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거절의 대가
1. 더러운 오해
조용한 이자카야의 구석 자리.
칸막이가 높게 쳐진 룸 형태의 공간은 외부와 단절된 채 두 사람만의 기묘한 기류를 가두고 있었다.
술병이 세 병째 비워졌을 때, 박 차장의 얼굴은 이미 붉은 기가 완연했다.
그는 혀 꼬인 소리로 "보윤아, 보윤아"를 연발하며 다가왔다.
"보윤아, 오빠가 진짜 너 아끼는 거 알지? 너 보면 우리 막내 여동생 같아서 그래. 객지 나와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는 '여동생'이라는 단어를 면죄부처럼 내세우며 보윤의 바로 옆자리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윤의 허벅지 위에 두툼한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격려하는 듯 무릎 근처를 툭툭 치던 손이, 술잔을 거듭 비울 때마다 조금씩, 아주 은밀하고 집요하게 위로 기어 올라왔다.
끈적한 열기가 스커트 천을 뚫고 피부로 스며들었다.
손가락 끝이 허벅지 안쪽 민감한 살결을 건드리려는 찰나, 보윤의 뇌리에 해주와 지은의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벼락처럼 스쳤다.
'가축', '변기'라던 그들의 목소리와 과거 백윤겸이 휘두르던 손길의 감촉이 오버랩되었다. 본능적인 거부 반응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탁!
보윤은 자신도 모르게 박 차장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반동으로 소주잔이 쓰러져 액체가 테이블 위로 번졌다.
보윤은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차장님... 이건,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가게 안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수면 아래로 잠긴 듯 아득해졌다.
박 차장은 공중에 멈춘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윤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인자한 상사'의 가면이 조각나 떨어지고, 그 틈으로 비릿한 경멸과 날카로운 살기가 차올랐다.
"허... 성보윤 씨."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기가 차다는 듯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 지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성추행범 취급하는 거야,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차장님 손이 너무... 깊게 들어오셔서..."
"야!"
그가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내가 너 여자로 보고 만진 것 같아? 내 나이가 몇인데 너 같은 애를 건드려? 내 딸 같고 동생 같아서, 혼자 힘들어하길래 마음 좀 써준 거잖아! 그걸 그렇게 더럽고 천박하게 받아들여?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길래 상사의 격려를 이따위로 오해해?"
그는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당당한 기세에 보윤은 순식간에 '순수한 호의를 음란하게 왜곡한 예민하고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사람 호의를 이런 식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내가 어제 본부장님 앞에서 네 실수 덮어주느라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는지 알아? 와, 진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네 수준이 딱 거기까지인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긴장해서 과민반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윤은 바닥까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하지만 박 차장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차갑게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됐어. 기분 잡쳤다. 가. 내일부터 네가 알아서 살아남아 봐."
그는 계산서도 보지 않은 채 룸을 나갔다.
보윤은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덜덜 떨며 서 있었다.
엎질러진 소주가 스커트 자락을 적셨다.
실수했다.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보윤은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동아줄을 제 손으로 잘라버린 것이었다.
2. 얼어붙은 사무실
다음 날 아침.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무거웠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어제와는 판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보윤이 팀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지만, 박 차장은 모니터만 응시한 채 보윤의 인사를 철저히 씹었다.
평소 같으면 "성 주임 왔어?"라며 받아주던 팀원들도 박 차장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돌렸다.
완벽한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오전 10시.
박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보윤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팔이 저릴 정도로 두꺼운 서류 뭉치 세 더미를 보윤의 책상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던졌다.
주변 직원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성 주임. 이거 우리 팀 지난 5년 치 매출 원장이야. 엑셀 지표 보지 말고 영수증 원본이랑 일일이 대조해서 오류 있는지 전수 조사해.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안 돼."
"네...? 5년 치를요? 이걸... 이걸 혼자서 오늘 안에 다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왜? 못해? 본인 능력 있다며. 어제 보니까 기초 지표도 못 읽어서 팀 전체 망신 주더니, 기본부터 다시 다져야지. 오늘 퇴근 전까지 내 책상 위에 정리해서 올려놔. 못 끝내면 끝낼 때까지 집에 갈 생각하지 말고."
그의 목소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냉혹했다.
어제 술자리에서의 '오빠'는 흔적조차 없었다.
공개적인 괴롭힘이었지만, 명분은 '기초 교육'이었다.
김 대리를 비롯한 동료들은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박 차장의 권력 아래에서 보윤은 이미 버려진 패였다.
3. 공개 처형
점심시간도 포기한 채 보윤은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혔다.
눈이 빠질 것 같고 손목은 비명을 질렀다 눈 주변에 피가 몰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밥 대신 마신 믹스커피가 위장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양이 너무 방대했다.
5년 치의 종이 더미를 혼자서 대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후 4시.
박 차장이 커피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성 주임, 다 됐나? 진행률 보고해 봐."
"죄송합니다... 양이 너무 많아서 아직 2년 치밖에 못 했습니다..."
"하, 진짜."
박 차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사무실 전체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꾸짖었다.
"성보윤 씨! 일처리가 왜 이 모양이야? 너 대기업 어떻게 들어왔어? 뒷구멍으로 들어왔어, 아니면 얼굴 믿고 들어왔어? 이 정도 산수도 못 하면서 무슨 월급을 받겠다고 앉아 있어!"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보윤의 카디건 속에 움츠러든 가슴과 떨리는 어깨에 꽂혔다.
박 차장은 보윤의 의자를 구두 앞코로 툭 찼다.
"내가 어제 네 실수 한 번 덮어주니까 세상이 우스워 보여? 상사가 기회를 주면 감사한 줄 알고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야 할 거 아니야. 태도가 왜 이렇게 글러 먹었어?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우리 팀 실적이 깎이는 거야,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보윤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알고 있었다.
이건 업무 지시가 아니다.
보복이었다.
어제 그 술자리에서 그가 원했던 '상납'을 거부한 대가.
'그때 그냥 가만히 있을걸. 잠깐 주무르게 놔둘걸. 그랬으면 지금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내가 뭐라고, 대단한 정조를 지키겠다고...'
비참하게도 보윤의 머릿속에는 자존감을 지킨 자부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아래서 보윤은 갈려 나가고 있었다.
4. 굴복의 전조
저녁 9시.
사무실 불이 반쯤 꺼졌다.
모두가 퇴근하고 정적만이 감도는 가운데, 보윤은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 끝은 종이에 베여 피가 맺혔고, 눈은 충혈되어 앞이 흐릿했다.
띠링.
정적을 깨고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퇴근한 줄 알았던 박 차장이었다.
[박민석 차장]: 성 주임, 아직 사무실이지? 많이 힘들지? 나도 이렇게까지 모질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네가 어제 나를 너무 실망시키고 오해해서 오기가 생기더라고.
병 주고 약 주기.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패턴이었다.
그는 보윤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여 놓고는 다시 가느다란 구원의 밧줄을 던지고 있었다.
[박민석 차장]: 지금이라도 와서 제대로 사과하면, 내가 이 서류들 다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어. 나 회사 근처 '블루 바'에 혼자 있어. 생각 있으면 와. 10시까지만 기다릴게.
그것은 마지막 기회이자 최후의 통첩이었다.
지금 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면 다시 '방패'를 얻을 수 있다는 제안.
하지만 그곳에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제 뿌리쳤던 그 손길을, 이번에는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는 것을.
보윤은 모니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지은이에게 버림받고, 해주에게 농락당하고, 이제는 회사에서도 매장당하기 직전인 여자.
'여기서 쫓겨나면 난 어디로 가지? 다시 그 곰팡이 핀 자취방으로 돌아가서 술집이라도 나가야 하나? 지은이 말대로 난 가축인데... 고기일 뿐인데...'
7살 때, 사소한 잘못으로 현관문 밖으로 쫓겨나 밤새 떨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버림받는다는 공포는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
굶어 죽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비참한 역설.
보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퀭한 눈가에 분을 칠했다.
그리고 목 끝까지 꽉 채워져 답답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하나 풀었다.
그녀는 스스로 도살장의 문을 열고 있었다.
빗장은 이미 풀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