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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화:이… 이 쓰레기야!


54화 당연하지만 내가 기대하고 그녀들이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연이가 같이 자자고 한 이유는 공포 영화의 잔상이 남아서 혼자 자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을이 방에서 하루만 재워줄 수 있냐는 의미였는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서 오해를 일으켜!” “집주인한테 물어보지.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튼 가을이한테 물어봐. 나는 상관없어.” “언니, 저 자고 가도 돼요?” “상관없어.”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눈빛이 유해지는 가을이. 얘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연이 완전 겁쟁이네.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누구 찾고 말이야.” “아, 아니거든?” 발끈하는 모양새가 완전 정곡을 찔린 것 같다. “그럼 위층에서 침구류만 가지고 와.” “….” “안 가고 뭐해?” “… 같이 가줄 사람…?” 참나. 이러면서 겁먹은 게 아니라고 말해봤자 조금의 설득력도 없는데. *** 나연이가 우리집에서 자고 간다고 한 다음날. 간만에 푹 잤는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이 시간에 일어났는데도 더 자고 싶지도 않고 엄청 상쾌하네.” 간만에 상쾌한 아침을 만나서 나는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침구류 정리를 했다. 깔끔해진 침대를 보니 왜인지 기분이 좋았다. “나쁘지 않은데? 앞으로 버릇 들여놓으면 좋을 거 같은데. 잠도 깨고.” 흔한 자수성가 강의 팔이 뉴튜버들의 영상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부자들의 습관이라며 소개하는 것 중에 항상 나오는 게 일어나자마자 침구류를 정리하라는 거다.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습관으로 들여놔서 나쁠 건 없겠지? 침구류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항상 거실로만 나오면 여자들이 시끌벅적하게 맞이해줬는데…. 좀 어색하다. ‘조용한 게 어색한 걸 보면 확실히 애들이랑 지내는 게 익숙해졌나보네.’ 나는 묘한 감상을 느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실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원래 자리하고 있던 터렛들은 이미 성벽 위로 옮겨놓은 상태다. 텅 빈 옥상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벽 위에 작은 점처럼 경비조가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고 마침 교대 시간인지 성벽 쪽으로 걸어가는 야구부원들이 보였다. “다들 성실하게 나가네.” 사실 터렛의 스펙도 중급 몬스터에게도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수준이고 그 숫자도 성벽을 빙 두를 수 있을 만큼 많다. 덕분에 몬스터가 나타나도 성벽에 접근하기도 전에 처치할 수 있다. 그래서 사실 경비조는 전투를 벌일 일도 없이 단순히 밖을 보며 대기만 하고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대한민국 군필 남성이면 다들 알겠지.’ 위험한 장소를 경계하고 자리를 지킨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무슨 변수가 생기면 빠르게 연락하라고 연락이 가능한 휴대폰도 조별로 하나씩 전달해 주었다. 인터넷은 안 되니 사실 휴대폰의 모습을 한 무전기긴 하지. “인터넷 전문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사실 인터넷 전문가가 있다고 해도 인터넷을 꾸릴 여건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냥 있으면 막연히 가능할까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슬슬 내려가자. 쌀쌀하네.” 벌써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새벽에 잠옷 차림으로 옥상에 올라와 있으니 많이 쌀쌀하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부엌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따라 부엌으로 가보니 유빈이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일어났어요?” “그러는 넌?” “저는 원래 아침잠이 많지 않아서요. 조리학교에서 스타지 나가면 새벽 4시에 일어나기도 하거든요.” “스타지…?” “학생들이 실제 업장으로 가서 일 배우는 거예요.” “아하, 그렇구나….” 유빈이가 아침을 만들기 위해 꺼내놓은 재료들을 보고 있으니 메뉴가 딱 보였다. “고등어랑 통조림 햄 구워서 내놓게?” “거기에 돼지고기 김치찌개랑 계란조림하고 나물 몇가지 꺼내놓으려구요.” “오, 맛있겠네.” “오늘 아침은 조금 단출해요.” “으음, 아니, 전혀 단출하지 않은데.” 매일 아침 최소 9첩 반상을 꺼내놓는 유빈이가 대단한거지. 설명만 들어도 전혀 단촐해보이지 않는다. “근데 계란조림은 전날에 해놔야 맛있는 거 아니야?” “장조림이랑은 좀 달라요. 이건 우리 엄마 특제 레시피에요.” “오, 어제 내가 솜씨 발휘했다고 그러는 거야?”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유빈이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 앞치마 좀 묶어줘요.” 유빈이가 앞치마를 목에 걸고 뒤를 돌아서 끈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뒷태가 오우….’ 말도 안 되게 섹시하다. “그래.” 그래도 나는 가끔 해주던 일이라 스스럼없이 앞치마를 묶어주었다. “다 묶었어.” 내가 앞치마를 다 묶고 유빈이의 어깨를 톡 치니 유빈이가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 나의 볼에 뽀뽀를 했다. “이거봐라. 요즘 좀 잠잠하다 싶더니 완전 여우야.” “오빠만 하겠어요?”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천천히 몸을 붙여오는 유빈이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유빈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어….” 그때 내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아, 왜 하필 나연이야. 다른 애들이면 그래도 다 알고 있는 사인데…. “어, 야 그게 아니라….” 황급하게 해명하는 나. 그걸 보고 유빈이는 또 입꼬리를 올리며 짧게 웃음을 내고 내 볼에 한번 더 입을 맞췄다. 이제는 아예 팔로 내 목을 감고 있었다. “어, 어, 미, 미안!” 그러고는 나연이는 다시 가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쟤 완전 쑥맥인데 이러다가 어색해지면 어쩔 거야?” “뭐 어때요. 어차피 다 들켰는데.” 나연이는 사실 이성 관계에 대해 엄청난 쑥맥이다. 처음에 강묵이랑 눈도 못 마주친 거 생각하면 상상 이상으로 쑥맥인 거지. 지금 나연이에게 나는 게임 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물론 이전에 그렇고 그런 이벤트가 있긴 했지만 이미 그때의 기억은 희석되고도 남았을 거다. 벌써 그게 두달 가까이 됐으니까. “모르겠다.” 어색해져봤자 조금 시간이 지나면 게임하자고 달려올 애니까. 신경쓰지 말자. “오늘 아침밥 기대할게.” “그래요. 쉬고 있어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이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다는 게 또 게임이네.” 이렇게 행복한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아침을 먹고나면 또 일을 해야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지금을 즐기자. *** 아침을 먹고 나서 일을 하기 위해 기술자들과 각성자들을 만나도 다녔다. 그런데 기술자들은 다들 각자 할 일을 알아서 하고 있어서 딱히 내가 지시하거나 확인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하루의 일정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뭐야. 벌써 왔어?” 집에 돌아온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준 사람은 포인트 생산기를 돌리고 있던 가을이였다. 할 일이 없다며 집에서 포인트 생산기 돌리고 싶다고 하길래 설치해 준 거였는데 작동 방식이 자전거 패달을 밟는 거라 운동도 된다며 아주 매일 같이 돌리고 있다. “그러게. 오늘 일은 금방 끝났네. 다들 유능해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더라고.” “아하.” 가을이는 포인트 생산기에서 내려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얼마나 돌렸어?” “2시간 정도? 쉬면서 돌린 거라 실제로는 1시간 30분 정도 돌렸겠네.” 나는 저절로 가을이의 몸에 눈길이 갔다. 얇은 흰 티를 입고 땀이 나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 속옷이 비친다. “오호?” 내 눈길을 순식간에 알아챈 가을이는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뭐야, 땀 흘린 거 좋아해?” “뭐, 뭔 소리야.” “으음? 그럼 싫어?” 가을이가 내 몸에 붙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을이와 눈을 마주치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그 아래로 가을이의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얘는 무슨 땀 냄새도 안 나냐…. ‘아니, 그런데 이것들이 오늘 단체로 왜 이래?’ 밤에 아주 혼쭐을 내줘야하…. 그런데 얘들도 이제 건강 유지 효과 받아서 체력이 장난아니라 만족시키기 힘든데 말이지. “진짜 싫어?” “싫겠냐?” 나는 계속되는 가을이의 도발에 그녀를 끌어안고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내 무릎 위에 가을이가 앉아서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떼어냈다. “이게 요즘 안 건드려줬더니 기세등등하네? 혼나려고.” “혼 좀 내주지 그래?” 나는 가을이의 엉덩이에 양손을 올리고 주무르며 키스를 나눴다. “오늘따라 망설임이 없네?” “아침부터 그럴 일이 하나 있었어.” 가을이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서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을 무렵. 벌컥. 그때 가을이 방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어…. 어….” 그 안에서 나연이가 나와서 우리가 들러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나연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뭔가 결심한 듯 소리를 쳤다. “이… 이 쓰레기야!” 아, 오늘 일진이 왜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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