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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160화 야니가 물끄러미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어정쩡한 자세였다.


모든 방이 눈앞에 펼쳐진 작은 무대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 창문으로 흐르는 빛의 각도마다 색이 달랐고, 나무 바닥의 결 따라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 어느 방은 따뜻한 주황빛을 머금은 채 아늑하게 손짓했고, 또 어느 방은 차분한 푸른 기운으로 고요함을 약속했다. ​ 가구 하나하나의 배치와 창틀에 맺힌 먼지까지, 그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 나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 “어디서 잘까?” “물어볼게있어? 당연히 네 옆이지. 거기서 잘껀데.” ​ 시은이 어깨를 들썩이며 “달달하네.” 라고 속삭이며 웃음을 참았다. 샌은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킥킥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쳐다보자 둘 다 휙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그림이 그렇게 재밌나. ​ 시은과 샌이 이쪽을 돌아보다 나의 눈을 피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 “당연하지. 방을 골라.” “헤헤.” ​ 그러더니 내게 더 밀착해 왔다. 노골적으로 그 아담한 가슴을 팔에 비벼댔다. 몰캉몰캉한 그 느낌이 팔을 입구삼아 전신으로 간지러움을 전파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 “마계에선 항상 같이 잤잖아.” ​ 미레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으아! ​ 마계에서 했던 일들이 현세에서 속속히 노출되니 부끄러웠다. ​ 나 아직 역시 인간 맞나봐! ​ “그, 그건……!”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 샌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시은이 “마계에서 이미….” 읊조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 “항상?” ​ 시은이 물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 “같이?” ​ 샌이 거들었다. 눈이 초승달이 됐다. ​ “아, 그게……네.” ​ 나는 헛기침을 했다. ​ ‘하으.’ ​ 내가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을 고르자 미레는 맞은편 방을 골랐다. ​ “응?” 어째서 저 방을 골랐냐는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미레가 내게 윙크로 화답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하고 싶은거 하라는 듯! ​ 나는 할 말을 찾다가, 로마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 “응?” ​ 미레의 두 눈이 반짝였다. ​ “그런 말이 있어.” “딛고있는 땅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거지?” “맞아. 미레는 내게 나의 규율을 따르는….” “킥킥, 알겠어. 칠대죄의 영지들도 그랬어.” ​ 아, 이 세심한 배려까지…! ​ “이건 어떡할까?” ​ 미레의 손이 목줄을 당기자 야니가 한 발짝 앞을 디뎠다. 철컥. 족쇄가 소리를 냈다. ​ “저 애벌레랑 같이 사슬에 묶어놓을까?” 미레가 장미연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장미연의 눈이 흠칫 움직였다. 좋은 생각이었지만, 야니와 내 사이에 풀어야 할 것이 있었다. ​ “아니, 내 방에 데려갈꺼야.” “그래, 알겠어.” ​ 의문을 제기하면 이유를 말하려 했지만 미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 “푸웁ㅡ.” ​ 이번엔 시은이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했다. 샌이 시은의 등을 토닥이며 킥킥거렸다. ​ 그 눈빛은 '네 여자친구 화끈하게 허락하네?'를 담고 있었다. ​ 각자 머물 방이 정해지자 시은이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 나는 그 배려를 이해했지만, 마계에서 지내보지 않은 시은과 샌에겐 너무 화끈하게 보였나 보다. ​ “한 시간 뒤에 거실에서 다시 모이자.” ​ 시은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샌도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미레가 내 쪽을 한 번 돌아보더니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야니를 끌고 내 방으로 들어와선 문을 닫았다. ​ “왜 말을 안하고 있어?” “……죄스럽고,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 야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푹신한 침대에 앉으며 쭈뼛쭈뼛 서 있는 야니를 응시했다. 거대한 체구가 어딘가 작아 보였다. ​ “누구에게?” “저희 어금니 부족에게 너무 죄스럽습니다.” ​ 야니가 고개를 더 숙였다.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 “지금쯤이면 마왕성에서 진격한 부대들과 전투를 하고 있겠죠?” ​ 기어코 야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맺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 “강인하게, 지지않으면서, 고민보단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죠.” ​ 야니가 손바닥을 펴 내려다봤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굳은살투성이의 손이었다. ​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으니까요.” ​ 그때를 기억하는 듯 안광이 번쩍였다. 잠시 동안 눈동자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 “야생마물은 놔두면 자기들끼리 합쳐져 커지고 강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미약할때 자주 죽여놔야하죠.” ​ 야니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 “영지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토벌전은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 야생마물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야니의 말투에서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느껴졌다. ​ “그것들의 심장속에서 마정석을 뽑아 바칠땐 그만한 영광이 없었습니다.” ​ 야니의 눈이 잠시 빛났다. 자부심이었다. ​ “그럴수록, 저의 주군이셨던 루시퍼는 저희 부족을 보살펴주셨죠. 그것이 조건이었습니다.” ​ 철그럭, 철그럭. ​ 목줄이 야니의 전신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에 반응했다. 붉은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야니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후회인지. 아마 전부였을 거다. ​ “기꺼이 군단장의 자리를 받았습니다. 하위 장교들을 통솔하며 병사들을 육성했었습니다. 병법과 진법을 가르쳤고.” ​ 야니가 잠시 말을 멈추며 눈을 감았다. ​ “결국은 제 부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만.”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길어졌었네요.” ​ 야니가 고개를 더 숙였다. ​ “어금니부족 엄벌건은 내가 없던 일로 만들었어.” ​ 순간 야니의 희미한 숨마저 멈췄다. 공기가 같이 동조한 듯, 공간이 멈춘 착각을 들게 했다. ​ “저…정말로.” ​ 야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그래. 흉악범에 내려질 사형 역시.” “하, 하윽.” ​ 야니의 붉은 눈시울에서 기어코 눈물이 태어나 아래로 떨어졌다. ​ 툭, 툭. ​ 카펫 위에 작은 얼룩이 번졌다. 야니의 거대한 어깨가 들썩였다. ​ “끄윽, 끅.” ​ 이를 악물어도 새어나오는 울음이었다. 주먹이 허벅지를 쿵쿵 내리쳤다. ​ “대신 넌 네 평생을 다해 내게 헌신해.” “왜? 어째서?” ​ 야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 “저는 당신에게 있어 천철부심의 원수이지 않습니까?” ​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 ​ 하지만 그것은 개미가 신을 이해하려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까, 베푸는 거다. ​ 어금니 부족에서 보았던 오크 아이들. 그들 역시 전쟁의 화마에 휩쓸려 씁쓸한 인생을 지내지 않아도 된다. ​ 내가 그렇게 해줄수 있다. 오직 나만이. ​ 그렇기에 했다. ​ “맞아. 네가 아스의 즉위식에서 좌표를 찍어보내 죽이려했잖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야니가 고개를 떨궜다. ​ “그때 왜 내게 살고싶다고 말한거야?” “루시퍼님이 말하시던 엿 같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뭐?”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놈과 야니사이에 있던 일 일까. ​ “이곳이 루시퍼님이 원래 계시던 곳이겠죠.” ​ 야니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왜 그렇게 생각한거지?” “루시퍼님이 꾸며놓은 영지에도 이런 종이 있었습니다.” ​ 루시퍼의 영지에 들어갔을때, 이런 분위기였다. 마침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왔다. ​ “생전 살던곳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셨다며 고개를 주억거리셨습니다.” ​ 야니의 눈이 멀리를 향했다. 기억을 더듬는 눈빛이었다. ​ “이곳은……그분이 말하시던 곳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을 빛은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찬란하다고 했습니다.” ​ 창밖의 하늘이 정확히 그 색이었다. 주황과 노랑이 뒤섞여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그걸 토대로 추측한건가. ​ 루시퍼를 치러가기전, 최대한 긁어 모은 정보를 브리핑받았었지. ​ 레이더에게 들었던 루시퍼의 정체는 ‘루짓트 요한’. ​ 이름에서부터 세례명이 있는데 당연히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 루시퍼, 아니 요한은 원래 이탈리아에서 살던 사람이었던걸까. ​ 우연의 일치인지, 필연인지. 하필 이곳이 로마라니. ​ “제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곳은 약한자와 강한자로 구분하지 않는다고.” ​ 야니가 편하게 말하게 내버려뒀다. ​ “그곳은 일방적인 무력으로 왈가왈부하는 시기는 예전에 지났다고 했습니다.” ​ 야니의 눈이 먼 곳을 향했다. 루시퍼의 말을 떠올리는 듯했다. ​ “입과 글씨로, 펜과 서류로 서로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채.” ​ 야니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 요한이 이루려던것. 기어코 천계와의 계약에서 얻어서 하려던 것은. 뭐였을까. 어쩌면 압도적인 무력으로 철인군주제를 만들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 “이 세계가 엿같은 부분도 있지만, 좋은 부분이 더 많아.” ​ 야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 “그러니 씻기나 하자.” “……네?”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되는거지 뭐.” ​ 야니의 눈이 커졌다. 자비의 개념이 낯설었던 걸까. ​ “내가 널 죽이나 안죽이나 기분은 변함없을꺼야. 물론 그때 받은 상처를 치료할때 머리가 복잡했지만.” ​ 어깨를 으쓱했다. ​ “대신 나는 자비로 너를 벌주는거야. 내게 종사하면서 순순히 벌을 받고 은혜를 갚으려고 해봐.” ​ 내 말을 듣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하더니 야니는 씨익 웃었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지만, 미소는 맑았다. ​ “감사합니다.” ​ 야니가 무릎을 꿇었다. 쿵. 바닥이 울렸다. ​ “제 부족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까지.” ​ 목소리가 떨렸다. ​ “용서받지 못할꺼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숨을 내어줄 때를 항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야니의 고개가 바닥까지 숙여졌다. ​ “거기도 엿같은 세상이었으니까.” ​ 나는 야니의 어깨를 툭 쳤다. ​ “이제 씻자. 씻고 나오면 거실에서 모이기로한 시간이 딱 되겠는데?” “아! 네.” ​ 야니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덩치가 큰 탓에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방 안이 좁아진 느낌이었다. ​ 괜시리 광년하나에게 물려서 오랜만에 입은 깔끔한 정장이 먼지로 더럽혀졌다. 더군다나 튀거나 쏘아진 조수나 땀이 몸에 묻고 말았다. ​ 배치된 옷걸이에 내 정장을 걸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 때쯤 야니가 등 뒤에 달라붙으며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 따뜻한 손이었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 허락의 침묵을 가지자, 야니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손끝이 가슴팍을 스칠 때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 그리고 허리춤의 벨트와 바지가 '사르륵' 소리를 내고 바닥에 떨어지자, 그것을 주워 옷걸이에 걸었다. ​ 각을 잡아 쫙 펴는 게 예사 손놀림이 아니었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게 정돈됐다. ​ “오.” ​ 나의 짧은 감탄사에 야니가 얼굴을 붉혔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 “군에 오래 있다보면 습관이 된답니다.” ​ 야니가 머쓱하게 웃었다. ​ 옷에서부터 각을 잡는 것조차 통제 수단이자, 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요소 중 하나이듯. ​ 내 압도적인 무력과는 별개로 다른 면에선 야니에게 배울 것이 있어 보였다. ​ “그때 아스모데우스의 영지안에서 만났을땐 다 벗고있었잖아?” “아… 다른땐 입고 다닙니다.” ​ 내 개인적인 궁금증에 야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 “아까 작은 주인님께 하셨던 말 기억합니다. 딛고 있는 땅의 규율을 따르라는 말씀.” “응.” “색욕의 영지에선 그것이 규칙입니다. 옷을 입고 다니면 벗으라 권유를 받죠.” ​ 야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 “거절엔 당연히 결투로 이어집니다.” “그럼 결투에서 진거야?” “크큽. 아닙니다. 저는 벗으러 간겁니다. 인큐버스 창가에 가던 중이었죠.” ​ 아. 그런 거였구나. 그때 나는 가운을 입고있었고 미레 역시 아스모데우스의 표식이 자수된 로브를 입고있었는데. ​ 오히려 우리가 눈에 띄었겠군. ​ 샤워부스로 발걸음을 옮기자 야니가 물끄러미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어정쩡한 자세였다. “모해? 어서 벗고 들어와.” “아ㅡ! 네.” ​ 서둘러 옷을 벗은 야니는 자신의 옷을 옷걸이에 걸곤 행거에 내 옷과 같이 배치했다. 역시나 각이 반듯하게 잡혀 있었다. ​ 하지만 목에 찬 개목걸이는 남겨뒀다. 덕분에 사슬은 마치 액세서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왔다. 묘하게 어울렸다. 샤워부스는 넓었다. 혼자 쓰기엔 과할 정도로. 허나 2미터에 달하는 체구의 야니와 같이 들어오자 팔을 쭉 필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이 되었다. 야니의 어깨가 벽에 닿았다. ​ 가슴이 내 등에 스쳤다. ​ “실례하겠습니다.” ​ 야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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