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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앞으로의 계획


1.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지금 백선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얻는 거구나…….' 김도하가 미남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백선아의 눈에는 잘생겨 보였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기회를 놓쳤어…….' 그녀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하 오빠와 먼저 만난 것도 나, 당연히 친해질 기회가 더 많았던 것도 나. 그런데 결국 섹스까지 하고 도하 오빠를 차지한 것은…… 진아 언니…….' 물론 이진아가 김도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진아에게는 독점욕이 없었다. 애초에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룻밤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그러나 백선아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떠나질 않았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나는 용기가 없었고, 진아 언니는 용기가 있었으니까……!' 세레나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은 백선아는 그야말로 심신미약 상태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에 세레나가 했던 말들이 잔상처럼 메아리쳤다. 「네? 뭐 하러 그렇게 애매하게 굴어요?」 「그냥 섹스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진아 언니는 그렇게 했는데요?」 「그래서 이미 섹스도 했어요.」 '내가 애매하게 굴어서…… 솔직하게 말하면 됐는데…….' 폭주의 폭주를 거듭한 그녀의 머릿속은 이내 한 가지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용기를 내야 해. 지금이라도 당장……!' 백선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2. D마트에도 휴일은 있었다. 물론 세상은 멸망해버렸고 이젠 직장도 없으니 평일이나 휴일이나 다를 게 없었지만, 우리들은 자체적으로 휴일을 만들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 동안은 정해진 일과 업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휴식을 취한다. 이 루틴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그마한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치 좀비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삶을 되찾은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켜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일요일이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 일요일에는 각 종교별로 모인 사람들끼리 신에게 기도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활기찬 분위기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졌기에 다들 꽤나 좋아했다. 즉, 일요일은 주마다 오는 작은 축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D마트에는 북적이는 기운이 가득하다. "어, 도하 군!" "상덕 아저씨? 안녕하세요." 마트 계단을 올라가다가 만난 상덕 아저씨의 표정에는 밝은 기색이 가득했다. 이런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표정이겠지. 이것이 바로 D마트 토요일 저녁의 위력이다. "도하 군 덕분에 안심하고 잘 수 있어서 항상 고마워! 토벌대 일은 많이 힘들지?" "이제 익숙해져서 별로 안 힘들어요." "아무리 익숙해져도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어떻게 안 힘들겠어." 상덕 아저씨는 내 손을 붙잡고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D마트의 사람들은 능력자들의 횡포 아래서 고초를 겪었던 경험 때문인지, 토벌대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 참, 혹시 내일 교회 모임에 참석할 생각 있어? 예배는 안 와도 돼. 요리 맛있게 할 테니까 밥만 먹고 가는 거 어때?" 상덕 아저씨는 실력 있는 요리사였다. 이런 세상이 되어버리기 전에, D마트 옆으로 두 블록만 가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의 수석 셰프셨다고 한다. 양식 전문이신데 요리가 하나같이 정말 끝내준다. '아…… 상덕 아저씨 요리는 먹고 싶고, 모임은 가기 싫은데…….' 나는 무신론자였다. 내 기색을 눈치챈 상덕 아저씨가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요리들 따듯할 때 방으로 보내줄 테니까 맛있게 먹어줘!" 상덕 아저씨는 나한테 윙크하면서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캬……! 진짜 멋있는 아저씨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계단을 오르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시간제한이 달려있다.' 전기도 수도도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보존 식량은 아직은 충분하지만 구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점점 부족해질 것이다. '특수계…… 자원 공급계의 능력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만약 그런 능력자를 찾지 못한다면…… 구조 활동이 오히려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좋아. 앞으로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D마트 주변의 좀비 토벌과 구조 활동은 구 특공대원들, 7명의 여자들한테만 맡겨도 충분할 것이다. 토벌 활동을 지속하면서 그녀들의 실력도 이미 수준급으로 올라왔으니까. 나와 세레나는 따로 활동하며 자원 공급계 능력자를 발굴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리얼돌도 찾아야 한다.' 나는 기본적인 종합 능력치 자체도 높지만, 역시 진짜 능력은 [리얼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었다. 이걸 사용해야 내 전력을 본격적으로 증강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무 리얼돌에나 능력을 사용하기는 싫다. 이건 세레나와 함께 지내면서 점점 강해지는 확고한 생각이었다. 세레나는 이제 단순한 리얼돌이 아니다.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이며,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여자다.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이런 위험한 능력을 얼굴만 봐도 혐오감이 느껴지는 조악한 리얼돌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리얼돌은 나만 바라보고 충성할 텐데, 내가 그 리얼돌에게 애정이 가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극일 테니까. 즉, 내게는 최소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만한 퀄리티의 리얼돌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파주로 가야 한다.' 세레나를 주문했던 회사, Make Human Company는 본사는 유럽에 있었으나 한국에도 자그마한 창고를 갖고 있었다. 리얼돌 하나하나가 억 소리 나게 비싼 만큼, 현지에서도 마지막으로 제품 상태를 검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와있었다. 참고로 이 회사는 배달도 택배 회사를 통하지 않고 자체 운송 차량을 사용한다. 그야말로 장인 정신이었다. 즉, 한국에 있는 Make Human Company의 창고로 가면 아직 검수 중이었던 인형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창고는 파주에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파주까지는 대략 6~70km 정도. 자전거를 타고 중간에 좀비를 만난다고 생각하면 하루에서 이틀은 잡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도하 오빠." 백선아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응?" 언제부터 와있었지? 내 앞에 선 백선아는 무언가 결심을 한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최근의 평화로운 일상 중에는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심각한데." "아뇨." 고개를 저은 백선아가 무겁게 말했다. "제 방에서 같이 영화 보면서 맥주 마실래요?" "……." ……이게 그렇게 결연한 표정으로 말할 일인가?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자 백선아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레나한테는 미리 말해놨어요. 오늘 오빠 좀 빌려 가겠다고." "어? 어…… 그렇구나." 뭐지? 며칠 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본 것 같은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선아는 내 손을 냉큼 잡더니 이끌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3. 처음 들어가 본 백선아의 방은 아무것도 없어서 휑했던 이진아의 방보다는 훨씬 사람 사는 공간 같았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놓여있는 슬리퍼, 바닥에 깔려있는 회색 러그, 침대 머리맡에 일렬로 서있는 3개의 토끼 인형, 바로 옆 선반에 있는 무드 등과 향초까지. 그야말로 여자가 혼자 산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다. 나는 심리적으로 잠시 움찔했다. 그제야 성인 남녀가 사적인 공간인 방 안에서 함께 술 마시며 영화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음…… 나 혼자만의 착각이겠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백선아가 말했다. "도하 오빠. 저 잠깐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주실래요?" 왜 굳이 남자를 방안에 데려와놓고 지금 씻지? 의문이 들었으나 애써 무시하고 대답했다. "어. 천천히 씻고 와." "금방 올게요." 쏴아— 나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썸 타는 남녀 간에나 일어날 므흣한 상황이 맞다. 그러면 백선아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백선아가 내게 이러는 이유……. 그게 정말 내가 좋아서라면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세레나는 내가 더 많은 여자를 만드는 걸 오히려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으니까. 예쁜 여자 싫다는 남자가 어딨어? 하지만 단순히 부채감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내가 그녀의 가족을 구해줬다는 사실 때문에 고마운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거라면? 그렇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것이다. 내게 여자는 세레나만 있어도 충분하고, 지금은 이진아도 있으니까. 마음을 정리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샤워를 끝낸 백선아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어요?" "어, 아니……잇!?" 미친. 백선아는 돌핀 팬츠에 하얀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팔 티 가슴 부분에 툭 튀어나온 무언가가 희미한 연분홍색을 내비치고 있다는 거였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분명한 노브라였다. '이진아보다 한술 더 뜨는구나……!' "제 방이어서 그냥 편하게 입고 왔어요. 괜찮죠?" 백선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게 다가왔으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바로 옆까지 다가온 그녀가 티의 목 부분을 잡고는 펄럭인다. 위에서 보고 있는 내게는 가슴이 거의 다 보일 지경이었다. "휴우— 덥다. 이제 진짜 완전히 여름이네요. 그쵸?" "……." 능청 떨고 있다. 누가 봐도 무리하게 능청 떨고 있다. 백선아가 반팔을 계속 펄럭이자 무언가 달콤한 향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향수까지 뿌리고 왔구나.'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이대로 모르는 척 섹스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번에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이진아와 마찬가지로 백선아도 내게는 소중한 동료니까. "선아야." "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어색하게 웃는 백선아. 나는 그녀를 탁상 앞에 앉혀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내가 가족을 구해준 부채감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굳이 이럴 필요 없어." "……." 백선아의 표정이 쩌저적 얼어붙었다. 여기서 나는 이미 좆됐음을 감지했다. 잘못 짚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크게 뜬 눈에서 왕방울만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한다. "흑, 흐윽." "자, 잠깐 취소! 미안해!" "흐아아아아아앙—!" 그녀는 진짜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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