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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33. 세 여자 (5)


“이건 진짜 비쌀 것 같은데...” 야구를 접은 지 10년이나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구 장비의 시세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이런 물건이라면 10년 전에도 4, 50만원은 훌쩍 넘어갈 물건이다 보니 강호로서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가연은 이미 넘긴 물건이니 알아서 하라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근데 야구 장비 쪽은 외국 브랜드가 대세지 않습니까?” 강호가 야구를 할 때만 해도 국산 제품은 싼 값에 쓰는 물건이었지, 품질을 보고 쓰는 물건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제품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잡기는커녕 품질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야구를 그만 두었다고 했었죠? 겨우 10년이지만 이쪽 분야도 기술이 일취월장 했거든요. 사실상 제품의 질 자체는 이제 외국의 브랜드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도 H&H면 나름대로 건실한 기업일 텐데 굳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나요? 야구 시장이라면 그동안 취급해 왔던 제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장이잖아요.” 강시연의 말은 처음 사업의 확장을 위해 야구 시장으로의 진출을 선언했을 때, 직원들도 똑같이 우려했던 사안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성 용품 시장과 남성 시장은 규모 자체가 달라요. 여자들이 다이어트나 운동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낚시나 등산 그리고 운동이나 스포츠 같은 취미를 위해 쓰는 돈에 비하면 그야 말로 푼돈에 불과하거든요.” 한가연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 여자들의 취미생활과 남자들의 취미생활의 분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차분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에 집중하는 편이라면, 남자들의 취미는 대체적으로 활동적인 경향이 강하다. 등산을 제외하면 낚시, 스포츠, 캠핑과도 같은 외부 활동 위주의 취미는 남자들의 전유물과도 같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수집욕구이며, 이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히 장비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취미삼아 즐기거나 이제 막 취미를 시작하는 단계임에도 전문가에 준할 정도로 장비를 맞추려는 남자들의 수집욕구이자 강박관념을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취미에 빠져든 남자들은 사용하는 액수의 단위부터가 다르다. 캠핑 장비만 해도 제대로 구색을 갖추려면 수백은 기본으로 필요하고 낚시도 마찬가지이며 대부분의 스포츠 분야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가연이 남성 스포츠 용품 시장으로 지출하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시장 조사도 다 마쳤고, 이 분야의 장인들을 고용해서 제품 준비도 다 마찬 상황이에요. 이제 세장에 풀기만 하면 되는 단계죠.” 그러면서 살짝 머뭇거리는 것을 보아 마지막 단계에서 무언가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장에 확실하게 진출할 수 있는 임팩트가 필요한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브랜드가 선점하고 있는 시장을 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살짝 놀란 한가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죠. 아무리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도 그것만으로는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 무리가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이 쓰고 있는 브랜드에 익숙해지면 다른 것으로 선뜻 바꾸려 들지 않거든요. 우리는 회사 규모가 작아요. 장기간의 시간을 두고서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시장을 확대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때문에 확실한 카드가 필요한 거죠. 사람들에게 H&H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한방이요. 전 그걸 과거 홈쇼핑 광고를 통해 깨달았어요.” “그 광고 말이죠? 그거.” 그러면서 강시연이 강호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하자 강호가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한가연도 그가 자신의 광고를 보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했다. ‘강호씨도 내 광고를 봤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한가연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살짝 상기되었다. 지금까지 그 광고를 한 번도 부끄럽게 여겨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런 감정이 생기고 보니 살짝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가연의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강시연 정도의 사람이 모를 수가 없다. 상황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시연이 다시 질문을 했다. “그래서 확실한 임팩트를 위해서 절 섭외하려고 했다 이거군요?” “사실은...” 말을 하려다 말고 한가연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은 강시연과 안면을 트는 것으로 만족을 하자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욕심이 생겨난다. 강시연이 알아서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있는데 사업가로서 이 좋은 기회를 외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한가연 나름대로 강시연의 성격을 일부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생각에 일조했다.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하는 스타일.’ 이런 스타일은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상대를 떠보거나 속이는 것도 싫어한다. 그것을 파악한 한가연은 상대의 기분을 맞추거나 떠보기 보다는 오히려 사실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일 순위 후보로 박찬성 선수와 강시연씨를 물망에 올렸어요. 특히 강시연씨 같은 경우에는 광고계에 퍼진 소문을 생각할 때 제대로 광고가 제작된다면 확실한 한 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듣고 있던 오하영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에 대한 강시연의 원칙은 명확하다. 제품이 마음에 들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 주어도 될 만하다 싶은 품질이 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이미지와 상충하지 않는 제품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강시연 스스로 가식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보니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박찬성 선수나 저를 모델로 섭외할 생각이었다면 그에 맞춘 컨셉이나 기획안이라도 있나요?”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에 이번엔 한가연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보통 광고주가 모델 섭외를 할 때에는 대행사를 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광고주가 원하는 이미지와 컨셉이 있기에 대행사는 최대한 광고주의 요구에 맞추어 섭외를 진행하게 된다. 이때, 광고의 컨셉이나 기획안 같은 것은 대외비인 까닭에 섭외 대상에게도 함부로 유출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묻는 다고?’ 강시연이 업계의 불문율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묻는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강시연과는 우연히 만난 자리다. 이런 자리에서 강시연이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서 그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기에도 어렵다. 그러자 드는 생각은 하나다. ‘설마 강시연이 이 광고에 관심이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호재라 할 만 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아직 확실한 컨셉이 정해지지 않았어요. 아니, 못 정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섭외도 아직 확실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지만, 막말로 강시연씨 같은 경우에는 제품을 들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알아서 물건이 팔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뢰도가 높으니까요.” “그에 반해 박찬성 선수는 생각해둔 컨셉이 있다는 말이네요?” “내부적으로 언급된 아이디어가 몇 개 있기는 해요. 그 중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요. 강시연씨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이야기가 편하겠네요. 박찬성 선수와 무명 아마추어의 대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강시연이 슬쩍 강호를 바라보았다. 당시의 영상은 공개되기 무섭게 하루 만에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고, 한 달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는 무려 3천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영상 하나로 광고계에서는 박찬성이 얼마나 큰 화제성을 몰고 올 수 있는 지를 실감했고, 박찬성을 섭외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가연은 박찬성보다 그를 상대한 무명의 아마추어를 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찬성 선수보다 전 이 무명의 아마추어에게 광고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박찬성 선수가 있어야만 광고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한 숨을 내쉬는 모습에 강시연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박찬성을 상대한 남자가 누군지는 알아냈어요?”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며칠 안으로 신상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됐네요.” “네?” “아니에요. 어쨌든, 그 남자를 섭외할 생각은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쵸?”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모습인지라 한가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남자 말이에요. 아마 나중에 정체를 파악하게 되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요. 아마 한 사장님이 생각한 것보다 임팩트가 더 클 수도 있어요.”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장에 같이 있었던 강시연이 묘한 눈빛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실 저희들이 저녁 약속이 있어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대답을 하면서 한가연이 살짝 아쉬운 얼굴을 했다. 큰 기대를 하고 오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오늘 강호를 만나게 되면 그 핑계로 저녁 식사라도 대접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되면 다음을 기약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 아쉬움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강호가 뜻밖의 말을 해 오자 한가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나중에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이런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불감청고소원이라고 했다. 당연히 한가연으로서는 거절할 수도 없었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 언제라도 편할 때 다혜를 통해 연락 주세요.” “지난번에 명함 받은 게 있으니까 그쪽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한가연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업무용 전화에요. 자... 잠시만요.” 그러고는 명함 하나를 꺼내어 뒤쪽에 별도의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서 강호에게 건네었다. “개... 개인 전화에요. 이쪽으로 연락하시면 돼요.” 뭔가 수줍은 듯 명함을 건네는 한가연의 모습에 강호는 조금 어리둥절해 하며 받았는데, 이 모습을 오하영이 심히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강시연이었다. ‘이거, 일이 진짜로 재밌게 흘러가네.’ 강호를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오하영이 등장했다. 그리고 오늘 오하영이 강호에게 확실하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 막 오하영을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위한 떡밥을 뿌리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절묘하게 한가연이라는 여자가 등장했다. 그것도 강호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눈빛을 한 상태로 말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우연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오하영을 꼬실 확률이 더 올라갔다는 게 중요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가연을 향해 질투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는 오하영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라보는 강시연의 눈빛이 뜨겁게 불타 올랐다. 향후, 강호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연인이며, 시스템에 의해 강력한 인연을 끈으로 묶이게 될 세 여자들 간의 첫 만남이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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