는 일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장면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왜 그러냐? 귀신이라도 본 얼굴인데." 재혁은 수건으로 턱을 닦으며 물었다. "아니... 방금 우리... 너무 똑같이 움직여서." "내가 너고, 네가 나인데, 당연하지. 민우야, 너는 나를 닮은 게 아니다. 너는 그냥 아직 나이가 들지 않은 나일 뿐이야. 몸짓 하나 틀릴 게 뭐가 있겠어." 아저씨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너고, 네가 나는... 뭐? 아저씨는 무슨 아침부터 개똥 철학이야?" "개똥 철학이 아니고, 현실이다. 이틀 전 세희를 안을 때... 너, 사정 직전에 감각이 너무 강해서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지?" 민우는 흠칫 놀랐다. 정확했다. 사정 직전, 몰아치는 쾌감의 소용돌이 그리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었다. 재혁은 민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네가 제어할 수 없어서, 나도 똑같이 그 감각을 공유받았기 때문이야. 네가 세희를 안을 때 느꼈던 그 쾌감, 고스란히 내 신경을 타고 흘러들어왔어. 그래서 네가… 두 배로 느꼈던 거지.” 그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내가 그녀들을 안을 때의 자극도, 원래는 너에게 흘러갈 수 있었어. 그런데 난 이제 고인물이잖아. 기억이 돌아온 이상, 내가 직접 전달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재혁은 민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하나의 감각’으로 이어져 있다는 거야. 네가 느끼는 건 나도 느끼고, 내가 느끼는 건… 네가 느낄 수 있다는 거지.” "......!" "고작 면도 따위나 같이 하는 게 닮은 게 아니다. 가장 뜨겁고, 가장 격렬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게 우리 둘의 '연결'이다." 아저씨의 단호한 말에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네가 궁금해하던 거, 그 답도 거기 있다. 네가 가진 그 '젊음'이, 이 마을 여자들을 그렇게 만든 거야." "내 젊음...?" "그래. 네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여자들을 늙지 않게 붙잡아두는 거다. 너는 그냥 대학생이 아니야. 이 마을의 '젊음의 샘' 그 자체다. 그러니 저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게 당연하지." 아저씨는 벙찐 민우를 뒤로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을 나갔다. 민우는 홀로 남겨진 욕실에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한참이나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방금 아저씨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쉐이빙 폼 냄새가, 자신의 턱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았다. 아저씨의 말에 나는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쳐박혔다. 문밖에서 서란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이번엔 내 차례잖아!”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는 장난기 섞인 투정이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끈적한 갈망이 느껴져서 더 무서웠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귀를 막았지만,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재혁 아저씨의 말로 가득 찼다. ‘젊음의 샘’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메아리쳤다. 내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마을 여자들을 젊게 만든다고? 그게… 작은 신의 왜곡된 축복이라고? 21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나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이 집, 이 마을, 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까지.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밖에서 서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조금 진정됐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도,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는 건가?’ 민우는 서서히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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