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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26. 라그놀 부락 (2)


카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회피한 강호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안으로 들어섰다. 강호를 먼저 반겨준 것은 백구였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컹! 하고 짖으며 다가간 백구가 다리에 머리를 문지르며 낑낑 거렸다. 마치 어제는 왜 데리러 오지 않았느냐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 미안.”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구를 위로하던 강호와 미진이 눈이 마주쳤다. “커험! 아... 아직 퇴근 안 했네.” 몇 시에 문을 닫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강호다. “으응! 지금 막 퇴근하려던 중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어제 백구는 누나가 데리고 갔었어?” “응! 시... 시간도 늦었고 방에 불도 꺼져 있길래 자나 싶어서 그냥 데리고 갔어.” 강호의 방이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보니 가게에서 올려다보면 창문이 바로 보인다. 자정 무렵이었고 방에 불이 꺼져 있으니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때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역사가 이루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 시연씨는 갔니?” “으응!” “그래...” 또 침묵이 흐른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어색한 침묵은 처음인 것 같았다. 평소 매형과의 부부 관계 이야기도 서슴없이 이야기하며 짓궂은 농담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 “아이 씨. 숨 막혀서 안 되겠네.” 결국 미진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는 강호를 향해 성큼 성큼 다가가더니 대뜸 팔을 벌려 꼬옥 껴안았다. “가... 갑자기 왜 이래?” “가만 있어봐. 어이구, 우리 강호 이제 진짜 다 컸네.” “진짜 왜 이래. 징그럽게. 그리고 나 진작에 다 컸다고.” “덩치만 큰 애였지.” 그렇게 말하며 포옹을 푼 미진이 강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근데 이젠 진짜 애라고 못하겠다. 아까 아침에 보니까 어후야, 근육이 장난 아니던데.”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강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강호의 얼굴이 대번에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인 누나에게 그런 장면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창피함으로 인해 온 몸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우리 강호를 너무 얕잡아 본 모양이야. 난 그냥 감이라도 떨어질지 모르니까 시도라도 해 보라고 한 건데. 감나무를 도끼로 찍어 버리다 못해 아주 그냥 쓰러진 나무에 올라타 버렸네.” “그만해. 창피하게 왜 그래.” 강호의 얼굴이 갈수록 붉어지자 미진의 짓궂은 농담도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어머. 창피하긴 뭐가 창피하다고 그래? 네가 뭐 죄 지었니? 다 큰 성인 남녀가 한 집에 같이 붙어 있다 보면 눈이 맞을 수도 있고, 눈이 맞으면 입술이 맞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식탁에서 알몸으로 뒹굴 수도 있는 거지.” 강시연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왠지 누나가 말 하니까 진짜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진짜. 자꾸 그럴 거야? 나 그냥 간다.” “가긴 어딜 가. 이리 앉아서 얘기나 해 봐.” 그러면서 미진이 강호의 팔을 잡아 테이블에 앉혔다. “무슨 얘기?” “강시연씨 말이야. 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야?” 그 말에 강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언제 부터야. 누나도 알다시피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구만.” “흐흥! 그런데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식탁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다 이거지? 천하의 강시연이랑 말이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강호도 강시연과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때, 장난기 가득하던 미진의 눈이 한 순간 진지해 졌다. “강호야.” “또 왜에?” “있잖아. 누나는 말이야. 그냥 우리 강호가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상처받는 일 없이 말이야. 그게 누나가 바라는 전부야.” 그 말에 강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얼핏 들어 보면 '어떤 여자라도 좋으니 그저 행복하게만 살아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다르게 들으면 '강시연씨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나중에 상처 받기 전에 지금 마음을 접어라'고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누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알기에 강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자 진지하던 미진의 눈에 다시금 장난기가 돌아온다. “그래서 누나로서의 충고는 여기서 끝! 너도 이제 어른인데 네 인생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하겠지. 자, 이제 제대로 말해봐. 그래서 누가 먼저 덮친 거야?” 그러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이번 일로 꽤 오랫동안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달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 강호가 누나에게 심문 아닌 심문을 받고 있던 그 시각. 오하영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던 강시연 역시도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언니가 그 건물에서 왜 나온 건데요?” “왜? 내가 거기서 나오면 안 되기라도 하니?” “거기 강호씨가 사는 곳이잖아요.” 살짝 가라앉은 톤으로 말하는 모습에 강시연은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동안 남자들을 자주 갈아치우는 과정에서 강시연이라고 위기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조심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어서 뜻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때가 없잖아 있었다. 상대와 모텔에서 섹스를 하고서 나서려다 기자에게 걸릴 뻔 한 적도 있었고, 별장 같은 곳에서 관계를 가지다 주변에 잠복한 기자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한 적도 있었다. 대부분은 혼자서 어찌어찌 해결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부르는 사람이 바로 오하영이었다. 마치 자신과 약속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고, 혹은 오하영이 시선을 끄는 사이 현장을 슬쩍 벗어나기도 했다. 강시연은 그녀를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괜찮다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도와준 것이 바로 오하영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스파이 작전을 하는 것 같다면서 자기가 더 들떠서 신나했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오하영을 불렀다. 온 몸에 기운도 없고 근육통도 심한데다가 보지와 항문이 욱신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마중을 나온 오하영의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여느 때였다면 차에 타기 무섭게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 왔을 애가 눈빛부터 착 가라앉은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언가 못마땅해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오하영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강시연도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오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차로 이동한지 한 참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꺼낸 질문의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도 평소의 오하영과 거리가 멀었다. “오늘 강호씨랑 만난다더니 설마 강호씨 집에서 그런 거예요?” 이런 식으로 만나는 남자에 대해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언니, 상대방 남자 집에서 하는... 그러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잖아요.” 오하영의 말에 애가 진짜 왜 이러나 싶었다. “얘가 안 하던 질문을 다 하네. 뭐, 마침 기회가 와서 확 덮쳤지. 그게 다야.”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오하영의 반응이 또 새롭다. “덮친다는 말 상대방한테 실례 아니에요? 그거 은밀히 따지면 성추행이라고요.” “뭐, 이번엔 내가 너무 흥분해서 강제로 덮치기는 했는데, 그래도 박아도 되냐고 허락은 확실히 구했거든? 강호씨도 허락했고, 결국 같이 물고 빨고 즐겼는데 그게 뭐?” “그건...” 강시연의 말에 오하영이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 요상한 말을 한다. “그래서 강호씨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뭘?” “또 몇 개월 가지고 놀다가 차 버릴 거예요?” “가지고 놀기는 누가 가지고 논다고 그래? 그냥 서로 같이 즐기는 거지.” “언니야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남자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확실히 평소의 오하영이 아니다. 무엇보다 강호를 언급할 때마다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 왠지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로 즐기다 헤어지면 그 이후의 일도 각자가 책임지는 거야. 거기에 서로의 입장에 대한 배려는 불필요 한 거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무런 이유는 없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 오하영의 말은 딱 그런 느낌이었고,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뭔가 슬슬 감이 오려고 한다. “얘가 진짜 오늘은 왜 이러실까?” 오하영이 관찰력이 뛰어나고 감이 좋아서 사람들의 감정 변화나 생각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는 강시연도 마찬가지다. 강시연도 사람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이 특출나게 뛰어났는데, 이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강시연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랜 세월 스스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긴 채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연구하고 분석하다 보니 생겨난 능력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하영은 참으로 알기 쉬운 스타일이다. 사람이 한없이 순수하고 착하며 감정을 쉽게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곧이곧대로 드러나는데다가, 거짓말도 매우 서툴다. 그런 아이가 오늘따라 유독 강호를 언급하며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혹시 얘가?’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강시연이 돌직구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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