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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041. 소피아(3)


새벽에 작은 헤프닝이 지나고, 잠깐 숙소에 가서 눈을 붙였다. 소피아가 깨워준 덕분에 늦진 않았지만…. '와, 미친 듯이 졸리네.' 오늘부터 운전해야 하는데, 졸음운전으로 사고 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안 되겠다. 이따 시녀장에게 각성 마법이라도 부탁해야겠다. 아침마저 거르고 소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더니, 여러 사람들이 보인다. 우릴 가르쳤던 인물들과, 용사파티원들까지 전부. 아무래도 내가 가장 늦었나 보다. 대현자와 제이드후작, 성녀는 각자 가르쳤던 인원들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반면에 필립 놈은, "메르헬씨, 그러면 다음번에…." 자기가 가르치던 이예지는 내팽겨둔 채, 시녀장에게 말 붙이기 바빠 보인다. 덕분에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이예지가, 뒤늦게 날 보더니 뛰어왔다. "오빠!" "응. 오래 기다렸어?" "아니, 오래 기다린 건 아닌데… 그냥 다 같이 모여서 아침 먹었어. 오빠는 왜 안 왔어?"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나는 이예지에게 이유를 말하면서 필립을 째려보았다. 녀석은 시녀장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래? 설마 뭐가 느껴지나?' 만화나 소설에서 나오던 살기 같은 걸 진짜 느낀 걸까. 꽤 신기한 반응이다. "예지야. 다 같이 먹었다면, 대현자님이나 후작님, 성녀님도 같이 드신 거야?" "응. 마지막이라고 다 같이 먹었는데… 좀 불편했어. 뭐 먹으려고만 하면 리나가 뒤에서 자꾸 뭐라고 해서…." "리나? 시녀? 뭐라고 했는데?" "나이프는 이렇게 쥐어라. 포크는 저렇게 쥐어라. 자꾸 이상한 거 간섭했어. 하은이는 자기 마음대로 먹는데 뭐라고 한마디도 안 하던데." 아무래도 식사 예절에 관한 얘기였나보다. 살짝 아쉽다. 그동안 배워왔던 예절 교육의 성과를 보일 기회였는데. "별다른 얘기는 없었어?" "응… 앞으로 어디 간다고 말하던데, 잘 모르겠어." 저건 나중에 필립한테 들어야겠다. 한창 이예지와 수다 떨고 있으니, 성녀가 모인 인원들의 가운데로 나섰다. "형제자매님들. 잠깐만 절 봐주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을 모은 성녀는, 갑자기 훈화 말씀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이곳에 소환되신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엘렌께 처음 신탁을 받은 지는 벌써 두 달이 흘렀고요. 처음에 신탁을 받았을 때는…." 그래. 이런 게 빠지면 섭섭하지. 여태 교육을 해줬는데, 성대한 파티는 못 하더라도 각자 한마디씩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살짝 의외인 건, 처음 순서가 대현자가 아니라 성녀라는 점이랄까. 성녀가 하는 말은 별 내용이 없었다. 그냥 자기가 이렇게 노력했고, 너희도 노력했다. 그러니 다 잘될 거다. 그렇게 마지막 기도까지 마치고 성녀가 빠지니, 다음 순서는 대현자였다. "처음에는 에이프릴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여러분이 이렇게나 훌륭하게 성장할 줄은…." 순간 '에이프릴'이 누군가 했지만, 눈치껏 성녀라는 걸 깨달았다. 저번에 성녀도 대현자를 '아르고스'라고 부르더니, 둘이 꽤 친한 거 같다. '그건 그렇고, 대현자 말 잘하네?' 미리 준비해왔는지, 어울리지 않게 말을 잘한다. 전에 날 가르칠 때를 생각하면 횡설수설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목소리도 꽤 좋았다. 대현자 역시 별 내용 없이 훈화 말씀을 끝냈다. 그 다음으로 나선 건 제이드 후작이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오늘 처음 본 인물도 있지만, 가진 능력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훤히 보이는구나. 앞으로도 항상 정진해라." 그는 천천히 우리를 둘러보더니, 거기까지만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끝이야?' 성녀나 대현자가 몇 분씩 잡아먹던 것과 무척이나 대조된다. 물론 무뚝뚝한 제이드 후작과 어울리긴 하지만… 저래도 되나 싶다. 너무 빠르게 끝난 탓일까, 다음 순서인 필립 역시 순간 얼타며 제이드 후작을 빤히 쳐다봤다. 제이드 후작이 눈짓을 하고 나서야, 필립은 뒤늦게 앞으로 나왔다. "크흠, 앞으로 함께할 필립이다. 앞에서 다른 분들이 듣기 좋은 말을 늘여놓았으니, 나는 현실적인 말을 해주겠다." 필립 녀석도 미리 준비해왔는지, 꽤 멋드러진 목소리였다. '아닌가? 원래 필립이 저런 건 잘하긴 했지?' 내가 속으로 점수를 매기고 있을 때, 녀석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3년. 너희는 그동안 엘렌교와 제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는 너희도 납득하겠지. 물론 공짜로 일을 시킨다는 건 아니다. 공작가에서 매달 지원금이 나올 거고, 3년 후 결과를 보고…." 꽤 직설적인 내용. 다른 교육자들은 딴청을 피우는 것이, 아무래도 미리 말이 맞춘 거 같다. '하긴, 저런 말을 귀족이나 성녀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 모양새가 안 살 거 아닌가. 그렇다고 얘기를 안해줄 수도 없고. 결국 필립이 도맡아 설명하기로 했나 보다. 그건 그렇고, 3년이면 생각보다 짧다. '한 10년은 묶여있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공작가에서 우리에게 제공해준다는 지원금도 상당히 큰 액수였다. "…까지다. 아, 참고로 난 앞으로 6개월간 너희를 따라다닐 예정이니, 그동안 잘 부탁한다." 거기까지 말한 필립이 자리로 돌아간다. 혹시나 메르헬도 한마디 하나 싶었지만…. "그러면 다들 앞으로 고생하게나." 대현자를 비롯한, 제이드 후작과 성녀가 자리를 비웠다. 남은 사람은 이제 우리 용사파티와 필립, 그리고 시녀들뿐이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을 때, "다들 따라오시지요. 마차로 이동하며 자세한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날 가르쳤던 메르헬이 앞으로 나왔다. *** 필립과 용사파티 인원들이 메르헬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는 그 시각. 한참 뒷쪽에서 그들을 따라 걸어가는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다들 기분이 어때?" "나는 좀 아쉽네. 그래도 최유나님 맡으면서 편했거든. 따로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었고." "와, 부럽다. 난 이예지님 맡으면서 매일매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지? 첫날부터 길 잃으셔서 한참을…." 이예지를 담당하던 시녀 리나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열심히 자기 얘기를 한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걱정되긴 해. 알다시피 예지님이 워낙 순수하셔서 밖에서 위험하진 않을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이는 게, 이예지를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 리나의 말이 끝나자, 하은을 담당하던 '마리'가 대화를 이었다. "나는 뭐, 신경 쓸 게 거의 없었어. 아니, 사실 한 달 동안 얘기도 몇 번 못 나눠봤어. 그래서 아쉽고 말고, 아무 감정이 안 드네. 그런데… 소피아~ 넌 아쉬워서 어떡해~?" 조용히 있던 소피아에게 불똥이 튀었다. 아니, 불똥이 튀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었다. 사실 애초부터, 시녀들이 이 이야기를 꺼낸 목적이 소피아를 겨냥한 거였으니까. 시녀와 손님의 사랑이라니.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란 말인가. 공작가에서 일하는 시녀들이라면 누구나 꿈꿔왔던, 그런 로맨스였다. 물론 밤시중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매일 같은 시녀만 부른다는 점이 심상치 않다. 처음엔 질투하며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던 인원도 있었지만, 소피아가 워낙 시녀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터라 그런 여론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특히 리나를 통해 강정우가 이예지를 거절했던 얘기가 퍼지면서, 시녀들 사이에서 소피아와 강정우는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나야 뭐…." 소피아가 입을 열자, 주변에 시녀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소피아가 멋쩍게 웃었다. "잘 모르겠네…?" "에엑?" "뭐야, 그게!" 주변 시녀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실제로 소피아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처음엔 언감생심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한낱 시녀였고, 상대는 신탁의 대상자였다. 주변에선 '우와아~.'하면서 띄워줬지만, 그녀는 현실을 알았다. 자신과 강정우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의 벽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우님은 한낱 평민으로 남지 않으실 거야.' 소피아는 강정우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예전에 강정우가 최유나와 화해했다며, 저녁을 치우러 오지 말라는 말에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둘이 관계를 가졌다? 관계를 가진다? 이런 건 시녀인 자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강정우가 앞으로 자신을 피할 걸 걱정했지만, -그러면…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만 늦게 올래? 그 말을 듣고 남은 우려마저 전부 사르르 사라졌었다. 자신은 그걸로 족했다. 한낱 시녀인 자신은, 신탁의 대상자를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잠깐, 소피아? 이쪽으로 와보시겠습니까. 메르헬에게 불리기 전까지만 해도. 마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녀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공작가의 시녀장이란, 원래 평민이 할 수 없는 직책이었다. 현재 시녀장인 메르헬 역시 몰락한 귀족의 영애로, 푸른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강정우님 덕분인 거 같군요. 소피아, 괜찮다면 차기 시녀장이 되어보겠습니까? 소피아는 강정우로 인해, 새로운 미래가 열렸다. 원래라면 닿을 수 없는 신분의 거리. 그게 한걸음 좁아졌다. 그래서 소피아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정우님,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저도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이제 떠날 강정우를, 그저 남몰래 응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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