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5. 정실과 첩
엘라라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의 손잡이로 향하고 있었다.
“자, 잠깐!! 스톱!! 일단 진정해봐!!”
엘라라의 손이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는 순간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엘라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단검을 쥔 채였지만, 다행히 아직 칼을 뽑아 들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다듬었다.
“엘라라, 너… 다행히 몸은 괜찮나 보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
엘라라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내 말에 약간의 동요가 생긴 듯했다.
“네. 의외로 오크처럼 엘프의 몸도 튼튼하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한 톤 낮아진 것 같았다.
‘좋아, 조금 넘어온 건가?’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그녀의 반응에 희망을 걸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누구죠?”
하지만 내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녀는 단검을 완전히 뽑아 들며 한 걸음 다가왔다.
“아니, 이게 그러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독이 배어 있었다.
“가죽을 얻고 싶다더니, 설마 인간 여자의 가죽을 가지고 싶으신 거였나?”
‘큰일났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화제 돌리기가 완전히 실패했다.
엘라라의 눈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이글거렸고, 그녀의 단검은 언제든 내 목을 겨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 좀 들어봐!!”
나는 다급히 외쳤다.
더 이상 화제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그녀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엘라라, 제발, 이건 오해야! 내가 설명할 테니까 칼부터 내려놔!”
엘라라는 잠시 멈칫했지만, 단검을 내리는 대신 더 단단히 쥐었다.
“오해? 지금 알몸으로 있는 그 꼴을 보고도?”
엘라라의 날카로운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
옷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걸치지 않은 알몸.
엘라라의 시선이 내 몸을 훑는 느낌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옆에 있는 아그네스를 보았다.
그녀 역시 알몸이었다.
그녀의 뽀얀 피부 위에는 내가 남긴 붉은 손자국과 멍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거… 변명은 글렀나.’
“그래서 뭐가 오해라고요?”
엘라라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쥔 단검은 여전히 차갑게 빛났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변명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내 알몸과 아그네스의 몸에 남은 붉은 자국들은 어떤 말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증거였다.
“으… 으음…”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그네스가 미약한 신음을 내며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지며 초점이 없는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 상태를 깨닫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황급히 팔로 몸을 가렸다.
“여, 여기는…?”
아그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볼 수 있겠네요.”
엘라라가 차갑게 말하며 아그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 쥔 단검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적어도 당장 휘두를 기세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깨어난 여기사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섞인 듯했다.
아그네스는 팔로 몸을 가린 채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엘라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기… 이 엘프는 누구야?”
“아, 그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전에 말했던 그 엘프야. 엘라라라고.”
아그네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엘라라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흘끗 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정실에게 바람을 들켜서 지금 위협받는 상황이란 말이군?”
“정실이라니?!”
나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딱히 엘라라가 정실이니 뭐니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엘라라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엘라라의 눈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아그네스의 ‘정실’ 발언에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살짝 풀리며, 어딘가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실…”
엘라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단검을 허리춤에 도로 꽂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살짝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이 내 어깨에 스쳤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정실처럼 보이나요?”
엘라라가 아그네스를 향해 헤실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날카로움과는 달리 장난기 가득한 톤이었다.
그녀는 내 팔을 꼭 잡은 채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어… 뭐?”
아그네스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여전히 팔로 몸을 가린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훌륭한 부부처럼 보인다!”
아그네스가 갑자기 상황을 파악한 듯 눈을 반짝이며 엘라라에게 아부를 던졌다.
그녀는 여전히 팔로 몸을 가린 채였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라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했다.
“그러니까, 너희 둘이 딱… 완벽한 커플 같아!”
“뭐?!”
나는 당황하며 아그네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아그네스는 내 시선을 받아치며 ‘살고 싶으면 닥쳐’라는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엘라라의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엘라라의 단검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여기서 더 엉뚱한 소리 했다간 진짜 칼 맞겠어.’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 상황을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래서…”
엘라라가 아까의 날카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둘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아그네스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너라도 좀 말해!’라는 간절한 신호였다.
아그네스는 내 눈짓을 받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이 오크가 호수에 물 마시러 왔는데, 내가… 내가 그걸 엿보는 줄 알고 오해했지. 그래서 공격했는데… 어찌저찌 일이… 그렇게 됐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분명히 그 ‘일’의 구체적인 부분을 숨기려는 의도였다.
엘라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 알몸이 된 오크를 보곤 흥분해서 덮쳤다?”
“아니?!”
아그네스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긍지 높은 여기사인 내가 어떻게 오크를 덮쳐! 그건… 그건 그냥… 내가 방심한 틈에 이 오크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엘라라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숨길 필요 없어요.”
그녀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사들의 성욕은 이미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거든요.”
그녀는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보나마나 ‘큭, 죽여라!’ 하면서 덮쳐지길 기대했겠죠?”
아그네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뭐, 뭐라고?!”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발끈했지만,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없었다.
엘라라는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이 오크는 또 내뺐을 거예요, 맞죠?”
그녀는 아그네스를 향해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아그네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터질 것 같았지만, 엘라라의 직설적인 분석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엘라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또 밀어붙이니까, 왕자님은 또 성욕을 참지 못하고 난폭하게 했겠네요. 거기 그 몸에 자국들이 그걸 다 보여준다고요.”
그녀는 아그네스의 몸에 남은 붉은 손자국과 멍을 흘끗 보며 단정 지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왜 이렇게 잘 알아…”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엘라라의 분석은 거의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뭐,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엘라라가 아그네스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우리 왕자님을 덮쳤거든요!”
그녀는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내 팔을 살짝 툭 쳤다.
아그네스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엘라라가 박수를 한번 ‘짝’ 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평소의 명랑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충 상황은 다 파악했어요.”
그녀는 나와 아그네스를 번갈아 보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선언했다.
“일단 왕자님이 이 여자랑 바람피운 건 맞네요.”
“아니라니까!”
내가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그녀는 가볍게 무시했다.
“하지만! 이 여기사님이 왕자님을 유혹한 것도 사실이고, 왕자님은 또 그걸 참지 못한 것뿐이니까… 음,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눈감아 주기로 하죠.”
그녀는 아주 관대한 처사를 내리는 듯이 말했다.
“그 대신!”
엘라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앞으로는 저를 ‘정실’로 인정하고, 이 여기사님은 ‘첩’으로 삼는 거예요. 어때요?”
“뭐라고?!”
나와 아그네스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싫어요? 그럼 그냥 여기서 이 여자, 처리해버릴까요?”
엘라라는 다시 단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며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와 엘라라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이 미친 엘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어쩔 수 없죠. 확실히 말 중의 말은 ‘백마 탄 왕자님’을 태우는 우아한 백마지만, 가끔 전장에 나설 땐 거친 적토마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녀는 아그네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무슨 비유야!!!”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엘프는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있는 건가!
내 절규에도 엘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그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일어나세요. ‘적토마’ 씨. 이제 우리 집으로 가요.”
아그네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엘라라의 서늘한 눈빛과 내 알몸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 체념한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가죽을 구하러 나왔다가, 옷은커녕 새로운 식구만 늘려서 돌아가게 생긴 셈이었다.
“아, 참!”
오두막을 향해 걷기 시작하던 엘라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왕자님을 찾아서 오다 보니까, 저쪽에 커다란 멧돼지가 기절해서 쓰러져 있더라고요?”
그녀는 우리가 있었던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 끌고 가면, 당분간 식량 걱정도 없고, 가죽도 충분히 나오겠어요. 결국 사냥은 대성공이네요, 왕자님!”
그녀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분명 목적(식량과 가죽)은 달성했다.
그런데 왜 과정은 이렇게 엉망진창이고, 결과적으로 내 손에 남은 것은 기절한 멧돼지 한 마리와, 정실과 첩이 되어버린 두 명의 미친 여자란 말인가.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기절한 멧돼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