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060. 건국제(2)
"죽여버리겠어!"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의 고함 소리.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 예쁜 여자가 보여서.
반짝거리는 새하얀 백발 머리.
멀리서도 후광이 비추는 듯한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눈에 바로 들어오는… 기다란 귀.
'엘프…?'
말로만 듣던 엘프였다.
그 엘프 여성은 한 남자를 삿대질하며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삿대질 당하는 남자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참 세상 좋아졌군. 엘프 따위가 혼자 제국의 수도를 돌아다니다니."
"이익…!"
부들거리는 엘프 여성.
누가 봐도 남자가 시비를 거는 모습이었는데,
"하긴,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바로 데려가서 흐흐…."
엘프 여성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러한 분위기에는 어쩔 수 없는 배경이 깔려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이었다고 하니….'
이세계에는 인간들의 나라는 '루도 제국' 하나뿐이다.
지구에서처럼 처음에는 여러 나라가 존재했지만, 결국 한 개의 나라가 통일을 이뤄낸 거였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의 나라를 통일한 루도 제국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이종족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나라인 '루도 제국'과 엘프 왕국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루도 제국은 모든 이종족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강력한 루도제국은 '인간 우월 주의'를 앞세워 모든 이종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수인족들을 멸망까지 시켰으니, 얼마나 인간들의 세력이 강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옛날 얘기지.'
십여 년 전, 어느 날 나타난 마족 한 명이 마족들을 규합했고, 자신을 마왕(魔王)이라고 칭하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족들 역시 인간의 아래에 있는 종족이라 생각하였으니.
그리고 벌어진 전쟁에서 인간들은 참패를 하고 만다.
이는 인간들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워프 왕국과 엘프 왕국 역시 속절없이 마왕군에 밀리고,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다.
마왕군의 압도적인 전력 아래, 루도 제국을 포함한 세 나라는 곧바로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휴전만으로도 모자라, 불과 3년 전 동맹 협정까지 맺게 되었다.
즉 지금은 엘프들과 동맹 관계였지만,
"윗사람들 생각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니까. 저런 귀쟁이들이 수도를 돌아다니게 하고."
"저년들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그건 일반 평민들에게 와닿지 않는 문제였다.
그제야 엘프 여성의 복장이 보인다.
마법사들이 쓰고 다닐만한 널따란 후드가.
'중간에 벗겨졌나.'
아무래도 엘프가 후드를 눌러쓰고 수도를 구경하다가 저런 사건이 난 것 같다.
나야 뭐 딱히 끼어들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박채… 어?!"
박채린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다들 뭐 하는 짓이에요!"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약자 한 명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도 일부 맞긴 하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엘프 역시 박채린을 신경 쓰지 않고 버럭 소리를 친다.
"카사!"
그러자 바로 옆에서 화염이 일어난다.
그리고 점점 새의 형태로 모양을 갖추어간다.
'정령…?'
엘프란 종족은 약자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게 모든 이들이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종족이었다.
"저 자식을 태워버려!"
엘프가 손으로 가리킨 상대는 아까 능글맞게 웃던 남자였다.
그리고 옆에 형태를 갖춘 불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길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운다.
이윽고 불새가 남자를 덮치려 할 때,
촤아악-
어느샌가 꺼낸 박채린의 검에, 카사라는 정령이 반으로 갈라진다.
"어, 어…?"
엘프는 당황했는지 눈을 커다랗게 뜬다.
'에휴… 채린아….'
처음엔 엘프를 도우러 나갔다가, 사람이 죽을 거 같으니 우선 구하고 봤겠지.
참 그녀다운 행동이긴 했지만,
"이익… 감히 내 카사를 역소환시켜?"
엘프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행위였나 보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운디네!"
엘프의 옆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생겨난다.
이윽고 새롭게 생겨난 정령에게 다시금 명령을 한다.
"저 여자를 제압해!"
박채린을 향해 강력한 물줄기가 날아든다.
그 물줄기 역시 박채린의 검 앞에서 갈라져 사라진다.
"이익…!"
연속해서 자신의 공격이 막히니 분이 오르는지 엘프 여성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구경하던 사람들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특히 사건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던 능글맞은 남자는, 아까 불길에 목숨의 위협을 느꼈는지 벌써 달아나고 없어졌다.
그러나 엘프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실피드!"
흐릿한 무언가가 늑대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 크기는 무려 2M에 달할 정도.
여태까지 정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잠깐만요. 전 그쪽이랑 싸울 생각이…."
박채린은 열심히 대화를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저 여자를 제압해!"
재차 소리치는 엘프.
그래도 아까처럼 죽이라는 말을 안 하는 걸 보면,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저 둘이 싸우는 거야, 대체.'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던 나로선 참 머리가 아파 왔다.
흐릿한 늑대가 단숨에 뛰어와 박채린에게 앞발을 휘두른다.
그녀 역시 재차 검을 휘둘러 녀석을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챙-!
여태 정령들과 다르게 그녀의 검이 튕겨 나간다.
허나 실피드라는 정령 역시 썩 멀쩡한 건 아닌지 성큼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금 격돌이 일어난다.
채채챙-
무엇이든 베어내던 박채린의 검이 정령의 몸에 막혀 낭창낭창 휘어간다.
늑대 모양의 정령 역시 타격이 있긴 한지 움찔움찔 멈춘다.
저 실피드라는 정령은 상당히 강한 거 같은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나로선 저 늑대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끼어들어봤자 박채린에게 방해만 되겠지.
그렇다고 계속 구경만 할 수도 없는 노릇.
한숨을 푹 내쉬고 걸음을 옮긴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둘의 전투를 구경하는 엘프의 뒤 쪽으로.
'이런 건 진짜 별론데.'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방법이 가장 빠르게 전투를 멈출 수 있었다.
오랜만에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 든다.
그리고 엘프의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고, 목에 칼을 겨누었다.
"거기까지 하지?"
내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
짜증 나던 심정이 나도 모르게 묻어나온 거 같다.
"힉…!"
엘프는 갑자기 목 바로 앞에 놓여진 날붙이에 깜짝 놀란 듯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장 정령을 멈추지 않으면, 예쁜 머리통이 몸이랑 헤어지게 될 걸?"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허나 엘프에겐 진심으로 들렸는지, 벌벌 떠는 게 느껴진다.
"시… 실피드. 멈춰…."
엘프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흐릿한 늑대 녀석이 몸을 멈춘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크르르릉-
날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넌 왜 나한테 그래….'
난 그냥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고 싶었을 뿐인데….
박채린도 뒤늦게 이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커다랗게 뜬다.
"강정우?!"
아주 잠깐, 그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한창 늑대와 싸우던 도중 갑자기 공격이 멈췄다.
그리고 보니까 일행이 엘프를 죽이려 하고 있다.
'음, 모르겠군.'
고마워하려나?
아니면 미친놈 보듯이 보려나?
자기 위해서 한 행동인데, 기왕이면 고마워했으면 좋겠는데….
"정령을 역소환 시켜."
내 명령에 엘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흑, 실피드… 돌아가…."
울먹이기까지 한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날 죽일 듯 째려보던 늑대 녀석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그녀를 풀어주었다.
내가 선뜻 자신을 풀어주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나는 재빨리 박채린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도망가려 했지만….
삐이이익-
아무래도 늦은 거 같다.
저 멀리서 호각을 불며 달려오는 경비대 인원들이 보인다.
십여 명의 인원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쌌다.
"당장 멈춰라! 멈추지 않는다면 공격하겠다!"
날카로운 창을 우리에게 겨눈 채 외치는 병사의 모습은, 이미 범죄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말에 박채린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저희는 그냥 지나가던 피해자인데…."
"닥쳐라! 변명은 전부 가서 듣겠다!"
'꽤 과격한 걸.'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체포라니.
그렇다고 여기서도 저항을 하면 진짜 범죄자가 되게 생겼다.
엘프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아무런 반항없이 조용히 있었다.
나는 혹시 몰라 박채린에게 작게 속삭였다.
"야, 우선 따라가자. 반항하지 말고."
다행히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경비대 인원들이 밧줄을 들고 다가올 때 나는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아, 경비대 분들. 짐은 챙겨갈 수 있을까요?"
"짐? 어떤 것 말이냐."
"저기 저 마차요."
내 손가락을 따라 그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흠칫 굳는다.
가까이서 마차의 문양을 확인한 병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물었다.
"혹시… 아르고스 공작가에서 나오신 분들이십니까…?"
아까 윽박지르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
역시 권력이 좋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