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063. 알리아나(2)
이튿날 아침.
약속대로 대현자는 알리아나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불똥이 내게도 튀었다.
그 불똥이라 하면,
"네?! 제가요?!"
-그렇네. 엘프 왕국에서 얼른 데려다 달라고 성화라서, 정우군이 직접 데려다줘야 할 거 같네.
"아니, 그게 무슨…."
-자네가 끄는 마차가 무척 빠르지 않나. 이번 한 번만 고생 좀 해주게.
엘프 공주를 엘프 왕국까지 운송하는 퀘스트 되겠다.
나는 갑자기 원치 않은 퀘스트를 떠맡게 되어,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엘프 왕국까지… 얼마나 걸리더라?'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보니, 빠르게 움직여도 대충 2주 정도 걸리겠다.
왕복으로 따지면… 약 한 달.
그래. 할 수야 있다.
한 달이나 운전할 생각을 하면 막막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내 직업은 [기사]고 어차피 운전하는 게 일이었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러면… 저 건국제도 못 보는 건가요?"
기대했던 건국제를 못 보게 생겼다.
내 말에 대현자가 한층 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그런데 한시가 급한 일이라네.
"하아…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물어봤다.
-오늘 중으로 출발해주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대현자.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돼?"
알리아나는 어제 인간 제국의 수도 구경이 꽤 재밌었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화면 속 대현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엘프 왕국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물론이고 여왕께서도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제가 어찌어찌 어제 하루는 끌었지만, 이제 진짜 안됩니다.
"엄마가…? 알았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알리아나.
그 모습을 보니 좀 속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래. 넌 좀 혼나야지.'
어디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여기까지 왔는지, 쯧.
마차로 2주나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도 내가 끄는 마차로.
직접 걸어왔다고 치면 적어도 삼 개월 이상은 걸렸겠지.
딸이 그렇게 오랫동안 가출했다면, 부모 입장에서 속이 타들어 갈 만도 하다.
-그럼 정우군 부탁하네, 난 이만….
슬슬 통신구 연락이 끊기려 할 때, 뒤늦게 알리아나가 언성을 높였다.
"아! 대현자! 잠깐만!"
-음? 무슨 일이십니까.
"그 혹시… 마석 좀 보내줄 수 있어? 엘프 왕국으로.
-마석 말입니까?
그녀가 말한 마석이란, 마법사들이 특수한 공정을 통해 마나를 불어넣은 돌이었다.
그리고 보통 마법 물품에 사용된다고 알고 있다.
'저번에 대현자의 저택에서 봤던 블루투스 샤워기가 대표적인 물건이지.'
능력 좀 되는 마법사라면 만들기 쉬워 가격도 꽤 저렴했는데, 지구로 따지자면 아무래도 일회용 건전지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알기론 우리 마차에도 몇 개 들어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왜 대현자에게 찾지?'
굳이 저걸 이렇게 급하게 말해야 하는 거였을까.
내가 속으로 의아해할 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응. 수호자가 슬슬 마력이 다 떨어져 가거든. 아무래도 마석을 갈아줘야 할 거 같아."
수호자?
수호자는 또 뭐야?
그때 대현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고물… 말입니까?
"고물이라니! 우리 왕국의 수호자에게 말이 심하잖아!"
-작동도 안 되지 않습니까.
"작동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엘프 왕국이 아직 안전해서 잠들어 있는 거라니까!"
한참 투닥거리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엘프.
그 내용을 듣자 하니,
'고장 난 물건을 고치려 하는 건가?'
아무래도 이미 고장 난 물건에 애착을 갖는 거 같다.
뒤늦게 나도 중요한 게 떠올랐다.
"아, 대현자님!"
-…무슨 일인가?
"저도 마차 수리 맡겨야 할 거 같은데…."
어제 경비대에 끌려갔다가 까먹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저 엘프 공주를 관광시켜준다고 정신이 없었고.
-응? 마차에 어디 문제가 생겼나?
"그 살짝 바퀴 축이 틀어진 거 같아서요."
-으음… 당장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아뇨, 그건 아닌데요…?"
심각한 건 아니었다.
괜히 신경이 쓰일 뿐이었지.
-흐음, 그러면 우선 알리아나님을 데려다주고 그다음 고치면 안 되겠는가.
잠깐 마차의 상태를 떠올려본다.
덩달아 내가 '운전' 능력을 사용했을 때 얻었던 정보도.
"괜찮을 거… 같네요?"
저번처럼 언데드들을 박살 내면서 달리지 않으면, 한 달은커녕 반년도 거뜬할 거 같긴 하다.
-그러면 바로 부탁 좀 하겠네. 아, 그리고 알리아나님. 마석은 며칠 이내로 엘프 왕국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고장 난 물건이 어지간히 아끼던건지,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반면에, 갑자기 일을 떠맡게 된 나는 씁쓸하기만 했다.
'에효… 내 팔자야.'
***
엘프 왕국으로 떠나기 위해 한창 준비를 하고 있자, 최유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도 같이 갈까요?"
나 혼자 엘프 왕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나도 다 함께 떠나고 싶었지만,
"에이, 됐어요. 유나씨는 건국제 구경하세요."
모처럼 커다란 축제가 열린다는데, 이들도 구경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만 해도 얼마나 아쉬운데.
그리고 같이 간다고 해봤자 이들은 할 일도 없었다.
한 달 내내 마차 안에서만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고역일 거였다.
'그냥 후딱 다녀와야지.'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나 혼자 고생하면 될 걸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싶진 않았다.
"건국제 구경도 못하고. 짜식, 아쉬워서 어쩌냐?'
'저 필립 자식만 빼고.'
마음 같아서 저놈은 좀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도 당당했다.
"짜식아, 내가 거길 왜 가? 게다가 난 마차도 못 타는데. 그냥 너 혼자 가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
맞는 말이긴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던 박채린은,
"고생해."
빈말로도 같이 가겠다고 안 하더라.
이예지는 혹시 내가 같이 가자고 할까 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하고.
'하은 쟤는….'
내가 하은을 힐끔 바라보자, 그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같이 가줄까?"
"아냐, 됐어."
쟤랑 같이 가봤자, 한 달간 대화 몇 마디 안 나누지 않을까.
그러므로 엘프 왕국으로 향하는 건 나와 알리아나, 둘 뿐이었다.
'쓰읍, 괜찮으려나.'
위험은 걱정하지 않는다.
알리아나 혼자서 걸어도 왔다는데, 가는 길에 위험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다만 걱정되는 건….
"흐음, 자네가 마부라고? 내 특별히 저번 일은 전부 잊어주겠노라."
어느 순간부터 기고만장해진 저 알리아나의 태도였다.
엘프 공주라는 게 드러나고 내가 대현자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내게 붙잡혀서 울먹이던 건 벌써 잊었는지, 말투부터 거만하기 그지없다.
'뭐… 거만해도 될 신분이긴 하지만.'
엘프 공주란다, 공주. 한 나라의 공주.
심지어 엄마가 여왕이라고 하고.
나한테 인맥이라곤 대현자 뿐이 없는데, 그 역시 알리아나한테 지극히 공손했다.
따라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낮춰야 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알리아나님."
내 존댓말에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크흐흠, 그래. 언제 출발할 수 있겠느냐."
"대충… 한 시간 후쯤에 출발하면 될 거 같습니다."
"알겠다. 잠깐 둘러보고 올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그리고… 거기 용사라고 했지? 나랑 잠깐 대화 좀 나눌래?"
알리아나가 박채린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찝찝한 기분이 올라왔다.
'저거… 나랑 박채린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빼고 다른 인원들에게도 하대를 한다.
오직 박채린한테만 평대를 쓰는데….
'저번에 한 번 싸워봐서 그런가? 아니면 설마… 용사라고?'
내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나와 다른 인원들은 그냥 일반적인 평민이다.
S급 모험가라는 필립 역시 결국 평민 중 뛰어난 것뿐이지, 신분이 평민이라는 게 바뀌진 않는다.
반면에 박채린은 엘렌의 선택을 받은 용사.
물론 우리도 엘렌의 선택을 받긴 했지만….
'그래 봤자 마법사, 궁수 같은 직업이니까.'
명칭이 달랐다.
애초에 우리 파티를 보고 '용사 파티'라고 하지 않는가.
잘 모르는 제3자의 시선에서 보면 '용사와 쩌리들'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에이, 아니겠지."
짐을 옮기며 혼잣말을 내뱉어, 떠오른 생각을 지워낸다.
그냥 직접 싸워봐서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그런 거일 거다.
설마 신분이나 호칭 따위로 대하는 태도가 다를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실 신분으로 차별한다고 하면 어떠한가.
어차피 난 조용히 운전만 하면 될 일이었다.
쟤는 마차 안에 있을 거고, 나는 운전석에 있을 거고.
서로 얽힐 일도 없었다.
'얼굴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성격이 어떻고 가치관이 어떻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냥 내 할 일만 조용히 하면 얼굴 붉힐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둘이서 떠나게 된 장거리 여행.
내 예상대로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마부 따위가 있는데 내가 어째서 불침번을 서야 하느냐!"
알리아나는 생각보다 골 때리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