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하숙집의 어린 주인
“하아…….”
진은 중앙 광장의 벤치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광장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 섹스하고 싶다.”
나신의 여성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눈을 어지럽혔다. 유혹적인 굴곡을 가진 여체를 보자 자연스레 남근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욕구와는 반대로 진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먹음직스러운 뷔페가 이렇게나 장황하게 펼쳐져 있는데, 정작 손을 뻗어 먹을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편식이 심해서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파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으려면 훔쳐먹어야 하는데, 잘못 걸렸다간 장발장같은 꼴이 날 수도 있었기에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성관념이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섹스라는 행위는 여러모로 터부시될 수밖에 없다.
팔레움으로의 여행길에 올랐을 때는 고민도 없이 따먹으면서 다녔는데 말이다. 그때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이제 와 팔레움을 떠날 수는 없었기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이 던전 도시는 진의 집이 될 장소였다.
‘벌써 리네가 그립다…….’
원래라면 리네가 진의 욕구를 받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네는 요즘 많이 바빴다. 특진으로 은 망치까지 단숨에 승급한 것이 소문이 나서 의뢰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좋은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니 그닥 반갑지 않았다.
설마 여기에서 일 때문에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직장인의 비애를 체험하게 될 줄이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리네는 대장장이 일에 심취해서 마냥 좋아하기만 했다.
어쩌겠나. 뒤에서 응원해주는 수밖에.
진은 욕구에서 애써 눈을 돌려 다른 계획을 생각했다. 리네의 승급 이후 진은 홀로 잡다한 의뢰를 수행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푼돈이나마 돈이 모였다.
이제 싸구려 여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곳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물론 내 집 마련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곳 집값은 정말 금값이라는 비유가 부족할 정도니까.
팔레움은 던전을 찾아 몰려드는 수많은 모험가들로 득실거리며,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과 소상공인들도 가득하다. 그에 비해 거주 구역은 한정되어 있으니 땅값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집을 장만할 것이다. 이왕이면 큰 집으로. 창고도 있어야 하고, 연구실도 장만해야 하니 말이다. 그곳에서 꿈을 실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 들어 살 곳이나 찾아야지.’
돈 없는 초보 모험가에 불과하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모험가들이 이용하는 환전소 앞의 게시판과는 다르게, 중앙 광장의 게시판은 던전과 무관한 도시의 모든 소식이 모이는 곳이다.
발품을 파는 것도 인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진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결국 게시판에 걸린 공고를 살필 수밖에 없다.
‘리네를 만났을 때도 이런 게시판의 공고 덕분이었지.’
만남의 광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팔레움에는 만남의 게시판이라는 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리네와 같은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은 [부동산]이라는 간판이 달린 게시판을 천천히 살피며 보았다.
[건물 매매], [점포], [월세] 같은 제목의 공고들이 날개의 깃털처럼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오.”
그중에서 진은 [하숙집]이라는 한 공고를 찾았다. 글씨체가 반듯하면서도 동글동글한 게 귀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숙집으로 오세요!]
안녕하세요? 최근 하숙집을 운영하게 된 나리라고 합니다.
하숙을 원하는 분들을 모집하기 위해 이렇게 공고를 붙이게 되었어요!
장소는 남부 대로에 위치한 [오클라마]라는 간판을 보고 찾아와 주시면 되세요.
방이 적어 한 분만 모집하니 빠르게 찾아와 주세요!
“흠…….”
하숙집이라고 하면 진에게는 전생의 고시원 같은 곳이 떠올랐다. 비좁은 방과 간단한 백반을 아침밥으로 내어주는 그런 곳.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팔레움에 그런 곳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방이 하나뿐이라고 하니 비좁으리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여기로 할까?”
방을 둘러본다고 꼭 계약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보고 결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진은 공고에 적힌 [오클라마]라는 간판을 찾아 남부 대로로 향했다.
* * *
간판을 보고 찾아오라는 글귀를 보고 예상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클라마]라는 간판이 걸린 그 건물은 커다란 유리창과 빈 진열대가 늘어서 있는 상가용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서 하숙집이라니. 가게가 망해서 하숙집이라도 운영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방을 하나만 세놓은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진은 잠시 건물 내부를 둘러보다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위층에서 여린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숙집이라길래 아줌마나 할머니가 나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복은 있는 모양이다. 진은 음흉한 미소를 감추며 목소리의 주인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잠시만요~.”
창문 너머로 문을 열어주려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반투명한 흰 원피스만을 걸친 삼색 머리칼의 고양이 수인.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매력적인 굴곡을 그리는 몸매가 그녀가 엄연한 성인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그녀는 청초하고 풋풋한 분위기의 미소로 진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하숙집 공고를 보고 왔습니다. 나리 씨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방을 보여드릴게요.”
나리는 진을 이끌며 계단으로 향했다.
창밖에서 새어 나오는 햇빛이 그녀의 원피스에 내려앉자, 반투명하던 원단이 허공으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몸매만 어렴풋하게 비추던 원피스는 이젠 뽀얀 살결마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모험가를 하고 있는 진이라고 합니다. 그냥 진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나리 아코모리라고 해요. 편하게 나리라고 불러주세요.”
“동방 사람이신가요?”
“부모님은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팔레움으로 오셔서 저는 동방에 가 본 적은 없지만요.”
둘은 통성명을 나누며 계단을 올라 살림을 차려놓은 2층으로 향했다. 1층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지만, 이곳은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걸 나타내듯 나름 단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가 세를 내놓은 방이에요. 한 번 둘러보세요.”
나리가 방문을 열고 권유했다.
“괜찮네요.”
방 안은 깔끔했다. 쓰잘데기 없는 가구 없이 꼭 필요한 물품들로만 채워진 방은 시원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공간이 좁은 것도 아니라서 무엇을 놓아 방을 꾸밀지 자연스레 고민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듭니다. 바로 계약하고 싶네요.”
“정말요?”
“예. 바로 계약을 조율하죠.”
이제 돈 얘기가 오갈 차례였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리는 곧바로 그를 거실로 안내해 손님용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곧바로 차를 끓여왔다. 진은 향긋한 차의 향을 음미하며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월세는 한 달에 은화 두 닢이에요. 금액이 좀 있죠? 그래도 방도 꽤 넓고, 다른 하숙인도 없고, 든든한 아침 식사도 직접 대접해 드릴 테니까 아깝진 않으실 거예요.”
은화 두 닢. 확실히 여관방에 비하면 비싼 액수였지만, 그녀가 읊은 메리트에 비하면 결코 부담스러운 수준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이네요. 여기.”
진은 곧바로 주머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 건넸다. 나리는 은화가 그렇게 좋은지 화사하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이제 한집에서 살게 됐는데 다시 인사를 할까요? 말씀드렸듯 제 이름은 진입니다. 성은 없고, 북부의 폴루스투라 마탑에서 마법을 사사받았던 마법사입니다. 지금은 뛰쳐나와서 모험가 일을 하고 있지요.”
“마, 마법사요?”
지금껏 마탑에 틀어박혀 있느라 체감하기 힘들었는데, 확실히 마법사라는 직군이 희귀하기는 한가 보다. 마법사라는 것을 밝힐 때마다 나오는 격한 리액션에 진은 왠지 모를 자부심을 느꼈다.
“저, 제 이름은 나리 아코모리에요. 팔레움의 카리솔룸 아카데미에서 재학 중인 학생이고요. 과목은 연금술과에요. 소개할만한 건 이 정도…….”
나리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사그라들었다. 마법사라는 직업 때문에 압박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화사한 에너지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마법사가 뭐 별건 가요? 게다가 마탑도 뛰쳐나와서 지금은 한낱 모험가에 불과해요. 그냥 편하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으음, 그런가요? 그럼 진도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축 늘어졌던 귀와 꼬리가 조금은 기운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럼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아까 건물을 보니까 아무래도 가게를 하던 곳 같던데, 지금은 왜 아무것도 없고 하숙집을 운영하니? 그것도 달랑 한 방만.”
“가게요? 원래 여기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연금술 가게였어요. 지금은 장사를 접었지만요.”
“그럼 하숙집은 왜?”
그러자 나리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이 집에 저 혼자 남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때는 아카데미에 막 입학했었던지라 가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어요.”
“아…….”
“그래서 가게를 접었다가, 지금은 돈이 필요해져서 방을 세놓게 된 거예요.”
아무래도 아픈 곳을 들춰버린 모양이다. 숙연해진 분위기에 진은 고개 숙여 사죄했다.
“미안.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벌써 몇 년 전 일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지어 보인 나리의 미소는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