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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뻗어오는 마수


1. 편의점에서 구한 여자는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의 외모가 아니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반드시 뒤돌아보게 될 정도로 예쁘다.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중단발을 깔끔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편의점 조끼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서 좀비 바이러스 확산 당시 알바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여자가 우리 오피스텔에서 편의점 알바를 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신입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편의점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뭘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들어가지 말라고 얌전히 안 들어간다는 건 당연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창고에 들어가서 마주친 것은…… 바닥에 놓여있는 그녀의 대변이었다. "……아."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그때 세레나가 나를 뒤따라 들어오면서 말했다. "도하야, 여기서 똥 냄새나는 것 같아!" "……." 세레나의 공격력에 내가 감탄하고 있던 찰나, 뒤에서 신음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2. "미안해요." "……괜찮아요." "진짜 미안해요." "…진짜 괜찮아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사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들어가지 말라고 막은 제가 문제죠. 미안해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그녀는 멘탈에 타격이 좀 있어 보였으나 빠르게 회복했다. 정신력이 강한 여자였다. 나는 내가 바닥에 싸놓은 똥을 처음 보는 여자가 발견한다면 저렇게 빠르게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냄새난다는 소리까지 듣는다면…… 어우, 그만 상상하자.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꼼짝없이 물려서 좀비가 됐을 거예요." "뭘요. 위급한 상황에는 도와야죠."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뒤에 계신 일행분께도……" "……앗."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처음 보는 세레나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자기 얘기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 것처럼 자기소개가 튀어나왔다. "아, 아! 저, 저는 김레나입니다! 영국 혼혈이지만 한국에서만 살아서 영어는 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김도하의 여자친구입니다!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춘, 진짜 여자친구입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세레나는 백지와도 같은 아이다. 좀비를 잡을 때는 너무나도 듬직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래 처음에는 이렇게 덤벙대는 것이 정상인 법이었다. 여자는 딱 봐도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저는 김도하입니다. 레나가 만나서 반갑다고 하네요." "아, 아…… 네! 레나 씨, 도하 씨. 사귀는 사이셨구나! 저는 백선아입니다. 나이는 21살이에요." "아, 저는 28살입니다. 그리고 얘는 20살이에요." "네? 28살이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정말 어려 보이세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구요!" 백선아는 21살이지만 사회생활을 할 줄 알았다. 합격. 그런데 저 소리를 듣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 "헤, 헤헤. 자, 잘 어울리나요? 흐헷." 세레나가 갑자기 혼자 음침하게 웃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세레나가 더 폭주하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네?" "계속 저 창고에서 버티고 계셨던 거 같은데, 갑자기 왜 창고 밖으로 나오신 건가요? "아……." "좀비가 나타난 이후로 아직 하루 밖에 안 지났고, 안에서 얼마든지 오랫동안 버틸 수 있으셨을 텐데……." 멀쩡했던 백선아의 표정이 갑자기 다시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제, 제 동생이…… 대피소에 부모님이랑 같이 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저는 아무런 특수 능력도 없어서…… 분명히 간절함이 부족한 거라고…… 그런데 목숨을 걸었는데도…… 제게는 아무런 능력도…… 흐윽……!" 백선아는 느릿느릿 눈물과 함께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3. 우리는 일단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2층에 있는 단칸방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미 저녁이었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 좀비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첫 외출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식량 조달은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편의점에 있는 식량들을 적당히 챙겼다. 우리는 방안에 둘러앉아 백선아가 훌쩍거리며 말하는 사연들을 들어주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1. 남동생과 부모님이 대피소에 있다. 2. 그런데 어제 마지막 문자를 받은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3. 문자의 내용으로 보아 아무래도 대피소의 능력자들이 무슨 짓을 한 것 같다. 4. 도우러 가려면 좀비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은 특수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다. 5. 그래서 능력을 각성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좀비와 싸웠다. 그런데 각성은 못했다. 그렇게 좀비에게 물리기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내가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구해준 거였다. 나는 거듭 감사를 표하는 백선아를 보면서 생각했다. 곱게 자랐을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각오가 남다른 여자다. 보통은 능력을 각성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여자가 커터 칼 한 자루 들고 좀비에게 덤빌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당장 덤비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일주일쯤 굶었다거나. 그런데 백선아는 물과 식량이라면 썩어날 만큼 많은 창고 안에 있는 상황이었다. 생존이 목적이라면 그 안에서 한 달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나와서 목숨을 걸고 좀비와 싸웠다. 심지어 3 대 1로 하나는 직접 죽였다. 진짜로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인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질 가능성이 90% 이상인 싸움을. 절박한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서 능력을 각성하기 위해서. 사자는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절벽에서 떨어트린다는 낭설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린 것이다. 자기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길 기도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가족을 위하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다. "도하 오빠." 백선아는 통성명을 한 이후로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는 능력자 맞죠? 레나도……." "응, 맞아. 능력은 밝힐 수 없지만.." "혹시 두 분……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저도 알아요. 물에 빠진 거 건져놨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꼴이죠. 너무 염치없어요. 부끄러움도 모르는 년이에요." 그녀는 말을 잇기가 괴로운 듯 표정을 구겼다. "그런데 제가 부탁드릴 수 있는 게 도하 오빠랑 레나뿐이에요. 저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무능한 인간이에요. 제발, 제발 제 부모님과 동생을 구해주세요……!!" 처절한 부탁이었다. "도와만 주신다면 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저를 드릴게요.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똥통에 굴리든, 어떻게 쓰셔도 상관없어요. 평생 노예로 살겠습니다." 평생 노예로 살겠다. 어떤 처음 만난 여자가 이런 소리를 내뱉는다면 골 빈 년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라고 가볍게 내뱉는 년이라고. 하지만 백선아는 아니다. 그녀는 자기 혼자라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풍족한 환경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커터 칼 한 자루 들고 좀비와 3 대 1 데스매치를 벌이는 여자였다. 노예가 되겠다는 저 각오는 진짜다. "……흠." 나는 생각했다. 그녀를 돕다가 위험할 것 같으면 그때 발을 빼도 된다. 어차피 꾸준히 외출하며 바깥을 탐험할 계획이었으니 이참에 생존자들의 대피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선아가 마음에 들었다. 은혜를 입혀두면 언젠가 반드시 갚을 타입이다. "좋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앉은 세레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도하가 좋다면 나도 당연히 좋아! 난 도하 여자친구니까!" 여자친구라는 역할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리 둘의 대답에 백선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밝게 웃었다. 방 안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웃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 절대 잊지 않을 게요!" "그래, 그래. 믿어. 그 말은 가족들을 만난 다음에 다시 하는 게 어때?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일찍 씻고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선아는 감사를 연호하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어제부터 씻지 못했을 테니 찝찝할 것 같아서 먼저 씻으라고 했다. 우리 집은 오피스텔 단칸방이고, 단칸방 치곤 넓다지만 그래봤자 단칸방이었다. 쏴아- 그녀가 물을 틀고 씻기 시작하자 적나라한 소리가 전부 들려왔다. 이 닦는 소리, 머리 감는 소리, 바디워시 쓰는 소리까지. 그렇게 자극되는 상상력에 자지가 부풀어 오르려는 그때— 띵- 띵-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것은 백선아의 폰이었다. 잠금이 되어 있지 않은 백선아의 폰에는 지금 수신한 문자의 내용이 화면에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누나. 내가 하루 종일 바빠서 연락을 못했네. 그 각성자분들 알고 보니까 굉장히 좋은 분들이셨어. 내가 괜히 착각해서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 지금은 엄마 아빠랑 잘 지내고 있어. -그분들한테 누나 얘기를 했더니 대피소까지 데리고 와주겠다고 하셨어. 엄청 센 분들이라 하루 안에 구조될 수 있어. 그런데 어제 통화했던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누나가 지금 갇혀있는 편의점이 어디라고 했었지? 문자 내용을 읽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으니, 하나가 더 도착했다. 띵- -아, 참고로 나 지금 통화는 못해. 어제부터 왠지 모르겠는데 통화 기능이 고장 났어. 그래서 못 받은 거야. 암튼 편의점 위치 얼른 보내줘, 금방 구하러 갈게! 문자 내용을 함께 읽은 세레나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와, 잘 됐네요! 선아 언니를 구하러 온대요! 언니가 엄청 걱정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나 봐요!" 세레나는 역시나 속아넘어갔다. 그러나 백지같이 순수한 세레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속지 않을 것 같은 허술한 문자였다. 빨간 망토를 잡아먹으려던 늑대가 대신 문자를 보내도 이것보다는 더 성의 있게 꾸며냈을 것이다. 이 문자에는 수상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첫째, 능력자들에 대해서 뭘 의심했고 뭐가 오해였다는 건지 왜 얼렁뚱땅 넘어가나? 둘째, 그 사람들이 뭐가 좋아서 무능력자인 백선아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 단체로 길을 뚫어주나? 셋째, 동생이 누나가 갇혀있는 편의점 위치를 듣고, 구하러 가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불과 하루 만에 위치를 까먹어버렸다? 청소년 치매냐? 넷째, 다른 모든 기능은 멀쩡한데 통화 기능만 고장 났다? 심지어 아무리 바빴다고는 해도 하루 종일 문자 한통 할 여유조차 없어서 누나를 걱정시켰다? 마지막에 그렇게 의미심장한 문자를 보내놓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새끼들은 지금 동생의 폰을 뺏어서 백선아를 노리고 있었다. 아마 앨범에서 사진을 보거나 했겠지. "흠……." 이제 고민할 차례였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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