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018. 불편한 진실(1)
필립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은 뒤, 생각이 많아졌다.
지구에서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나, 여기서 알게 된 문화나 상식을 대입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우선 이세계에는 인간종족의 나라가 단 하나뿐이다.
루도 제국.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황제 한 명이 모든 곳을 통치할 수 없어, 귀족들이 각자 영지를 다스리고 일정 세금을 황제에게 보내는 봉건제 사회를 차용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도 대현자 아니, 아르고스 공작의 공작령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소환된 이후로 꽤 많은 혜택을 받았다.
각자 배정된 방은 지구에서 호텔 뺨칠 정도로 좋은 방이었고, 모두에게 한 명씩 배정된 시녀들과 뛰어난 강사들까지.
아, 음식도 항상 푸짐하게 나왔다.
그런데 또 이게 극진한 대우냐 하면, 곰곰이 생각했을 때 그건 또 아니다.
우선 훈련시설이 열악하다.
진짜 신경을 써줬더라면, 하다못해 훈련장마다 다쳤을 때 치료해줄 사제를 한 명씩 대비해둬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번에 날 치료해준 것도 최유나였고.'
게다가 또 중요한 건 황제였다.
벌써 이곳에 소환된 지 2주가 넘었는데도, 아직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인물들이었다면, 당연히 황제나 교황 같은 인물들이 우릴 만나러 와야 하지 않았을까.
내 의문은 다음날 오전 교육 때 해소되었다.
"음… 최대한 정치적인 부분과 종교적인 부분은 교육 중에 피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메르헬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엘렌'이라는 신의 신탁을 받은 용사들이라는 건 맞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탁이 틀릴 때도 많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세계는 신성력이 있고 엘렌이라는 신의 존재가 확실함에도, 엘렌교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마치 믿는 사람만 믿는다는 느낌이랄까.
"또 엘렌교는 두 개의 파벌로 나뉘고 있습니다. 교황파와 성녀파죠. 이번에 신탁을 받은 게 성녀이신데, 교황파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렌교에서도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의견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한 귀로 흘리는 거죠.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런데 대현자 아니, 아르고스 공작님은 왜 저희를…?"
"아르고스 공작님께선 성녀님과 친분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따로 성녀님의 부탁을 듣고 용사님들을 위해 제이드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하셨죠. 그 외에 필립님은. 제가 여러분의 강사를 모집할 때 지원해주신 분입니다."
아, 그렇게 필립이 시녀장을 알게 된 거구나.
혼자 수긍을 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나 아르고스 공작님, 제이드 후작님 모두 여러분께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듣기로 여러분의 성장이 무척 빠르니, 조금이나마 인간 측에 전력이 되길 원하는 것뿐이죠."
문득 필립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어차피 제국에서도 너희한테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의 말대로 우리는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좋은데?'
솔직히 알게 모르게 부담감이 조금 있었다.
주변에서는 우리를 떠받들어주고, 자꾸 마왕을 잡을 용사들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었다.
게다가 필립의 말을 듣고 '마족과 마왕이 그렇게 강한데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
그날 이후로 며칠이 더 지났다.
필립은 오후 교육 때마다 가르쳐주는 것 없이 자기 무용담만 얘기했다.
메르헬에게 진실을 듣기 전이었더라면 마음이 불편했을 거 같은데, 마음가짐을 고쳐먹고 나니 이렇게 편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필립의 과거 얘기를 듣고 있자면 배우는 것도 분명 있었다.
오전 교육 때는 배우지 못할 생생한 경험담이었다.
똑같은 내용이더라도 '이런 게 있습니다'라는 말과 '내가 이런 걸 겪었다'라는 말의 차이는 컸다.
와 닿는 게 다르달까.
그렇지만 좋은 시간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내일부터면 난 또 다른 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마지막 교육이 끝날 때 내가 먼저 필립에게 인사를 했다.
"필립,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그동안 재밌었어요."
첫날에 호칭을 필립씨에서 필립으로 강등시킨 이후로 항상 이름만 불렀다.
나중 돼서는 친근함의 표시였는데, 이제 마지막이라니 살짝 아쉬웠다.
필립은 내 말을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뭔 소리냐."
"저 내일부터는 또 다른 교육 들으러 가잖아요."
설마 몰랐던 걸까.
그러나 필립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아니, 그건 아는데 왜 영영 못 볼 사람처럼 얘기해? 너 그거 몰라?"
"어떤 거요?"
"이 교육이 다 끝나면 내가 너희랑 같이 다닌다는 거."
"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슬쩍 이예지를 쳐다보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겨우 한 달 가르친 애송이들만 풀어놓을 줄 알았어?"
"…."
솔직히 그럴 줄 알았다.
보통 만화나 소설을 보면, 교육만 끝내고 알아서 하라고 풀어놓지 않던가.
아니면 따로 NPC 같은 사람이 퀘스트를 주던가.
하다못해 안내인이 붙는다 해도 비전투직이 붙지, 이렇게 우리보다 강한 사람이 붙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다.
내 표정에 필립이 킬킬 웃어댔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열심히 먹여주고 가르쳐놨더니 객사라도 하면 어떡해? 공작 각하나 제이드 후작, 성녀님은 바빠서 힘들다 해도, 나 같은 백수는 같이 따라 다녀줘야 하지 않겠냐."
"고맙긴 한데… 그래도 돼요?"
"뭐가?"
"당장 떠오르는 게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궁금한 건, 우리 따라다니면 시녀장님은 포기하게요?"
필립을 알게 된 지 벌써 일주일.
그동안 그와 친해지면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었다.
바로… 필립이 어마어마한 쑥맥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낮에 메르헬에게 개인적인 걸 여러 가지 물어봐서 필립에게 알려주는 형식으로 도와줬는데, 대체 무얼 하는지 둘 사이는 지진 부진하기만 했다.
그래서 언젠가 오전 교육이 끝나는 시간에 필립에게 날 데리러 오라 시켜서 둘이 만난 장면을 봤는데….
'아하하, 날씨가 참 좋죠?'
'네.'
'그… 저… 정우 녀석을 데리러 왔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그럼, 이만…!'
그러고 내 손을 이끌고 도망 나온 필립의 얼굴은 시뻘겠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최대한 둘을 도와주려고 이것저것 노력했었는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둘 사이는 그대로 끝 아닌가.
결국 현실을 깨닫고 포기하는 건가.
필립과 친해지며, 둘이 잘 되길 바랬는데 아쉬웠다.
그러나 그는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짜식아. 메르헬씨가 직접 부탁하신 거야. 너희 좀 신경 써달라고."
꽤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괜히 태클을 걸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홀랑 알겠다 하면 어떡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몰라요?"
내 말에 그의 눈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 말이 있어…? 진짜…?"
아, 여기 세계에는 없는 말인가.
그래도 지금 내빼는 것도 웃긴 상황이었다.
"당연하죠. 사람이 자꾸 얼굴도 보고 해야 정이 들고 마음이 가는 거지. 부탁 한마디에 알겠다고 멀리 떠나버리면 어떻게 마음이 맞아요."
"쓰읍, 그러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가서 안 되겠다고 할까?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는 모습이었다.
"말이 돼요? 그러면 필립한테 정이 다 떨어질 텐데, 그다음 어떻게 같이 있게요."
"그럼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
아까 우쭐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한다.
에휴, 어쩌나.
내가 도와줘야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뭘 어떡해요. 이렇게 된 거 우선 저희랑 같이 다녀야죠.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 시녀장님이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당장 호감도 쌓아두면 나중에 돌아와서 괜찮겠죠."
"그럴까…?"
"대신 저희 교육 마치기 전에 둘이 밥이라도 한 끼 해요. 우리에 대해서 할 말 있다고 시간 좀 내달라고 하면서."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알겠어. 진짜 고맙다. 역시 너한테 상담하길 잘했던 거 같아."
필립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린다.
'사실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닌데.'
나 역시 그날 이후 아직까지도 최유나랑 화해를 못 했다.
솔직히 억울하기도 하다.
뭐 만날 수라도 있어야 무슨 대화라도 나누지.
우연히 마주치면 도망가버리고, 따로 만날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내일 오후부터, 성녀에게 최유나와 같이 교육을 받게 된다는 거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필립. 성녀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응? 아직 너 성녀님을 못 뵈었어? 인자하고 자애로우신 분이지."
인자하고 자애롭다라….
나도 모르게 그런 외모를 떠올려 버렸다.
가슴도 크고 아리따운… 응?
최유나랑 비슷한 느낌 아닌가?
'뭐 어때. 비슷한 느낌이면 더 좋지.'
칙칙한 남자들에게만 교육을 받다가, 성녀님께 교육받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런 날 보면서 필립이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이세계에서의 성녀는, 나이로나 외모로나 대현자 또래의 할머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