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닫힌 문, 열린 마음
1. 코디네이터
토요일 오전 11시.
약속 시간까지는 2시간이 남았지만, 보윤은 이미 화장대 앞에 앉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옷장에는 지은이 골라준 옷들이 가득했지만, 막상 입으려니 하나같이 부담스러웠다.
'해주 씨는 이런 스타일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보윤은 결국 지은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잠이 덜 깬 지은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
"어~ 언니! 웬일이야 아침부터? 얼굴이 왜 이렇게 폈어?"
화면 속 지은은 팩을 붙인 채 나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보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은아, 나... 사실 오늘 데이트해."
"헐! 대박! 진짜? 누구랑? 설마 그 기해주 연구원?"
지은이 팩이 떨어질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으응... 어제 밤에 연락이 와서... 오늘 점심 먹기로 했어."
"꺄악! 미쳤다, 미쳤어! 내가 뭐랬어! 그 남자가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맞다니까? 와, 우리 언니 능력쟁이네! 연구소 아이돌을 꼬시고!"
지은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보윤은 그 반응에 안도하며 수줍게 웃었다.
역시 말하길 잘했다. 지은이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었다.
"야, 근데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 몇 시야? 11시에 나간다며. 화장은? 옷은 정했어?"
화면 속 보윤은 쇄골 아래까지 깊게 파인 스퀘어 넥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재질이라 가슴의 거대한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넥 라인 사이로 가슴골의 시작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보여 아찔했다.
"이거? 근데 지은아... 이거 가슴이 좀 많이 파인 것 같은데. 낮에 입기엔 좀 야하지 않을까? 인사할 때 다 보일 것 같아. 그냥 블라우스 입으면 안 될까?"
화면 너머의 지은이 혀를 찼다.
"아, 언니. 제발. 고구마 백 개 먹은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말했잖아. 언니처럼 가슴 큰 체형은 목까지 가리면 답답해 보이고 진짜 곰 같아 보인다고. 뚱뚱해 보이는 게 좋아, 아니면 좀 시원하게 드러내고 세련돼 보이는 게 좋아?"
"그건 그렇지만... 해주 씨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남자는 다 똑같아. 앞에서 점잖은 척, 매너남인 척해도 시선은 다 거기로 꽂히게 돼 있어. 그게 본능이야. 그리고 그게 언니 최고의 무기라니까? 왜 자꾸 장점을 감추려고 해?"
지은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보윤은 거울을 다시 보았다.
'그래... 지은이 말이 맞아. 가리면 뚱뚱해 보여. 이게 세련된 거야.'
지은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목표는 해주 씨 정신 못 차리게 하기! 알았지? 내 말 들어. 남자들은 청순한 척하는 여자보다, 대놓고 섹시한 여자한테 결국 넘어오게 되어 있어. 그 옷 입고 나가서 게임 끝내고 와."
지은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보윤은 거울을 다시 보았다.
'그래... 지은이는 연애도 많이 해봤고 센스도 좋으니까. 지은이 말이 맞겠지.'
"알았어... 네 말대로 입을게. 고마워, 지은아."
"그래! 후기 꼭 들려줘! 파이팅!"
전화를 끊고, 보윤은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른 채 지은이 골라준 원피스를 입었다.
하지만 현관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걸을 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출렁이는 게 느껴져, 자꾸만 손으로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2. 가디건
오후 1시.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앞.
해주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네이비색 니트 조끼를 레이어드 해 입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팔에는 깔끔한 메탈 시계가 반짝였다.
댄디함의 정석이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보윤을 발견하자 해주의 눈이 커졌다.
보윤은 움츠러든 어깨를 억지로 펴며 다가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해주 씨. 많이 기다리셨죠?"
보윤이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그 순간, 중력의 법칙에 따라 깊게 파인 넥 라인 사이로 거대한 가슴골이 쏟아질 듯 쏠렸다.
하얀 살결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보윤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폈다.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봤겠지? 빤히 봤겠지? 첫 만남부터 가슴이나 들이대는 쉬운 여자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지은이는 이게 무기라고 했지만, 막상 해주 앞에서는 수치심이 앞섰다.
해주의 시선이 경멸로 바뀔까 봐, 혹은 음흉하게 바뀔까 봐 두려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주의 반응은 보윤의 비관적인 예상을, 그리고 지은의 확신을 완전히 빗나갔다.
"보윤 씨, 잠깐만요."
해주는 시선을 보윤의 가슴이 아닌 먼 허공으로 돌리며, 입고 있던 니트 가디건을 벗기 시작했다.
"네? 왜..."
"오늘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하네요. 바람이 좀 차요."
"네? 아, 별로 안 추운데... 저 괜찮아요."
보윤은 당황했다. 초여름 날씨라 춥기는커녕 살짝 더울 정도였다.
오히려 긴장해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니에요. 실내는 에어컨 때문에 추울 수도 있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이거 걸치세요."
해주는 자신의 넉넉한 가디건을 보윤의 어깨에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따뜻한 체온과 함께 그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해주는 보윤의 피부에 자신의 손끝이 닿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로 가디건의 단추를 잠가주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딱 가슴골이 보이지 않을 위치, 쇄골 바로 아래까지만 단추를 잠갔다.
"이제 좀 따뜻해 보이네요. 훨씬 낫다. 가시죠."
해주는 싱긋 웃으며 앞장섰다.
보윤은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덮은 해주의 짙은 네이비색 가디건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가슴의 굴곡이 가려지고, 단정한 실루엣만 남았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보윤의 옷을 벗기려 했다.
단추를 풀고, 가슴을 더 내놓으라고, 더 보여달라고 강요했다.
가슴이 큰 게 네 유일한 가치라고 세뇌했다.
지은이조차도 "드러내야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가려주었다. 남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으로부터, 그리고 보윤 자신의 수치심으로부터.
'아...'
보윤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단순한 설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중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묵직한 감동이었다.
보윤은 옷깃을 꽉 쥐며 해주의 뒤를 따랐다.
3. 알코올 없는 취기
데이트는 기적 같았다.
예약된 레스토랑은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와인 한 잔 하실래요?"라고 물을 줄 알았는데, 해주는 "운전해야 하니까요"라며 탄산수를 시켰다.
보윤은 술 없이 남자와 저녁을 먹는 게 이렇게 편하고 즐거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항상 술을 마시고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야만 했던 지난날들과는 달랐다.
"보윤 씨는 웃을 때 왼쪽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네요. 귀여워요."
"정말요?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다들 딴 데만 보느라..."
"딴 데요? 눈이 이렇게 예쁜데 딴 데를 왜 봐요?"
대화의 주제는 '몸매'나 '성적인 농담'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 가보고 싶은 여행지, 회사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해주는 보윤의 눈을 지긋이 맞추며 경청했고, 보윤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주며 리액션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와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초여름의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해주의 보폭은 컸지만, 그는 힐을 신은 보윤의 느린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손을 잡지도, 어깨를 감싸지도 않았다.
그저 나란히 걸으며 닿을 듯 말 듯 한 옷자락의 스침만이 있었다.
가끔 손등이 살짝 스칠 때마다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보윤을 미치도록 설레게 했다.
'나를 소중하게 대하고 있어. 깰까 봐 조심하는 거야. 만지고 싶은데 참는 게 느껴져.'
보윤은 이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공원의 길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4. 배려의 종착역
"늦었네요. 데려다줄게요. 타요."
해주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 안에서는 방향제 냄새 대신 은은한 우드 향이 났다.
차가 출발하고, 보윤의 오피스텔 쪽으로 향할수록 보윤의 손에 다시 땀이 차기 시작했다.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지은의 경고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남자들은 다 늑대야. 결국 목적은 똑같아.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건, 들어가겠다는 뜻이야.'
'집 앞까지 가면... 들어오겠다고 할까? 화장실 좀 쓰자고 할까? 라면 먹고 간다고 할까? 거절해야 하는데... 해주 씨는 착한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하지만...'
긴장감에 보윤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차가 보윤의 오피스텔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끼익.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보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차가 멈춘 곳은 보윤의 집 앞이 아니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대로변의 지하철역 입구였다.
"어...? 여기는..."
보윤이 당황해서 해주를 쳐다봤다.
해주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핸들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내려드릴게요. 집 앞까지 바로 가면 보윤 씨가 좀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요."
"......네?"
"혼자 사시는 분들은 집 위치 정확히 노출되는 거 꺼리시잖아요. 더구나 저랑은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인데, 제가 너무 집 앞까지 들이닥치면 부담스러우실 것 같아서.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하게 걸어가실 수 있죠?"
보윤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다.
불편할까 봐. 부담스러울까 봐.
그는 자신의 편의나 욕망보다, 보윤의 '심리적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보윤의 집을 알고 싶어 안달 냈던 놈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보윤을 지켜주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아... 네... 네! 걸어갈 수 있어요. 충분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해주 씨..."
보윤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차에서 내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심히 들어가요. 도착하면 꼭 톡 해요. 기다릴게요."
해주는 차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준 뒤,
보윤이 골목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해주의 차가 등대처럼 서 있었다.
5. 25년 만의 첫날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보윤은 해주의 가디건을 여전히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가디건에서 나는 그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현관 도어락을 열고 들어온 보윤은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키스도, 애무도, 섹스도 없었다. 몸에 멍도 들지 않았고, 씻어내야 할 타액도 없었다.
수치심에 떨며 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하아... 으으으..."
보윤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 진짜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몸이 섞이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이렇게 꽉 찰 수 있다는 걸, 보윤은 25년 만에 처음 알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해주에게 톡을 보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보윤]: 저 잘 도착했어요. 오늘 정말... 제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분도 안 돼서 답장이 왔다.
[해주]: 잘 들어갔다니 다행이네요. 저도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꿈에 나올 것 같아요. 잘 자요, 보윤 씨.
[해주]: (이모티콘: 잘 자라고 이불 덮어주는 곰돌이)
보윤은 핸드폰을 가슴에 품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 밤, 보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자신을 갉아먹던 거절의 공포도, 지은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심도 잠시 잊은 채, 오로지 '사랑받는 귀한 여자'가 되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완벽하고 무해한 37.5도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