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천사와 기사
1.
지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김병호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금 올 연락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세요. 당장 백화점으로 가겠습니다.」
문자를 본 김병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는 재빨리 이 소식을 전달했다.
"세림 누님! 희소식이에요! 도하 님이 지금 당장 여기로 오고 계시니 시간을 벌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김병호의 뇌리에 각인된 김도하는 뛰어난 장군이었다.
김병호는 직접 부딪혀 싸워봤기에 잘 알았다. 변종 좀비들이 얼마나 악랄하고도 두려운 존재들인지…….
그를 포함해 변종 좀비들과 싸웠던 6명의 순찰조들은 모두가 전투에 능숙한 베테랑 능력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마리의 변종 좀비들 중에서 2마리밖에 죽이지 못하고 사실상 궤멸당했다.
그리고 그런 변종 좀비들을 모조리 해치운 것이…….
'도하 님. 그분이라면 전차가 상대라고 하더라도 뭔가 수를 내주실 거야……!'
그러나 김병호의 그런 희망적인 관측과는 달리, 진세림은 회의적이었다.
"너……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요. 도하 님이 오실 때까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진세림은 옥상 출입구로 향했다. 김병호는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진세림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7층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녀가 7층에 가서 다시 한번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 회의를 열 거라고 생각했던 김병호는 당황해서 외쳤다.
"누, 누님! 어디 가세요? 설마 진짜로 혼자 가시려고요?"
"……."
"안 돼요! 저놈들 생각이야 뻔하잖아요! 누님을 강간하면서 놀 생각이라고요!"
진세림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여자 좀 강간하면서 시간 보내면 그게 가장 좋은 거 아니야?"
"그, 그게 무슨……!"
"벙호야. 잘 들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김병호의 양어깨를 붙잡아 밀쳤다.
"어엇……!"
당황한 병호는 얌전히 벽으로 밀쳐졌다. 진세림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각오한 사람 특유의 눈빛…….
"도하한테만 의지하려고 하지 마. 네 목숨은 남이 책임져 주지 않아. 내가 놈들한테 가서 주의를 끌 테니까, 너는 지금 당장 7층으로 가서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탈출 작전을 세워."
"……."
"놈들의 주의가 흩어진 틈을 타서 도망치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잘."
김병호는 김도하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무작정 버티려고만 했다. 그러나 진세림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둘의 생각이 달랐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어깨의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였다.
그녀는 백화점 세력의 지도자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을 살릴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즉,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해야만 했다.
만약 도하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해서 오지 못하게 된다면?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군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진세림은 김병호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말했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 같은 건 없어.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꼭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가장 먼저 나여야만 해."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1층을 향해 내려갔다. 망설임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
김병호는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진세림은 이미 각오를 마쳤다. 그녀는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 기회를 걷어차는 행동은 할 수 없다. 하지만…….
2.
김병호는 진세림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7층으로 가서 능력자들에게 그녀의 의지를 전파했고, 그 결과 잠시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모두가 납득했다.
"……좋아. 그럼 모두들 빠르게 움직여. 세림이가 번 시간을 헛되이 쓰면 안 된다."
그들은 결국 진세림의 희생을 받아들였다.
당연한 거였다.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를 뿐, 여기에 목숨을 걸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가장 선두에서 활로를 열어야 하는 능력자들도 죽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진세림이 스스로 강간당하러 가는 것이 안타깝지 않느냐고? 모두가 죽고 강간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러나 김병호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순간 진세림의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 희생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꼭 세림 누님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는 각오를 다지고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뭐, 뭐야? 병호야! 혼자 어디 가!?"
"작전 대로 계속 진행해 주세요! 저도 놈들한테 가서 시간을 더 벌어보겠습니다!"
"멍청아! 네가 혼자 가서 뭘 하려고……!"
김병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3.
"오. 빨리 오셨네요, 세림 씨? 슬슬 한발 쏴볼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전차 위의 기관총 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진짜로 7층을 향해 대전차 로켓을 겨누고 있었다.
판처파우스트 3. 세간에 잘 알려진 RPG-7과 비슷한 디자인의 무기다.
전차를 파괴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만큼 백화점의 콘크리트 벽 따위는 우습게 파괴하고 내부의 인원들까지 사살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여기에 왔다. 그러니까 그건 얌전히 내려놔."
"하하. 정의감이 아주 투철하시네요? 계속 겨누고 있으면 세림 씨가 상당히 고분고분해질 것 같은데요?"
"……."
진세림은 대답을 멈췄다. 녀석은 지금 의도적으로 그녀를 긁어대고 있었다.
"여기까지 내려왔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는 거겠죠?"
"……그래."
"그럼 뭐 하고 있습니까? 벗으세요."
"……."
진세림은 몸을 움찔 떨고는 벗을 듯 말 듯 뜸을 들였다. 그러자 남자는 흥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로켓으로 다시 7층을 조준했다.
"자, 잠깐! 벗을게! 멈춰!"
"…너무 속 보이게 시간 끌지는 마세요. 진짜로 쏴 보고 싶어지잖아요."
"……."
그녀는 겉에 걸친 흰색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셔츠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다음으로 입고 있는 반팔을 벗으려 밑단을 붙잡았을 때였다.
"잠까아아안———!"
백화점 1층에서 김병호가 달려 나왔다.
"하아……. 이건 또 뭐야?"
"……김병호?"
남자보다도 진세림의 반응이 더 격렬했다.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멍청아,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네가 여기로 와!"
김병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남자에게 말했다.
"이 비겁한 놈아! 사람 목숨을 인질로 여자 희롱하면 재밌냐? 즐거워!? 이 쓰레기 새끼야—!"
김병호는 자신이 놈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격은 하지 않은 채 유치한 도발로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속 보이는 짓을……."
기관총 석의 남자는 그 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넘어간 남자도 있었다. 갑자기 전차 뚜껑이 열리더니 근육질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야, 이 씨발놈아. 이 찜통더위에 탱크 속에서 스트립쇼라도 보면서 즐기려고 했는데, 그걸 망쳐!?"
"야. 네가 왜 나와? 다시 들어가."
"닥쳐. 두 명 만으로도 전차는 몰 수 있어. 그냥 진세림 저년 따먹으면서 기다리면 되잖아. 뭐 하러 뜸 들여?"
군부대 세력은 저들끼리 의견이 갈렸다.
'이건 기회다.'
지금까지 기관총 석에 앉은 채 대화하던 남자는 매번 이쪽 속내를 꿰뚫어보고 여유롭게 굴었다.
그러나 저 근육질 남자는 상당히 다혈질로 보였다.
김병호는 타겟을 바꿔서 도발하기 시작했다.
"야, 이 덩치만 큰 좆밥아! 1 대 1로 붙는 건 두렵냐!? 나랑 싸워보자!"
"뭐래, 좆만한 새끼가. 팔 한 짝은 어디에 두고 왔냐? 새로운 시대에 주고 왔냐? 푸흐흐…."
"오른팔만으로도 너 같은 새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덤벼봐, 이 풍선 근육 새끼야!"
금방 넘어올 것처럼 보였던 근육질 남자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기관총 석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야. 저 새끼 데리고 놀아보자. 그거 한 발만 쏴봐."
"……."
기관총 석의 남자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얌전히 근육질 남자의 말에 따라주었다. 손가락을 살짝 누르자 기관총이 한 발만 발사된다.
탕—!
"끄아아아아아악—!"
"병호야!"
K6 중기관총이 쏘아낸 12.7mm의 탄환이 병호의 왼쪽 허벅지를 완전히 꿰뚫었다.
아무리 능력자가 마력이 없는 공격에 강하다고 해도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기관총 탄환은 그 한계를 명백하게 넘어서는 위력이었다.
진세림은 눈물을 쏟으면서 병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그만해! 차라리 나를 강간해! 얘는 쏘지 마!"
그 모습을 본 기관총 석의 남자가 말했다.
"당장 안 비키면 7층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말에 맞춰서 근육질의 남자가 판처파우스트 3를 받아들고 7층을 조준했다. 진세림은 어쩔 수 없이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윽…. 흐으으으윽……!"
병호는 오른팔로 왼쪽 허벅지를 감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만 놔둬도 과다 출혈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기관총 석의 남자에게 자비란 없었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벌레 새끼. 그렇게 몇 분 시간 끈다고 뭐가 바뀔 줄 알아?"
타타타타탕—!
연속으로 발사된 기관총의 총알들이 병호의 복부를 꿰뚫었다.
"안돼애애애애—!"
날아가는 헬기도 격추시키는 중기관총의 위력에 병호의 복부는 걸레짝이 되었다. 지금 당장 세계 제일의 명의가 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치명적인 상처였다.
진세림이 절망 어린 표정으로 병호를 감싸 안았을 때.
"내가 비키라고 경고했죠? 세림 씨가 어긴 겁니다. 야, 쏴."
기관총 석의 남자가 말했고.
"푸흐흐, 악마 같은 새끼. 진짜 쏜다?"
근육질의 남자는 백화점 7층으로 조준한 판처파우스트 3의 방아쇠를 당겼다.
"아……."
진세림은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로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키지 못했어……. 병호도, 백화점의 모두도…….'
파아아앙—!
발사음이 울리는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하얀색의 무언가가 백화점으로 향하는 로켓탄의 탄두를 대신 맞았다.
콰아아아아앙———!!
"흐윽……!"
허공에서 일어난 격렬한 폭발. 그 압도적인 굉음과 충격파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로켓탄을 대신 맞은 무언가가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육중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땅울림을 일으켰다.
쿵—!
"뭐, 뭐야……!?"
모두가 당황한 그때, 진세림은 갑자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무수한 순백색의 깃털. 아니, 그것은 거대한 날개였다.
흰색과 백색이 섞인 아름다운 섬광, 신성한 빛줄기를 내리는 날개가 진세림과 김병호를 감싸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했어요, 병호 씨. 세림 누나."
"……도하……?"
진세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그건 김도하의 것이었다.
"두 분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쉬고 계세요."
머리를 쓰다듬는 김도하의 손길에 진세림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하지만, 병호가……!"
그녀는 정신을 잃은 김병호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기적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백색의 날개가 뿜어내는 따스한 빛이 김병호의 상처에 스며들면서 완전히 관통되었던 복부의 피가 멎고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이 사람은 살릴 수 있어요, 주인님. 제게 맡겨주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진세림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상에 강림한 천사의 모습을 한 여자가 있었다.
'이 날개가…….'
진세림은 그제야 자신들을 감싼 날개의 정체를 깨달았다.
'천사의 날개……!'
그때, 기관총 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씨발, 무슨 일이야!?"
그는 로켓탄의 탄두를 대신 맞은 하얀색 덩어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먼지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새하얀 갑주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적. 마치 중세 시대에 전장을 누볐던 기사가 나타난 것 같은 시대착오적인 모습이었다.
투구까지 빈틈 없이 쓰고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체구로 보나 투구 밑으로 내려온 기다란 금발로 보나 여자인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백색의 기사가 대전차용 로켓탄을 정면으로 맞고도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거였다.
"그게 말이 돼……?"
남자가 신음하듯 중얼거렸을 때였다.
차갑게 가라앉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김도하가 말했다.
"모두 죽여, 세레나."
명령이 떨어졌고.
"네, 주인님."
백기사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