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세인검법
1.
류세인이 돌연 눈을 감은 채로 일어나더니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지도 1시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부에서 몰아치는 마력의 소용돌이를 보면 꽤나 심각한 일인 것 같기에, 나는 세레나를 시켜 그녀의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무협지에서 보면 무림 동도끼리 운기조식을 할 때 서로 일종의 불침번 역할인 호법을 서주는 것 말이다.
류세인도 지금 위험한 상태 같기에 세레나에게 호법을 시켰다.
그리고 나와 시엘은 방 청소를 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침대가 정체 모를 액체로 온통 젖어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 이불을 갈고 환기를 좀 시켰다.
그러는 동안 류세인을 한 번씩 살펴봤는데,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피부에서는 구정물 같은 검은색의 노폐물이 조금씩 흘러나왔고, 부패하는 듯한 악취도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증상, 역시 무협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환골탈태……!
시엘에게 설명하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인님의 말씀대로라면 정액에 함유된 풍부한 마력 덕분에 류세인 씨의 능력이 한 단계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게 진짜 환골탈태인가……?"
"환골탈태라는 것은 무협지라는 창작물 속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니까 아마 실제로는 없는 거겠죠. 단지 주인님께서 알고 계신 것처럼 류세인 씨도 무협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이 특수 능력으로 발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나는 순간 무림 속에서나 존재하는 경지가 현실에도 존재하고, 그것을 류세인이 이루고 있는 것이라 착각했는데, 확실히 시엘처럼 생각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이런 여자도 무협지를 취미로 읽기도 하는구나.
아버지가 검도장 관장이시니, 류진용 아저씨가 무협지를 읽어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걸까?
참, 류세인의 치료도 끝났으니 이제 아저씨를 기다리게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쯤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실 텐데 청소도 끝났겠다 여기로 모셔와야겠다.
나는 세레나와 시엘을 방에 두고 밖으로 나섰다.
2.
손님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면 치료에 방해된다는 명목으로 문 앞에서 기다리지도 못하게 했다.
실수로 영 좋지 못한 소리가 새어나가면 곤란해지니까.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1층 로비에서 내 소식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모습을 보이자 류진용 아저씨는 핼쑥해진 안색으로 허겁지겁 달려와서 물었다.
"세, 세인이는? 어떻게 됐나?"
내가 이미 웃는 낯이었기에 아저씨의 얼굴에도 희망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치료했습니다."
"……!"
류진용 아저씨의 얼굴이 꽃이 피는 것처럼 밝아졌다.
"김도하 씨,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
아저씨는 내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며 몇번이나 계속 감사를 표했다.
"이제는 들어오셔도 괜찮으니 류세인 씨 상태를 보러 같이 가시죠."
"가야지요. 빨리 갑시다."
류진용 아저씨는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의 뒤쪽으로 보이는 1층 로비에는 함께 균열을 공략했던 랭커들과 몇몇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짧게나마 동료였던 류세인이 위급하다고 하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아저씨의 곁에서 함께 기다려준 것 같았다.
그중 선종윤 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류세인 씨가 무탈하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시죠. 저는 혹시 뭔가 도움이 필요하실까 봐 기다리고 있던 터라,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저도 그럼……."
"……."
선종윤 소장이 스타트를 끊으니 다들 한마디씩 하며 류진용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었고, 늑대인간 배성준은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제일 먼저 건물을 나섰다.
류진용 아저씨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제 딸아이를 함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는 모두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 모두 균열 속에서 혈투를 벌인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은총의 빛]으로 상처를 치료했다고는 해도 피로까지 모두 없앨 수는 없으니 쉬고 싶겠지.
나는 검도장 3인방의 류진용 아저씨와 서인호를 데리고 다시 류세인이 있는 방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빠?"
"세인아……?"
눈동자 색이 파랗게 변해버린 류세인이었다.
3.
류세인은 내가 지켜본 바로는 검은색 머리칼에 갈색 홍채를 가진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청량감 있는 파란 눈동자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컬러렌즈를 통해서 눈동자 색을 속여왔다는 것인가?
그 생각에 류진용 아저씨의 안색을 살펴봤는데, 그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저씨도 처음 보는 모습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능력이 한 단계 발전하면서 눈동자 색이 변했구나.
신지하는 특수 능력의 영향으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까지 모두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했으니 처음 보는 케이스는 아니다.
"너……, 그 눈동자는 뭐냐?"
류진용 아저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류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눈동자가 왜요?"
"파란색이잖아. 서양인들처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요?"
"그렇다니까?"
아저씨는 말하면서 류세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3걸음 정도를 남기고 거리를 벌리며 코를 막았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
아까 환골탈태하면서 흘린 검은색 노폐물에서 나온 냄새겠지.
류세인도 이미 알고 있는 듯 내 쪽과 아저씨 쪽을 번갈아 힐끗 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씻고 나올게요."
4.
류세인이 씻으러 간 사이에 나는 류진용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마력을 주입했고, 그녀가 갑자기 가부좌를 틀더니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피부로는 검은색 노폐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아니…,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것도 모자라서, 환골탈태를 그렇게 쉽게……."
아저씨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끔찍했던 인어 괴물을 처리한 것도 그렇고, 귀인이셨군요. 딸아이 일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에 나는 굳이 겸양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 검도장 일행은 랭킹 3위를 차지한 세력인 만큼 상당히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우리 D마트 대피소는 세력의 크기에 비해 능력자의 수가 많은 느낌은 아니었다.
언제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빚을 지워두고 언젠가 위기에 순간에 받아내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오래지 않아 류세인이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더러워진 검도복은 벗고 평범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그녀는 이미 류진용 아저씨의 설명을 통해 주화입마를 치료해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역시 그녀도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해왔다.
"김도하 씨.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제게 귀중한 영약까지 먹이며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구명지은(救命之恩)은 반드시 몇 배로 갚겠습니다."
……영약?
"…하하, 그렇다면 언젠가 저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언제든지 편하게 불러주세요."
류세인은 밝은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준 정액을 영약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체내에 직접 받기만 하면 마력을 흡수하고 능력도 각성할 수 있으니 영약이 맞을지도.
"그리고, 이거. 약소하지만……."
류세인은 갑자기 품속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낡아 보이지만 사실 처음 만들 때부터 그렇게 생긴 거라서 낡은 거 아니에요. 더럽지도 않고요."
"……?"
나는 건네받은 책을 일단 겉으로만 대충 살펴봤다.
구시대의 재질인 듯 거칠 거리는 질감,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누렇게 변해버린 듯한 색감.
책의 양식 자체가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고서 같은 분위기를 강하기 풍기고 있었다.
제목은…….
"세인검법……?"
내가 고개를 들자 류세인이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제 능력은 세인검법이라는 무공의 창시자로서 무공을 발전시키는 것. 거기에 더해 비급을 작성해서 무능력자도 능력자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요. 우리 아빠나 검도장의 사범이신 서인호 오빠도 그렇게 능력자가 된 거고요."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이요?"
"네. 비급을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러면…… 이 비급을 읽으면 무능력자도 세인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건가요?"
"맞아요."
"아! 그러면 B급 균열 공헌도 보상에서 나왔던 종속 관계도……!"
"눈치채셨네요. 이 비급을 통해 능력자가 되면 저랑 일부 종속 관계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뭔가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단지 비급을 연마한 사람이 공헌도를 얻으면 그 일부가 제게 들어올 뿐이에요. 저는 그 기능 덕분에 랭킹 3위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아……."
류세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낡은 비급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능력자를 세인검법을 사용하는 무림인으로 만들어주는 비급.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백지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