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176화 가서 일 봐
[용신 티아마르의 역린 팔찌(A) +20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더 이상 강화 할 수 없습니다.]
[용신 티아마르의 역린 팔찌(A) +20]
방어력 +420
불특정 기운 저항 +280
용신의 비늘(LV.3) — 치명타 피해 90% 감소
역린의 포효(LV.3) — 피격 시 90% 확률로 주변 적 기절
"끝이네."
마지막 장비의 강화가 끝났을 때, 손끝에서 빠져나간 열기가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얇은 잔광이 팔찌의 표면을 한 바퀴 감아 돌다 사라졌다.
강화대 위에 놓인 팔찌는 아까와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금속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빛을 먹은 듯 표면이 한 톤 짙어졌고, 역린 문양의 음각이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시은이 내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강화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칠흑 같은 눈에 안광이 도는 것은——내게만 보이는 것일 테지.
형광등 빛이 닿지 않는 각도인데도, 홍채 안쪽 어딘가에서 불씨 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시은이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 A등급 장비마저도 20강을 달성하다니."
목소리는 평소의 시은이었다.
낮고, 건조하고, 감정을 포장지 세 겹 안에 넣어두는 말투.
"믿겨지질 않아. 이거 현실이야?"
"크큭. 응."
"한 번도 실패 안 했어?"
"응."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실패 확률이 있으면 멈췄거든.'
시은은 잠시 말을 잃었다.
팔짱을 풀지도, 벽에서 등을 떼지도 않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의 흰 빛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후우——, 긴 숨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들이쉴 때보다 내쉴 때가 두 배는 길었다.
감정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의 호흡이었다.
이윽고 시은이 벽에서 등을 떼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짜 미쳤다."
그 말은 욕이 아니었다.
그 시은이 '미쳤다'를 꺼냈다는 건, 포장지 세 겹이 전부 찢어졌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시은이 한 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가슴이 진정이 안 돼. 내가 전장에서 만나본 플레이어 중에, 아니 소문으로 들어본 것까지 합쳐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시은답지 않게.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숨표가 사라지고 있었다.
"강화석 없이? 재료 없이? 그냥 손 갖다 대면 올라가는 거잖아."
시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끝음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놓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억누른다기보다는, 무너지는 댐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A등급 장비를 전부 고강까지. 그것도 실패 한 번 없이."
시은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강화가 끝난 팔찌를 들여다보며, 이번에는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남주야, 이건 강화가 아니라 기적이야. 아니, 기적이란 말도 부족해."
"필드에 있는 전투사제와 기도사제들."
공기가 무거워졌다.
시은의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긴장한 것이다.
전장 이야기가 나올 때 시은의 몸이 보이는 반응. 수십 번을 봐왔기에 나는 그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지원을 몰아 받는다 하더라도. A등급 장비 하나 10강 찍으려고 얼마를 쏟아붓는지 알아?"
시은이 손가락을 접어 세며 말했다.
"강화석만 수십 개. 실패하면 장비가 터지기도 해. 10강 넘어가면 아예 도전이 멈추는 건 태반이고."
손가락이 주먹이 됐다.
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걸 네가 한나절 만에 전부 끝냈어."
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흘렸다. 웃음인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경이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은 내 얼굴 위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페이트 콜이 너를 가리킨 게 당연했어."
잠시 말을 끊었다.
입술이 떨리는 것을 깨달은 듯,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너무 좋아. 나 지금 다리가 떨리는 거 같아."
그 말에 나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목을 긁적였다.
시은이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전장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도, 길드원이 쓰러졌을 때도, 이 사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음 수를 읽는 인간이었다.
그런 시은의 다리가 떨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과찬이야."
"과찬이 아니야. 사실이야."
시은의 눈빛이 다시 진지해졌다.
떨림이 걷히고, 그 자리에 단단한 것이 돌아왔다.
원래의 시은. 감정을 정리하고 포장지를 다시 여미는 데 걸린 시간은 3초가 채 되지 않았다.
"고마워, 남주야. 진심으로."
그 '진심으로'에 실린 무게가 가슴 어딘가를 눌렀다. 불편한 무게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보고 있다는 확인 같은 것.
자리를 뜨려 하자 시은이 내게 무어라 말하려다 입술을 오므렸다.
열린 입이 닫히고, 닫힌 입이 다시 열릴 듯 말 듯 머뭇거리는 그 간극.
시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A구역에서도 가장 말단. 벽에 가까운 선반 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던 아이템.
어떠한 조건에 의해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놈.
등급은 높되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일종의 사장(死藏)품.
"킥킥."
어찌나 그렇게 조심스러운 건지.
시원하게 말했으면 좋을 텐데.
시은이라는 사람은 목숨이 오가는 지시를 내릴 때는 1초의 망설임도 없으면서, 이런 순간에는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한다.
시은의 시선을 읽고 그 장비를 집어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먼지가 부유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오래된 금속의 냄새. 무게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어깨에 얹히는 형태의 견갑(肩甲)이었고, 표면에는 용신 티아마르의 인장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용신 티아마르의 인장이 새겨진 견갑(肩甲) +17]
방어력 +530
스킬저항 +320
하룡소환 — 임의의 하룡을 즉석에서 소환합니다. 다만 당신의 편은 아닐 것입니다.
용신계약 — 착용자의 생명이 지속적으로 크게 감소합니다.
'……이래서 아무도 안 건드린 거구나.'
소환한 하룡은 적이고, 끼고 있으면 생명이 깎인다.
등급은 A인데 실질적으로는 저주받은 장비.
장비를 내게 착용했다.
견갑이 왼쪽 어깨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쇄골을 타고 흘렀다.
무겁고, 낯설고, 이질적인——
그 순간이었다.
손등이 불탔다.
손등의 피부 아래에서 신살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창대(槍臺)의 형상을 이루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신살이 만든 창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리꽂혔다.
와작——!
견갑에 균열이 퍼졌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금속 표면 사이로 흰 빛이 새어나왔다.
강화에 실패했을 때 아이템이 터지는 것과 비슷한 빛이었다. 하지만 터지지 않았다.
부서졌다.
안에서부터 무너지듯, 견갑이 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어!"
나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시은도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눈을 크게 떴다. 뒷발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시은의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갔다가 멈췄다.
전장의 반사신경이 무의식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재가 된 견갑에서 흰 빛이 솟아올랐다.
차이점은 거기에 있었다.
보통 강화 실패로 터진 아이템은 재가 되어 흩어진다.
바닥에 떨어지고, 바람에 날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이 재는 흩어지지 않았다.
흰 빛을 머금은 잔해가 공중에서 멈추더니, 실처럼 가늘게 풀리기 시작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좁은 목을 통과하듯, 한 올 한 올이 빨려 들어갔다.
신살 쪽으로.
손등 위의 신살이 잔해를 흡수하고 있었다. 검붉은 표면 위로 흰 실이 감기고, 스며들고, 사라졌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손등에서 열이 올라왔다.
뜨겁다기보다는 포만감에 가까운 온기. 배부르게 먹은 뒤 뱃속에서 퍼지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열이었다.
마지막 잔해가 흡수되자 신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대의 형상을 풀고, 힘줄이 다시 꼬이고 감기며 손등 안으로 잠들었다.
식사를 만끽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아마도 다른 장비들도 이 꼴이 날꺼같아."
"내 생각도 그래."
"……이걸로 만족할게."
"응."
시은의 대답은 담백했다. 한 글자. 하지만 그 한 글자를 뱉기까지 0.5초의 공백이 있었다.
눈빛에는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신살이 장비를 먹어치운 장면은 그녀에게도 처음이었으리라.
시은의 시선이 내 손등 위를 훑고, 견갑이 있던 자리의 빈 공간을 훑고,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열 가지는 될 텐데, 시은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어느새 시은의 품엔 지유가 포옥 안겨선 '어떡해, 어떡해!'를 읊조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지유가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시은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고, 시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을 두드려주는 그림.
"거기! 여기로 이동해야 해!"
"이젠 등급으로 나누기보단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해!"
분주한 대화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강화실 바깥, 관리인원들의 목소리였다.
발자국 소리가 바닥을 두드리고, 패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그 사이에 섞였다.
아까 C구역에서 봤던 아수라장이 A구역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바쁘겠네?"
"응. 무척 바쁠 거야."
시은이 강화실 바깥의 소음을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나를 봤다.
"고마워 남주야. 이 정도 위력이 생긴다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충분히 읽혔다.
전장 안에서의 전세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계산이 끝난 사람의 확신. 시은은 이미 머릿속에서 강화된 장비의 배분표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장비를, 어느 전선에 우선 투입할 것인지. 그게 시은이라는 사람이었다.
관리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용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관리인의 대처는 현명했다.
내게 값을 부르는 어리석은 행위 따윈 하지 않았다. 견갑의 시장 가치가 얼마인지, 그 손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런 계산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아마 시은이 사전에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었다. '이분에게 묻지 마라'는 식으로. 혹은 '이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진행하라'는 식으로.
어느새 미레와 야니가 내 곁에 붙어서 길드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른 장비는 착용하지 못한다는 거야?'
내 마음을 읽은 듯 손등에 자리 잡은 신살이 웅웅 울렸다.
미세한 진동이 뼈를 타고 손목까지 전해졌다.
마치 '내가 있는데 뭘 더 걸치려고?'라는 투정 같기도 하고, '다른 건 필요 없어'라는 단언 같기도 했다. 그 진동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불쾌함이 아니라 자부심에 가까운.
'그래, 네가 그렇다면. 믿을게.'
신살은 짊어질 부담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번 빛을 뿜었다. 손등 위에서 번진 빛이 손가락 끝까지 퍼졌다가 사라졌다.
그 빛은 약속처럼 느껴졌다.
내가 속한 방으로 돌아가는 길목들은 역순이었다. A구역에서 B, C…….
무거운 강철문들이 하나씩 열리고 닫힐 때마다, 가스가 빠지는 쉬익 소리와 잠금장치의 딸깍거림이 번갈아 울렸다.
처음 들어올 때는 다음 구역에 대한 기대로 채워졌던 그 소리들이, 돌아가는 길에는 완료의 무게로 바뀌어 있었다.
지나온 길마다 모두가 패드를 손에 꽉 쥐곤 분주했다.
강화가 끝난 장비들의 옵션을 확인하고, 배분 목록을 정리하고, 출고 일정을 조율하느라 길드원들의 손놀림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이 아이템은 동부의 샤르미 기도사제님께……."
"이건 북부의 호광제 전투사제님이 찾으시던 것과……."
"맙소사. 미쳤어! 이 옵션을 봐봐! 공격할때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처음 들어올 때와 달랐다.
들어올 때는 '길드마스터님'이라는 경례였지만, 나갈 때는 경례 이상의 것이 실려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감사? 경외? 아니면 그 둘 사이 어딘가.
"아무도 빼돌리지 않았네요."
야니가 읊조렸다.
내 왼쪽에서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작은 마족은 분주한 관리인원들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간들은 욕심이 많은 존재로 알고 있었는데."
"왜?"
"전 루시퍼 군주님의 휘하에 속해 있을 때 인간들은 욕심을 부렸습니다."
복도로 이어지는 긴 통로였다.
야니의 말이 강판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발소리와 목소리가 뒤섞여 울리는 것이, 마치 동굴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가령 작은 동전 하나를 책상 위에 얹어놓곤 뭐든지 죽일 수 있는 저주를 원했죠."
동전 하나로 저주를.
인간의 욕심이라기보다는 무지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미레도 한몫 거들었다.
내 오른쪽에서 발맞추어 걸으며, 작은 입을 열었다.
"맞아. 누구든 복종할 수 있는 묘약을 달래. 그 댓가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캡슐커피였어."
"응? 그 뒤를 알아?"
"헤헤, 그 뒤는 모르겠어."
미레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강판 메아리 속에 부드럽게 섞였다.
군주실이나 집무실에서 메리언이 커피를 대령하던 걸 떠올렸다.
묵직한 원목 책상 위에 캡슐커피 머신이 놓여 있었고.
아마 그 캡슐 중 하나가 인간에게 건너간 모양이다.
교환 성사되었나 보다.
그 묘약을 얻은 자는 사랑을 얻었을까, 공허를 맞이했을까.
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캡슐커피 한 알의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것을 손에 넣었으리라는 짐작은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유가 버튼을 누르자 기다리라는 듯 숫자가 느릿느릿 내려왔다.
밀폐된 복도에 세 사람의 숨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관리인원들의 발소리만이 남았다.
야니가 벽에 등을 기대고 하품을 했다.
미레는 내 팔소매 끝을 살짝 잡고 서 있었다. 잡았다기보다는, 손가락 하나만 걸쳐놓은 것이었다.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의 조명이 복도보다 밝아서 눈이 잠시 찡그려졌다. 탑승하고 층수를 눌렀다.
문이 닫히며 밀폐된 공간에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았다.
지정된 층에서 내리자, 지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메시지 남겨주세요. 아니면 제가 여기 있을까요?"
"아냐, 가서 일 봐."
"감사합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 하지만 목소리가 한 톤 높았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서는 지유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할 일이 산더미인 사람의 속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