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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053. 베론 지역(1)


첫 야영이 지난 뒤 며칠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몬스터를 마주친 적도 없고, 누군가 다투거나 할 일도 없었다. 그저 마차 운전. 그리고 밤에는 두 사람과 후끈한 시간. 덕분에 피로가 좀 쌓이는 것 같았지만, 이세계에 와서 체력이 좋아져서 그런지 어찌어찌 버틸만 했다. 출발했던 첫날과 다르게 요즘엔 마차 내부도 항상 조용했다. 매일 밤마다 불침번을 서는 박채린과, 나와 뜨거운 관계를 갖느라 늦게까지 깨어있는 최유나와 이예지. 이들이 항상 낮에 자는 탓이었다. '하은이야 원래 조용한 성격이고.' 그나마 최유나와 이예지 이 둘도 잠이 안 올 때면 운전석으로 나와서 내 말동무를 해주었다. 그렇게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을 지낸 지 일주일 째. "야, 마지막인데 좀 달릴까?" "에이, 됐어요. 어차피 다 왔는데 뭘 또 달립니까." 그렇다. 이제야 우리의 목표로 했던 베론 지역에 도착했다. '서쪽 공동묘지 쪽과 가까운 마을까진 몇 시간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이제 목적지가 진짜 코앞이었다. "그것보다 필립, 우리 도착하면 뭘 먼저 해야 하는지나 알려주세요." "먼저 하긴 뭘 먼저 해. 바로 애플파이에 맥주 한잔 마셔야지." 전에 설명할 때부터 그러더니 참 일관된 녀석이다. 대체 그놈의 애플파이가 뭐라고. "뭐, 정보수집 같은 거 안 해요?" "정보수집? 뭔 놈의 정보수집?"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거나…." 내 말에 필립이 피식 웃는다. "흑마법사들한테 우리 왔어요 하고 소문낼 일 있어?" "네?" 잠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반문하자 필립이 우쭐하는 듯한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애송이들이란… 생각해봐. 흑마법사들이 숨어있다면 어디 숨어있겠어." "글쎄요…? 땅굴?" 예전에 필립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해봤지만, 그는 콧웃음을 쳤다. "걔네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땅굴에서 뭐 흙 파먹어?" "아니 저번에 말할 때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진짜 그러겠냐. 그리고 땅굴 파서 살아도 어쨌든 생필품이든 뭐든 사러 마을에는 나와야 할 거 아니야. 하다못해 연락책이라도 있겠지."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녀석이 다시금 말을 잇는다. "뭐, 그조차 없을 수도 있지. 걔네들이 진짜 땅굴 파서 어디 수렵 생활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어쨌든 마을에 흑마법사의 귀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야지. 우리가 흑마법사를 퇴치하러 왔다. 그런 소리가 걔네 귀에 들어가면 어쩔 거 같아. 어서오세요하면서 환영을 할까?" "…도망가려나요?" "도망만 가면 다행이지. 마을에서 자고 있는데 밤에 습격이라도 하면 어쩔 거야. 마을에서도 불침번 서게? 아니, 애초에 그렇게 불리하게 싸울 필요가 있어?" 평소에 한없이 멍청해 보이다가도 이럴 때면 녀석의 말에 많은 걸 깨닫는다. S급 모험가라는 칭호를 딱지 쳐서 얻은 건 아닌지, 확실히 녀석의 생각은 나보다 깊었다. '확실히 먼저 정체를 드러내서 선공을 뺏길 필요는 없겠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녀석의 말에 수긍하며, 또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러면 공동묘지는 내일 가요?" "그래. 어차피 마을에 도착하면 저녁일 거 아니야. 푹 쉬고 공동묘지는 내일 낮에 가면 되지. 괜히 마기가 강해지는 밤에 갈 필요 있냐." 필립의 말은 분명 전부 정론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믿음이 안 가는지… 역시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중요한 거 같다. "그러면 내일 낮에 간다 치고… 몇 시쯤 출발할까요?" "푹 쉬고 오후에나 출발하자. 어차피 마차 타면 두어 시간 밖에 안 걸리잖아." 나야 좋았다.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으니. 하지만 걸리는 인물이 있었다. "음… 그러면 채린이가 고생이겠네요." "용사? 걔가 왜?" "밤낮 바꿔야 하잖아요." "뭐 그 정도 가지고. 정 안되면 안 자고 가면 되지. 사람은 하루이틀 안 잔다고 안 죽어." 자기 일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필립 녀석. 그 뻔뻔한 모습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뒤늦게 반문한다. "…그러면 반쯤 죽지 않나요?" "어쨌든 죽진 않잖아." 그러더니 혼자 낄낄거린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에휴, 이러니까 미움을 받지.' 나야 이런 필립의 성격을 받아줄 수 있다. 군대에서 워낙 이상한 놈들을 많이 봤던 탓에, 이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전부 나처럼 이해심이 넓은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아직까지 박채린은 필립을 꺼린다. 하은도 슬쩍슬쩍 피하는 게 보이고. '최유나야 워낙 사람이 착하니까 무시는 안 하지만, 그래도 딱히 필립을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고.' 그러다 보니 필립이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나랑 이예지 정도뿐이었다. 언젠가 메르헬까지 들먹이면서 녀석의 말투를 교정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기야, 이미 사십 년 넘게 지녔던 습관이 한순간에 바뀔 리가. 결국 나도 이젠 포기 상태였다. '내가 왕따 당하나, 지가 왕따 당하지.' 그나마 이렇게 같이 수다 떨며 놀아주는 게 내 최선이었다. "야, 야. 강정우. 저기 보이냐?"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한눈에 담기지 않을 만큼 넓은 지역에 나무들이 잔뜩 보인다. 저번에 고블린을 만났던 지피스 숲이 떠오를 만큼 넓은 지역이었다. "저기 숲이요?" 또 몬스터 서식지인가 하고 물었지만, 녀석의 발언은 의외였다. "아니, 숲이 아니라 과수원. 저기가 바로 베론 지역의 자랑인 사과 과수원이지." 필립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언젠가 지구에 있을 때, 미국 옥수수밭에서 길을 잃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때만 해도 그만큼 넓구나 하고 말았는데…. '저게 전부 과수원이라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 나무들. 녀석이 괜히 특산물로 사과가 유명하다고 한 게 아니었다. '전세계 사람들이 먹는 사과를 이곳에서 생산하나…?' 그런 생각을 지닌 채, 우리의 마차는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 목적지였던 마을이 보인다. 앞으로 한 십 분이면 도착할 듯싶다. 바로 마을로 들어가기보단, 잠깐 일행들과 대화를 나눠보기로 한다. 갓길에 마차를 세우자 안쪽에서 이예지가 하품을 하며 나왔다. "흐아암… 이제 도착한 거야?" "바로 앞이야. 우선 안에 있는 사람들 깨워봐." "채린 언니도?" "응." 아무래도 아까 필립한테 들었던 말이 신경 쓰인다. 흑마법사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줘야겠다. 내가 모두를 모아 그 이야기를 하자, 박채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째려본다. "그 얘기 하려고 깨운 거야? 아니, 애초에 마을에서 우리 흑마법사 잡으러 왔어요라고 말할만한 멍청이가 있어?" 그러고선 아차 싶은지 살짝 이예지를 쳐다보는 박채린. 그 눈빛에 이예지가 볼을 부풀렸다. "치, 아무리 나라도 그러진 않거든?" "미안해, 예지야. 나도 모르게…." 둘의 대화를 듣다보니 괜스레 찔린다. '나는 물어보고 다니려 했는데….' 그러나 굳이 티낼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아 그리고 박채린. 너도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해." 내 말에 박채린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아직 날이 밝잖아. 좀 더 자도 되는 거 아니야?" 당당하게 수면 시간을 요구하는 그녀. 사실 그녀는 그럴 만도 했다. 게을러서 저러는 것도 아니고 매일 밤 불침번을 대신해서 선 탓에 피곤해 하는 것이니.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내일 낮에 공동묘지로 출발할 거야. 이따 밤에 자려면 슬슬 일어나." "…낮에? 몇 시에?" "점심 먹고 오후 두 시쯤?" 지금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앞으로 21시간 후 공동묘지로 출발한다는 말에 박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을에서 며칠 쉬면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닌가? 그냥 마을에서 푹 쉬어도 되려나?' 생각해보니 이 임무는 딱히 기간제한도 없다. 게다가 예상 날짜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으니, 며칠 쉬어도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내가 슬쩍 필립에게 말해보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드디어 좀 모험가다워졌구나, 애송이." "…이게요?" "그래. 급한 일도 아닌데 사람이 쉬면서 해야지. 그런데 음… 여기선 빨리 처리하자. 내일 바로 가는 게 좋을 거 같다." 필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안.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엥? 왜요?" "여기서 제국 수도가 가까운 거 알지?" 이곳에서 수도까지는 마차를 타고 3일 거리. 절대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며칠간 매일 운전만 한 탓인지 거리 감각이 이상하다. "그…렇죠?" "기왕 쉴 거면 얼른 끝내고 수도에서 쉬는 게 좋지 않겠냐. 마침 건국제도 얼마 안 남았으니 후딱 끝내고 수도나 가자." 웬일로 성실한가 했더니, 역시 녀석다웠다. 그래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건국제. 메르헬의 교육시간에 배웠던 행사로, 말 그대로 제국이 건국된 날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지구로 따지자면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과 비슷했는데, 그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무려 한 달 전부터 축제 분위기라고. '그런 면에서는 크리스마스랑 비슷하려나?' 아무튼 제국에서 가장 큰 축제였고, 메르헬 역시 꽤 중요하게 다뤘기 때문에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보자… 건국제가 앞으로 딱 한 달 뒤였나?' 괜히 필립이 빨리 끝내고 가자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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