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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171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긴장이 풀리자 스몰토크가 시작됐다. ​ 젤라토가 만든 느슨한 공기 덕분이었을까. ​ 아니면 미레의 “같이 먹어야지”라는 한마디가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문 것일까. ​ 어느 쪽이든, 호위들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 “미스터 킴.” ​ 흉터가 눈 밑까지 이어진 지오반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젤라토 콘을 든 손이 어색하게 내려가 있었다. ​ “말해.” “저희도 나름 전장을 누볐습니다.” “그래?” “중립지대 남쪽에서 벌어진 콩구르마 사태, 아십니까?” ​ 알 리가. ​ 여신진영에 있던 것은 신입 때 잠깐뿐이었다. ​ 그 후로 쭉 마계에서 지내다 왔으니.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이름이 악몽처럼 회자되는지 알 턱이 없었다. ​ 고개를 저었다. ​ “아.” ​ 지오반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실수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 “실례했습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하는데 제가 이런 화두를…….” ​ 이자는 실례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 말을 꺼낸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괜찮아. 계속해봐.” ​ 지오반니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허락을 받은 안도감과, 다시 그 기억을 꺼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교차하는 눈빛이었다. ​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 “마귀 놈 하나가 있었습니다.” ​ 목소리가 낮아졌다. 젤라토를 들고 있던 손이 내려갔고, 녹아내리는 민트초코는 이미 잊힌 듯했다. ​ “이름이 콩구르마. 악신진영의 개새끼였죠.” ​ 그의 턱선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이를 악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것 같았다. ​ “그놈이 중립지대를 침범해서 방금 들어온 신입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다른 호위들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그들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황금 방패 길드가 투입됐죠.” ​ 마르코가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어받았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 “신입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 목소리가 갈라졌다. ​ “어리둥절한 채로 그대로…….” ​ 말끝이 흐려졌다.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침묵이,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 지오반니가 눈 밑 흉터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눈꺼풀 바로 아래에서 시작해 광대뼈를 타고 내려가는 긴 자국. ​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이거, 그때 생긴 겁니다.” ​ 담담하게 말하려 애쓰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놈의 발톱에 긁혔죠. 하마터면 눈알이 빠질 뻔했습니다.” ​ 그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한.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얇은 막 아래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깨닫는, 그런 빛. ​ “그날…….” ​ 지오반니가 숨을 한 번 삼켰다. ​ “열세 명을 잃었습니다.” ​ 짧은 침묵. ​ “열세 명.” ​ 두 번 말했다. 마치 그 숫자의 무게를 스스로에게 다시 새기듯. ​ 마르코가 고개를 숙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입술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막 들어온 애들이었어요.” ​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검도 제대로 못 뽑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 그들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분노. 죄책감. 무력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삼킨 뒤에도 남아 있는, 지울 수 없는 슬픔. ​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 로마의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고, 분수의 물소리는 여전히 청아했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 있는 이 작은 공간만큼은 전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 그 감정들을 느끼며 마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 칠대죄의 군주들과 싸웠던 때. ​ 놈들의 숨겨진 비수들은 나를 기어코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갔다. ​ 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순간, 피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순간, 시야가 흐려지며 '이게 끝인가' 싶었던 순간들. ​ 그리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던 그 순간들. ​ 그들의 전장과 나의 전장은 달랐다. ​ 하지만 그 안에서 느꼈을 공포와 분노, 상실감은 같았을 것이다. ​ 죽음의 냄새도, 동료를 잃는 고통도, 살아남은 자의 무게도. ​ “살아 돌아온 게 대단하네.” ​ 진심으로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 “운이 좋았습니다.” ​ 지오반니가 낮게 대답했다. 마르코가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운이 아닙니다.” ​ 그가 지오반니를 바라봤다. 존경과 전우애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지오반니가 놈의 주의를 끌어준 덕에 후방에서 반격을 완성할 수 있었죠. 그게 아니었으면 우리 전부 거기서 끝났습니다.” ​ 지오반니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영웅담이 아니라 트라우마였으니까. ​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것뿐이었으니까. ​ “동쪽 협곡 전투는 아십니까?” ​ 다른 길드원이 물었다. 루카라고 했다. 딸기 젤라토를 먹다 코에 크림을 묻혔던 그 사내. ​ 그들이 내뱉는 질문들은 마치 여신진영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역사의 큰 사건들을 문답하듯 취급했다. ​ 그들이 내뱉는 질문들은 마치 여신진영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역사의 큰 사건들을 문답하듯 취급했다. ​ ‘당연히 아시겠지만’이라는 전제가 깔린 어조. ​ 이쪽 세계의 상식처럼. ​ 허나, 난 역사 수업 자체를 들은 적이 없으니. 침묵으로 일관하자 루카가 말을 이어나갔다. ​ 모른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어차피 말하고 싶었던 건지. ​ “역시 지옥이었습니다.” ​ 루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방금 전의 익살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 “마귀 놈들이 떼로 몰려왔죠. 이틀 밤낮을 싸웠습니다. 물도, 음식도 없이.” ​ 이틀. 사십팔 시간. 말로 하면 짧지만, 전장에서의 이틀은 영겁과 같다. ​ 화상 자국이 팔뚝 전체를 덮고 있었다. ​ 피부가 녹아 울퉁불퉁하게 굳어 있었다. ​ 마치 촛농이 굳은 것처럼. ​ 원래의 피부색은 찾아볼 수 없었고, 붉은색과 흰색이 뒤엉킨 흉측한 무늬만이 남아 있었다. ​ “놈들의 화염 마법에 당했습니다.” ​ 루카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담담함이 아니었다. ​ “살이 녹는 줄 알았죠. 냄새가……” ​ 말이 끊겼다. 목젖이 오르내렸다. ​ “내 살이 타는 냄새가…….” ​ 루카가 말을 멈췄다. 잠시 눈을 감고 악몽을 떨쳐내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 “하지만 버텼습니다. 버텨야 했으니까.” ​ 주먹이 꽉 쥐어졌다. ​ “뒤에 후방 기지가 있었거든요. 부상자들이 치료받고 있었고.” ​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마계에서 그랬다. 죽을 것 같았던 순간에도 버텼다. 버텨야 했으니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 전장은 달랐지만,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같았다. ​ 마지막 코스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깊은 심념에 빠졌다. ​ 창문 너머로 로마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 오렌지빛 가로등, 멀리 보이는 성당의 실루엣, 간간이 들리는 스쿠터 소리. ​ 평화로운 밤이었다. ​ 하지만 마음은 어딘가 복잡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 내가 사는 지역만이 사람이 사는 지역인 것처럼 살았던 어렸을 적. ​ 보육원에선 이따금 단체버스를 타고 타지로 놀러 나갔었다. ​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낯선 풍경을 바라보던 기억.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작은 마을들, 논밭 사이의 집들,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 그때마다 느꼈다. ​ 이런 곳에도 사람이 있었구나. 살고 있구나. ​ 세상은 넓다고 느꼈다. ​ 생각하지 못한 어디라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 내가 밥을 먹을 때 누군가도 밥을 먹고, 내가 잠들 때 누군가는 깨어나고, 내가 울 때 누군가는 웃고 있다는 것. ​ 그 단순한 사실이 어린 마음에 묘한 경외감을 주었다. ​ 오늘 호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 내가 마계에서 싸우는 동안, 이쪽에서도 누군가는 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 콩구르마. 동쪽 협곡. 내가 모르는 전장에서, 내가 모르는 이름들이 목숨을 걸고 있었다. ​ 내 팔을 베개 삼아 다리를 꼬아 발을 휘적거리고 있는 미레를 쳐다봤다. ​ 그녀의 발가락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여유로운 모습. ​ 낮에 젤라토를 먹을 때의 행복한 표정이 떠올랐다. ​ “미레는 그런 기분 알아?” “응?” ​ 미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 “어떤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곳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는거.” ​ 몸을 휙 뒤집은 미레가 순식간에 나의 양 볼을 꾹 눌렀다. ​ 양쪽 볼살이 안으로 모이며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 “킥킥. 말해봐.” “그르느끄.” ​ 문어 같은 주둥이가 되어버린 내 얼굴. 미레가 만족했는지 킥킥거리며 손을 놓아주었다. 볼을 문지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동안에도 마계에선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겠지?” “응. 그럴꺼야.” ​ 미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 “하지만 정확히 뭔진 모르잖아.” “그치?” “어려워. 머리가 복잡해.” ​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호텔 천장의 미세한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 “헤헷.” ​ 미레가 부드럽게 웃었다. ​ “낮에 했던 대화때문이지?” “맞아.” “물론 남주 네가 강한 건 알지.” ​ 미레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로마의 밤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 “하지만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영향을 끼칠 순 없어.” “…….” “그 사람들이 다친걸 보고 알았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었겠지?” ​ 정확했다. ​ “맞아.”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모든 상황들을 실시간으로 알 방법도 생각했겠지?” “응, 정확해.” ​ 어떻게 아는 걸까. ​ 내가 그렇게 읽기 쉬운 건지, 미레가 그만큼 나를 잘 아는 건지. 그 순간 가벼운 손날이 이마를 툭 밀어쳐냈다. ​ “혼자 모든 걸 짊으려 하지마.” “혼자.” ​ 그 단어가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 “그래.” ​ 미레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단했다. ​ “아스모데우스님의 성에 관해서 유지, 관리하는 일은 나도 알지만 홀로 할 순 없어. 그러니 다같이 하는거고. 우리들에게 명을 내려주실 시녀장님도 있으신거야.” “그럼?” “나눠서 해야지.” ​ 미레가 빙긋 웃었다. ​ “문명의 시작은 집단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 의외의 말이었다. 젤라토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모습만 보다가, 이런 통찰을 듣게 될 줄이야. ​ 아니, 어쩌면 그게 미레였다. ​ 순수함과 지혜가 공존하는. ​ 전사의 날카로움과 소녀의 순진함이 함께 사는. ​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 밤하늘. 로마의 별이 빛났다. ​ 이 별빛 아래, 누군가는 잠들고 누군가는 깨어 있겠지.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겠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겠지. ​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옆에 있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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