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004. 교육(1)
"…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작은 소음이 반복적으로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잠기운이 날 너무 무겁게 짓누른다.
"기사님,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난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누군지 깨달았다.
'아, 소피아구나.'
그녀의 얼굴을 보자니 뜨거웠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시녀 복으로 가려진 그녀의 음란한 몸도….
"앗, 기사님…!"
소피아가 당황한 듯 몸을 휙 돌렸다.
내게 뒤통수를 보인 그녀의 귀가 불그스름하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숙였다가, 내가 알몸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소피아, 저 잠깐 옷 좀…."
아무리 몸을 섞은 사이라 해도, 아침부터 알몸으로 있는 건 좀 부끄러웠다.
특히나 방금 일어난 탓에 하물이 뻣뻣한 게 느껴져 더 그렇다.
"그… 아침은 차려뒀으니 드시고, 7시 30분까지 나갈 준비 해주세요. 그때 다시 올게요!"
당황해하며 속사포처럼 말하는 소피아.
그러곤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보다가, 뒤늦게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6시 30분.
"후아암, 어제 몇 시에 잤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기껏 해봐야 서너 시간도 못 잔 거 같은데….
'소피아는 대체 언제 일어난 거지?'
그녀도 나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을 터.
그런데 내가 꿈나라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동안 소피아는 이미 시녀 복으로 갈아입고 식사까지 차려주었다.
새삼스레 시녀라는 직업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기지개를 한번 켜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힘을 좀 써서 그런지, 배가 살짝 고프다.
킁킁-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에서 나는 냄새였다.
'내가 이걸 차리는 동안에도 계속 자고 있었다고?'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하기야, 어제 오죽 일이 많았어야지.
차에 치이고, 이세계로 넘어오고, 밤새 섹스까지….
사정도 세 번이나 했다.
안 피곤하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아, 꿉꿉해. 빨리 먹고 샤워부터 해야겠다.'
씻지도 않고 잠든 탓에 몸이 끈적거리는 기분이다.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어제 저녁 식사 때만큼은 아니지만, 아침으로 먹기엔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맛도 썩 훌륭해, 밥이 없다는 점만 빼면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샤워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 시간이 살짝 남았다.
테이블에 앉아서 아까 먹다 남은 빵을 주워 먹으며 시간을 죽인다.
'오늘부터 교육받는다고 했던가? 무슨 교육이지?'
이세계에서 넘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교육시켜 준다고 듣긴 했는데,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들은 바가 없었다.
마왕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는 걸 생각하면 무슨 군사 훈련이라도 받나 싶을 텐데, 내 직업을 떠올리자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자 소피아가 방에 왔다.
"기사님. 출발해도 될까요?"
"네. 갑시다!"
직접 겪어보면 알 일이었다.
소피아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선다.
막 복도를 나섰을 때, 바로 옆 방의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 여성이 나오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짙은 갈색 머리카락.
딱히 화장도 안 한 거 같은데 무척이나 예쁜 얼굴과 선해 보이는 인상.
특히나 남자라면 절로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커다란 가슴까지.
'최유나…였던가?'
어제 이세계로 같이 소환된, 용사파티 인원이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나보다 세 살 연상에 직업은 [사제]를 골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볼 사이다 보니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강정우씨… 맞죠?"
이런 미인이 내 이름을 기억해준다니 영광이다.
그녀는 이세계로 넘어온 첫날이라 잠을 잘 자지 못했는지, 어제 봤을 때보다 한층 피곤해 보였다.
"그쪽은 최유나씨 맞죠?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나 봐요."
"네, 어제…."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내 방과 자신의 방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러더니 눈이 점점 동그랗게 커진다.
"어어…?!"
이내 그녀의 얼굴은 확 붉어졌다.
"응? 왜 그러세요?"
내 질문에 최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이만…!"
고개를 숙인 채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최유나의 뒷모습을 보자니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마치 오늘 아침에 내 알몸을 보곤 자리를 황급히 비웠던 소피아의 뒷모습을 보는듯한….
'설마?'
최유나가 나온 방은 내 바로 옆방.
그리고 잠을 설친듯한 그녀의 모습까지 생각해보면….
'소피아랑 하는 소리가 들렸나…?'
***
최유나와 헤어진 뒤, 소피아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제 와본 적 있던 응접실이었다.
이세계에 처음 소환됐을 때 대현자와 대화를 나눴던 곳.
그곳엔 미리 와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시 뵙겠습니다. 기사님의 오전 교육을 맡게 된 시녀장 '메르헬 시오니아'입니다. 편하게 '메르헬'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제 방으로 안내해줬던 시녀장이었다.
고아한 분위기와 정갈한 외모의 중년 여성.
반듯한 자세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나 역시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메르헬…님?"
편하게 부르라 했지만, 나보다 한참 연상에게 이름으로만 부르긴 힘들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소피아는 이만 일하러 가보세요."
그녀의 말에 소피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에 메르헬과 둘이 남은 상황.
우선 그녀의 말대로 의자에 앉는다.
내가 아침에 했던 예상과 달라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어디 훈련장이나 그런 곳으로 끌려갈 줄 알았는데, 시녀장이라니?
게다가 다른 파티 인원은 아무도 안 보인다.
"교육하기에 앞서, 기사님께 먼저 사죄 말씀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메르헬의 갑작스러운 사과.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제 대현자님께 들으셨겠지만, 용사파티 분들은 신탁에 의해 소환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신탁에 '기사'라는 직업이 필요하다고만 했을 뿐. 어떤 부분에서, 어째서 '기사'라는 직업이 필요한지 대현자님도 모르십니다. 그냥 마부나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따로 고용하면 될 일인데 말이죠."
그녀는 말하면서도 미안한지, 뒷말을 살짝 흐렸다.
그러나 난 크게 상관없었다.
사실 나도 어제부터 계속 의문이 들었던 부분이었으니까.
마왕을 잡는데 '운전기사'가 대체 왜 필요한지 말이다.
메르헬은 다시금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나 신탁은 어디까지나 신의 뜻. 저희 같은 인간이 신의 뜻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따라서 대현자님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용사님은 검술, 마법사님은 마법, 사제님은 성법, 궁수님은 궁술을 가르치면 되는데, 기사님껜 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저렇게 말하니 나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굳이 생각해본다면… 말 타는 법이나 마차 끄는 법?
그러나 메르헬의 이어진 설명에 바로 반박되었다.
"승마를 전문적으로 가르친다고 하기엔, 기사님이 하는 역할은 마차를 끄는 일이고. 그렇다고 마차를 끄는 일을 가르치기엔 막상 가르칠 게 얼마 없었습니다. 겨우 며칠이면 익숙해질 일이니까요. 고민 끝에 대현자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해 목이 탔는지 옆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기사님께는 최대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기로요."
"여러 가지요?"
"네. 기사님께서는 오전엔 저에게 잡다한 지식들을, 오후엔 다른 분들과 함께 전문적인 능력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그녀의 말을 다 듣자 이해가 갔다.
대한민국 교육과정을 대입하자면 이런 거였다.
용사, 마법사 같은 직업은 어릴 때부터 진로가 확실하게 정해진 예체능.
집중적으로 필요한 분야를 배우면 된다.
반면에 '기사'는 미래에 무엇을 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평범한 인문계생처럼 최대한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운다.
대학진학엔 아무 필요 없는 체육이나 미술, 음악 같은 예체능까지도.
그렇게 우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운 뒤,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린다.
내가 알기로 이런 교육에도 분명 장점은 있다.
전혀 상관없을 거로 생각했던 분야들끼리 이어지며 시너지를 낼 수도 있는 거고, 나중에 진로를 정하더라도 손쉽게 틀 수 있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러면 오후엔 누구한테 배우는 건가요?"
"이번 주엔 마법사님과 함께 대현자 '아르고스' 공작님께 교육받으실 겁니다. 둘째 주에는 소드 마스터 '제이드' 후작님께…."
잠깐, 잠깐.
뭔가 엄청난 명칭이 나온 거 같은데?
대현자는 어제 봤으니 그렇다 쳐도….
"소드 마스터?"
듣기만 해도 멋진 단어였다.
그 외에도 그녀의 입에서 이어진 '성녀'라던가 'S급 모험가'라는 단어는 남심을 자극한다.
내가 읽었던 소설이나 만화를 생각했을 때, 조금씩 세계관마다 설정이 다를지라도 저런 호칭이 평범한 선생들이 가질만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배운다고?'
두근두근.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러나 내 흥분된 감정은 메르헬의 이어지는 발언에 확 식어버렸다.
"따라서 기사님께서 오늘 제게 배울 것은 '예의범절'입니다."
'예의범절…? 예절…?'
내가 이세계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건 '예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