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준비 (4)
끔뻑- 끔뻑-
낯선 천장이다...
“엣...?”
“아, 깨어나셨습니까!”
“빼애애액!!”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바로 대굴대굴 굴러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부터 멀어졌다.
온몸을 휘감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이불을 돌돌 말고 번데기처럼 눈만 내놓은 상태로 주변을 살폈다.
“...”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저, 저기. 너무 놀라신 것 같은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
“부대장님. 그러니까 진짜 악당 같습니다.”
“뭣?”
똑같은 디자인의 흰색 셔츠에 검정색 정장 바지를 입은 다양한 종족의 여자들이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지하 주차장에서 바닥을 대굴대굴 굴러다니던 여자들이다.
분명 각성자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괴물과 하이 랭커 사이에 껴서 엑스트라가 돼버린 여자들.
나는 모른 척 눈을 굴리며 왜 내가 낯선 공간에 저들과 함께 있는지를 생각했다.
분명 대기실 안쪽의 소란이 바깥으로 번져나가지 않게 감시하다가 젖소 누나가 찾아오고... 그리고... 문신!
“호, 혹시. 당신들이 제 몸을 닦아주고 옷도...”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거기다 속옷에 분명 흠뻑 뒤집어썼을 애액과 모유는 흔적도 없다.
“아... 그, 그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나간 일은 전부 잊어버리시고 편하게 계십쇼.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다소 연극적인 어투의 부대장이 이를 훤히 드러내는 수작 가득한 미소로 답했다.
나는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 살짝 바지를 내려 안쪽을 살폈다.
‘없어?’
분명 선명했던 분홍색 하트 모양의 문신이 사라져 있었다.
‘흡정을 사용할 때만 나타나는 건가? 다행이다.
아무튼 한시름 놓았다. 여기 있는 여자들까지 전부 보지를 쑤셔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는데 말이야.
“그, 안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찢어 죽일 범죄자는 지하 감옥에 가둬놨습니다. 확실히 현장에서 검거했으니 염려 마시죠.”
지하 주차장에서 빽 소리치던 그 엘프 부대장이 맞나 싶은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에 헛웃음을 짓다가 젖소 누가가 생각났다.
“아! 그 젖소 누나!”
“예! 저희가 확실히 검거...”
“그 사람 아무 잘못 없어요.”
“예?”
이불을 어깨에 두르고 일어나 앉은 나는 정확히 말했다.
“상호합의 하에 한 거였는데.”
“...사, 상호합의로 복도에서... 그걸 했단 말입니까?”
얼굴이 붉어진 부대장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꼴리게 생겼길래 자지로 보지 잔뜩 쑤셔주고 자궁에 정액을 듬뿍...”
“아악! 알겠습니다! 금방 풀어주고 오겠습니다악!”
쇼타 엘프의 적나라한 묘사에 그 당시 나체로 커다란 자지를 덜렁거리던 시우의 몸이 생각난 엘프 부대장은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며 기어나갔다.
‘도망쳤네-’
어쨌든 지금 상황은 조금 위험하다. 세리안 렐리트가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놔둘 리는 없으니 그냥 복도에 있던 나를 부대원들이 데려온 게 아닐까?
“저기요.”
“넵!”
군기가 바짝 든 신병... 아니, 미모의 연예인을 앞에 둔 군인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방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시우 님은 날 부른 거거든?”
“계급장 떼고 한번 붙슴까? 평소에도 선배는 맘에 안들었슴다.”
“많이 컸다?”
부대원들끼리의 의리와 규율은 개나 줘버리고 서로에게 죽빵을 날리는 참담한 광경을 보다 가장 가까이 있던 여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흐엑!?”
“저기, 누나.”
“하으... 네에...”
“이제 가봐도 될까요? 길드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 그게에...”
확답을 주지 못하는 모습에서 뭔가 꼬였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그럼 뭐 어쩌겠어. 의심이고 뭐고 일단 튀어야지.
몰캉-
“꺄아아악!!?”
“오, 좋은 젖가슴이네. 그럼 안녕.”
꽤 예쁘게 생긴 누나의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다 환한 빛에 휩싸이며 씩 웃었다.
“아, 안녕히 가세요오... 다음에 또...”
손안에 딱 들어오는 귀여운 가슴을 잡혀 파르르 떨던 누나는 내가 떠나려는 것을 알아챘는지 작게 인사했다.
벌컥-!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문이 열리며 다급하게 들어오는 세리안 렐리트의 놀란 얼굴이었다.
***
“저, 정화자 님!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스걱-
툭- 데구루루
시우가 사라져버리고 존경하는 세리안 렐리트가 나타나자 당황한 부대원 하나는 막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하려던 얼굴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다급하게 일어난 몸뚱이에서 머리만 따로 떨어져 나간 채로.
“어...?”
데굴데굴 굴러간 머리통이 자신의 발치에 굴러와 부츠에 닿자 얼떨떨한 얼굴로 한걸음 물러서던 이도 마찬가지였다.
푸확-
허벅지 위가 사라진 채로 우뚝 선 두 다리가 좌우로 벌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저, 정화자 님!?”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그려지는 핏빛 그림에 넋이 나간 부대원들이 굳어버린 채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꾸르륵-
깊게 베어져 썩은 내를 풍기던 팔에서 ‘괴물’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모, 모두 전투 대형으로! 지원을 불러...”
푸확-!
부대장이 없는 상황에서 그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이가 막 소리치던 그대로 머리통이 사라졌다.
꺄아아악!!
으아아!! 정화자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진정하고 뭉쳐라! 정화자님의 정신 상태가 이상한 것 같으니 당장...!
하얀 대리석 벽에 칠해지는 핏자국이 하나둘 늘어갔다.
평소 존경, 경외, 흠모의 감정으로 세리안 렐리트를 바라보던 이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들어찼다.
당황으로 시작된 감정의 변화는 공포를 거쳐 곧 분노가 되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우린 당신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푸확!
“언니이!! 으아아아!! 죽어어!!”
푸화악!
“사, 살려주세요! 뭐든지! 뭐든지 할 테니까!”
푸확!
푸른 제복이 주던 자부심이 피로 물들어 갈수록 남은 이들은 방 안의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창문 하나 없고 나가는 출구는 존경하던 전쟁 영웅에서 괴물이 되어 버린 존재가 틀어막고 있다.
“어째서! 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전의를 상실한 이들은 악을 썼다.
죽음의 이유를 묻거나 저주하거나.
얼굴에 묻은 핏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가볍게 털어낸 세리안 렐리트는 마음속에 치미는 불쾌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들의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모르니까.
자신도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작은 엘프 남자의 웃음이 그의 손이 주물럭거리던 더러운 년의 가슴이 떠오르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기계적으로 휘두르던 손을 멈추자 마침내 그년 하나만 남았다.
“으, 아아아. 세, 세리안 렐리트 님...”
그와 마주치고 웃음을 짓던 입을 찢어내고 그를 바라보던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
그의 손이 닿았던 봉긋 솟은 가슴을 보자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질투인가?”
“으으...”
나직한 독백에도 공포에 물들어버려 아까 같은 여자의 얼굴이 아닌 이름 모를 부대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 네가 왜 죽는지 알고 있느냐?”
“흐윽... 모, 몰라요... 제, 제발!”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애매모호했다.
정혜지의 옆에 서 환한 조명을 받으며 활짝 웃고 있던 모습을 봤을 때부터였나?
정혜지의 굴욕스러운 모습을 본다고 찾아가던 발키리 길드의 대기실 앞에서 그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타는 듯한 갈증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불쾌감이었다.
외설스러운 몸뚱이로 그를 더럽힌 수인족을 처참하게 죽여버리고 흐르는 물에 그 피를 씻어내며 한참을 고민했다.
‘가지고 싶다.’
정혜지를 찾아간 행동부터 지금까지. 무엇 하나 수백 년 동안 굳어지고 다듬어왔던 이성이 제 역할을 해낸 적이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그를 원한다.
“흐흑! 제발...”
이젠 머리를 조아리며 비는 부대원을 보던 세리안 렐리트의 무표정에 한줄기 비틀린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살려주마.”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그의 손을 탄 년을 쉽게 죽이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손길로 덜덜 떨리는 여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늘게 웃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추한 발버둥이라도 해가며 연명하던 삶이 목적 없이 소비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그래서 그 증오스러운 이름을 지우려고 했다.
빛바래고 닳아버린 그 이름 위에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다면 삶의 이유가 될 것 같았다.
이젠 그 모든 발버둥이 의미 없게 느껴질 만큼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흐으...”
엎드려 울고 있는 여자의 턱에 손가락을 걸어 위로 들어 올렸다.
맑은 피부에 혈색이 도는 얼굴. 붉어진 눈가에 매달린 눈물이 아름다웠다.
그래, 아름답다. 이 아이가 가진 시간이, 젊음이.
그것에서 나오는 여유가.
“부럽구나. 너무 부러워.”
“아, 아아...”
“너를 살려주마. 오랫동안 내 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
“아아...아아아!! 싫어! 아아악!!”
세리안 렐리트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살점이 넓게 펼쳐지며 여자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