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31. 변태의 사랑 방식 (6)
그녀가 내민 서류철을 펼쳐 들고 내용을 보다 말고 강호가 눈을 껌뻑였다.
서류철 안에는 있는 종이의 첫 장에 ‘매니지먼트 계약서’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것이다.
“매니지먼트 계약서에요. 읽어 보고 사인해요.”
별 다른 설명 없이 그걸로 끝이다.
계약서를 살펴보던 강호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손에 들린 것은 흔히 말하는 노예 계약서였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확산되고 연예인들의 인기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연예계에 암처럼 뿌리내렸던 온갖 문제들이 사회현상이 되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노예 계약이나 종신 계약에 대한 말이 터져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아이돌 가수들의 노예 계약 혹은 종신 계약 문제는 이 바닥에서는 꽤나 심각한 문제로, 지금도 중소 기획사에서는 이와 관련한 문제들이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연예인 표준계약서라는 장치가 마련되면서 과거에 비해 여건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표준 계약서라는 것이 법적인 강제성을 띄는 것이 아니다 보니 지금도 많은 중소기획사에서는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곳이 꽤나 많았다.
대역배우로 활동하면서 강호도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연예인들의 수익배분이나 정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주워 들은 것이 없잖아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계약서는 그야말로 노예 계약서의 끝판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을을 착취하는 구조의 계약서였다.
계약서를 대충 살펴본 강호가 잠시 강시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약서를 만들어 내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강호가 아무런 말도 없이 펜을 집어 들었다.
계약 기간은 10년이다.
지난밤 그녀가 당한 일에 비하면 10년이라는 시간은 어찌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강간과 같은 성폭력을 두고 왜 정신적 살인이라고 하겠는가. 평생 동안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기에 그런 말이 붙은 것이다.
강호도 강간이 살인에 버금가는 범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10년이라는 시간은 어찌 보면 죗값을 치르기에는 오히려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그 순간이었다.
“미쳤어요? 당신 계약서 제대로 읽어 보기나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계약서에 진짜 사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가 저번에 뭐라고 했어요? 그렇게 어리숙하게 굴면 호구 잡힌다고 이야기 했어요, 안 했어요?”
사인을 하기 무섭게 그동안 무심하던 표정을 지우고는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강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 융통성도 없고 대체 왜 이렇게 고지식해요?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입바른 소리도 적당히 하고 위로해 주지는 못 할망정. 겨우 이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게 당신이 제게 용서를 구하는 방식이에요? 여기에 사인하는 것이 어제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형벌이라는 생각이라도 한 거예요? 오히려 여기에 사인을 하면 당신과 제 사이가 이대로 영영 끝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속사포처럼 쏘아 붙이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처음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강호다.
강호로서는 그저 이렇게라도 그녀에게 저지른 죗값을 치를 수만 있다면 이까짓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는 행위의 의미를 알게 되자 얼굴이 핼쑥해지고 말았다.
“지난밤의 당신의 모습보다 이 서류에 사인을 한 당신의 지금 모습이 제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는 거 알아요?”
비록 육체적인 행위로 시작된 관계지만 강호는 그녀에게 단순한 육체관계 이상의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상황이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그녀와 자신의 관계에 더 이상 넘지 못할 선을 그어 버린 셈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용서해 달라는 그 말 한 마디가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이 따위 종이 쪼가리에 사인을 받는 것 보다, 그 말 한 마디 해 주기를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강시연의 속마음이 담긴 호된 질책에 강호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져 내렸다.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그녀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본래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면 오히려 그 말을 꺼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강시연도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잘 알기에 오히려 더 몰아붙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다.
만약 두 사람이 평범한 연인 사이였다면 어제의 일을 기점으로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그것은 강시연이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제의 일을 빌미로 그를 강제로 자신의 옆에 붙어 있게 만들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뭐, 비슷한 의도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죄책감이나 자기혐오에 대한 감정이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강시연은 그의 눈에서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고, 지금도 눈빛이나 몸짓에서 그런 감정의 여파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 누구라고 해도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가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은 매우 강렬해서 한 번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깊이 뿌리를 내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눈을 통해 변태적인 기질을 외면하고 혐오해 왔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되살아났던 것처럼, 그것은 평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업보가 되어 버린다.
강시연은 그가 그런 업보를 지닌 채로 자신의 옆에서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을 지금 떨쳐 내지 않는다면 오늘 이후 관계를 가질 때마다 겁탈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기억이 지속되면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 하며 암처럼 그의 마음을 갉아 먹을 것이다.
결국 둘의 관계는 의무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될 테고, 의무적인 관계는 파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코 강시연이 원하는 그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어제의 일을 없었던 일로 해버리면 안 된다.
죄책감을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은 좋다.
그러한 감정이 때론 두 사람의 관계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무감이 되어서도 안 되기에 강시연은 적당한 중심을 잡기 위해 강호의 눈빛과 몸짓의 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고개 들어 봐요.”
그녀의 말에 강호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치다 말고 또 다시 회피해 버린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왜 그래요?”
“죽을죄를 지은 게 사실이니까요.”
목소리에서마저 죄책감이 가득히 묻어나오자 강시연은 더 이상 그를 몰아세우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씨.”
강시연이 나지막이 그를 부르자 아래로 떨어졌던 시선이 다시 올라온다.
그의 눈빛을 마주보며 강시연이 비로소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강호씨한테 전 어떤 사람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강호가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녀는 내게 어떤 사람인가?’
앞서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해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담이 흐릿하게 보이는 듯 했다.
“시연씨는... 제게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달라는 말도 쉽게 할 수가 없었어요.”
강호의 대답에 한 참이나 말이 없던 강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테이블을 돌아 강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손을 뻗어 강호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향해 돌리고는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시 해봐요.”
“미안해요.”
“거봐요. 얼마나 쉬워요.”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강호다.
“시연씨는...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강호의 표정이 또 다시 어두워진다.
아무리 변태 마스터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고 하나, 그런 식으로 겁탈을 당하면 그 어떤 여자라도 괜찮을 리가 없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안 괜찮죠. 그런 식으로 당했는데 보지가 헐어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게요. 지금도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억지로 참고 있는 거라고요.”
당연히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강호가 괜찮냐고 물었던 의미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거 봐요. 팬티도 못 입을 정도라니까요. 여기가 부어서.”
그러면서 다리를 살짝 벌리고는 치마를 걷어 올리는데 강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붉은 색으로 꽤 부어 있는 음부의 모습이 보이는 데 한 눈에 척 보기에도 상당히 아파 보인다.
“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서 뭐라고 하게요? 아는 사람에게 겁탈당해서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 왔다고 해요? 설령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의사들이라면 흔적만 봐도 겁탈을 당한 건지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강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흘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길지 확신 못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혹시나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그땐 오기 전에 미리 언질이라도 해 줘요. 그래야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당신 물건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아 들였다간 정말 큰일 난단 말이에요.”
“정말...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안 괜찮다니까요.”
“제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잖아요.”
그 말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던 강시연이 대뜸 손을 뻗어 하초를 강하제 움켜쥐어 왔다.
바지 안의 물건은 미안함 감정으로 인해 잔뜩 풀이 죽은 강호의 마음을 대변하듯 평소보다 더 작게 쪼그라든 상태였다.
“내가 억울한 게 뭔지 알아요? 난 이렇게나 아픈데 당신은 그렇게 하고도 이게 멀쩡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렇게 하고도 아침에 멀쩡하게 성이 난 모습에 하마터면 깨물어 버릴 뻔 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손에 잔뜩 힘을 주는데, 하초에서 전해오는 아릿한 고통 속에서 오히려 죄책감과 부담감이 서서히 날아가 버리는 듯한 기묘한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새초롬한 표정을 한 채로 자신의 자지를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어디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 함께, 그녀의 과거나 변태 마스터라는 칭호와 상관없이 자신에게는 오히려 과분한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다시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번데기처럼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자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봐. 이러니 내가 억울해 하지.”
순식간에 딱딱해지며 손을 가득 채워오는 물건을 느끼며 잠시 억울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손길로 바지를 쓰다듬는다.
그 모습에 강호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을 가로막은 손가락으로 인해 중간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안 돼요.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선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고는 강호의 앞에서 보란 듯이 찢어 버렸다.
“앞으로 당신은 이런 계약서에 서명할 일이 있으면 저한테 꼭 허락받고 해요 알았어요? 아니, 팬이라면서 사인 해 달라고 해도 저한테 허락 받은 다음에 해요. 알았죠?”
그녀의 말에 강호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