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 내가 먼저 좋아했었는데...
3.
[용사는 NTR 당한다]의 첫 에피소드는 NTR의 왕도라고 부를 수 있는 '내가 먼저 좋아했었는데...'다. 전문용어로 'BSS'라고도 불리는 NTR의 하위 장르다.
라크와 리나, 그리고 제프는 완벽하게 BSS의 기본 문법을 쫓아간다.
오랜 시간을 보낸 소꿉친구지만 연인은 아닌 라크와 리나는 '용사'라는 직업 때문에 서서히 멀어진다.
그 사이에 제프가 외로워하는 리나에게 접근, 리나와 사귀게 된다.
마지막으로 방학을 맞아 돌아온 라크는 제프와 리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좌절한다.
이야기의 흐름만 보면 라크가 억울할 게 하나도 없다. 막 성인이 되어 매력이 폭발하는 리나를 가만히 두고 멀리 떠난 것부터가 라크의 잘못이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데 주변에서 리나를 가만히 둘 리가 있겠는가?
떠나기 전에 도장을 찍을 기회가 십수 번은 있었는데 그걸 다 밀어내며 떠나갔으니, 리나에게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며 비난할 명분도 없다. 그 정도로 밀어냈으면 바보라도 가망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리나에게 <동정 용사>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것이다. 사실을 밝히고 대책을 의논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라크는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라크는 이 이야기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제삼자의 입장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제삼자의 입장이 아니다. 라크에 빙의해 버렸으니, 이 이야기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제프는 개새끼다.
이야기의 흐름만으로도 제프가 개새끼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셋은 친한 소꿉친구였고, 제프는 라크와 리나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오늘부터 1일'이라며 도장을 찍지는 않았으나, 둘이 서로를 보는 눈빛은 남달랐으니까.
나이도 두 살이나 더 먹은 형이라는 놈이 동생의 연애를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사이에 끼어들다니, 쌍욕을 먹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라크는 제프를 믿고 자기가 없는 동안 리나를 지켜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제프는 그런 믿음까지 저버린 자식이다.
라크가 받은 충격이 컸던 이유다. 라크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배신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소설로나마 그런 일을 경험했으니, 제프를 보자마자 살기가 치밀어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허접한 레벨이 내뿜는 어설픈 살기지만, 그 분위기만은 느낀 모양이다.
"...? 라크?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나를 걱정하는 다정한 말을 들으니,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다.
"아... 조금 무리했나 봐."
"어쩐지 너무 일찍 나왔더라니. 좀 쉬어. 용사라도 쉬기는 해야지."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공터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진짜로 손이 올라갈 것만 같았다.
과민반응인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알고 본 건 결국 소설 속의 이야기지, 지금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
나와 리나가 이어졌으니 앞으로 제프에게 기회가 있을 리도 없고.
하지만 제프에게는 또 다른 죄가 있다. 이야기의 흐름만으로는 알 수 없는,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었을 때 알 수 있는 죄.
제프는 어쩌다 보니 리나와 사귄 게 아니다. 라크의 빈자리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리나가 라크를 포기하도록 계속 가스라이팅했다.
라크가 돌아와서 두 사람의 섹스 장면을 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전부 제프가 꾸민 일이었다.
모든 건 제프가 라크에게 가진 열등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열등감을 뒤틀린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리나에게 접근한 것이다.
시작은 작은 거였다.
바로 키.
라크는 제프보다 10cm 넘게 크다. 어릴 때는 형 동생이 바뀐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춘기 남자에게 이런 건 중요한 문제다.
제프가 직각 어깨를 가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키가 안되면 어깨로라도 이겨보려고. 실제로 어깨는 이겼지만,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딱 봐도 라크의 비율이 더 멋있으니까.
그러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열등감이 거의 사라졌다.
제프가 [경비병(C)]이라는 직업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프가 C급 전투 직업을 얻었을 때, 마을은 난리가 났다. 대부분은 F급 직업이고, D급 직업도 흔하지 않은 마을에서 C급 직업이 나왔으니 난리가 나는 게 당연했다.
제프가 촌장 아들이 아니었다면, 바로 마을을 떠나 도시로 향했을 것이다. C급 직업이라면 도시에서도 어느 정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까. 좋은 경험을 쌓아 전직을 할 수 있다면, [도시 경비 대장(B)] 같은 게 될 수도 있었다.
이 마을에서 나무꾼이나 하다가 평생을 보내게 될 라크와는 살아가는 인생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제프에게 더 이상 키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라크가 성인이 되자 상황은 역전됐다. 일개 나무꾼에게 경비병은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일개 경비병에게도 용사는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이쪽이 더 심했다. 나무꾼은 노력에 따라 경비병이 될 수도 있지만, 용사는 진짜 선택받은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거니까.
사라져가던 열등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왜 라크가 용사가 된 거지?'
'왜 내가 받아야 할 환호를 가로채는 거야.'
'키로는 모자랐어?'
겉보기에는 우직하고 성실하지만, 제프는 인정 욕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비교당한 라크에게, 그는 끊임없이 질투했다.
물론 그걸 겉으로 드러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미워도 라크는 오래도록 알고 지낸 소꿉친구고, 성인이 된 제프는 자제력이 있었다. 용사가 되었다는 것 정도로 리나를 어떻게 할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리나를 부추겼다.
'지금 기정사실로 만들어야 해. 라크가 떠나기 전에 말이야.'
'몸으로 들이밀어. 네가 들이밀면 라크도 어쩔 수 없이 받아줄 거야.'
'라크가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당연히 널 좋아하지. 누가 봐도 너희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어떻게 유혹하는지 모르겠으면... 그래,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이렇게 하면 바로 넘어올걸?'
어제 리나가 보여주었던 어색한 어필도 제프의 조언을 듣고 나온 거다. 제프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빌었고, 소설에서는 이 이후로도 계속 리나에게 조언하게 된다.
뭐, 그러다 약간의 스킨십도 하게 되고, 두 사람이 좀 더 허물없는 사이가 되는 계기가 되는 거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그런 가능성조차 원천 차단했다. 내가 한 번에 리나를 받아들였으니까.
"잠을 잘 못 자서... 밤에 리나가 놀다 갔거든."
"리나가? 걔는 훈련하느라 바쁜 애를 왜... 아, 설마? 너? 설마?"
제프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다가온다. 허물없는 사이에서만 볼 수 있는 표정을 보니 역겨움과 분노가 조금 줄어들긴 한다. 이건 제프에게 익숙한 라크의 몸이 보내주는 신호다.
"흠흠,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맞네! 잘 됐다! 축하해! 그래, 용사가 됐다고 소꿉친구를 버리면 안 되지! 설마 리나를 가지고 놀고 버릴 건 아니지?"
"누가 리나를 버려. 리나는 이제 내 거야. 누가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릴 거야."
이 말을 할 때는 약간 진심을 담았다. 라크의 몸이 보내주는 신호들을 무시하고, 제프를 적으로 인지하고 강하게 발언했다.
"...그래, 그런 기세야. 이제야 좀 용사답네."
조금 과하다고 생각한 표현이었는데, 제프는 부드럽게 넘겼다. 자신을 향한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실제로 지금의 제프는 리나를 어떻게 할 생각을 꿈에서도 한 적이 없다. 소설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제프는 리나를 여동생으로 생각할 뿐이다. 사춘기 때도 리나로 자위한 적이 없다고 적혀 있다. 라크는 리나로 자위한 적이 수백 번이 넘어가는데 말이다.
리나 같은 미인이 옆에 있는데 남자가 되어 어떻게 참을 수 있냐고?
그건 우리에게 또 한 명의 소꿉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라크와 리나를 응원하던 제프가 다른 마음을 먹게 된 계기.
꺼져가던 제프의 열등감을 라크보다 더 심하게 자극한 상대.
"둘 다 여기 있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그 사람도 공터에 나타났다.
소설에서 이맘때쯤 등장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보다.
"어, 언제 온 거야?"
제프가 말을 더듬고,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워낙 무뚝뚝하게 생겨서 티는 안 나지만, 소설로 제프의 속마음을 읽었던 나는 구분할 수 있다.
'와... 오늘도 예쁘네.'
제프의 속마음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긴 생머리는 찰랑거리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눈은 큼지막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집중시키는 아우라가 있었다. 얼음 공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면 얼어버릴 것 같아서 무섭고, 그럼에도 또 다가가고 싶은.
"막 도착했어."
그녀는 제프에게 가볍게 대답하고는 바로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라크, 너 용사가 됐다며?"
"응, 레이라 누나. 나 용사가 됐어."
또 한 명의 소꿉친구이자 제프가 좋아하는 사람, 레이라.
[빙검희(A)]라는 직업을 가진 그녀가 방학을 맞아 수도 아카데미에서 돌아왔다.
그녀의 관심이 나에게 향하는 걸 보는 제프의 얼굴이 이번엔 진짜 무뚝뚝해진다.
'오랜만에 봤는데, 왜 라크부터? 라크가 용사라서?'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어쨌거나, 보기 좋은 표정이다. 라크가 당한 걸 생각하면 조금이지만 통쾌한 느낌도 든다.
좋은 생각이 났다.
어떻게 하면 리나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을지.
BSS에는 BSS로 갚아주는 거다.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