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4. 달콤한 간호사의 입술
에리쌤과 나는 전에도 살짝 이야기했던 것처럼 병원에서 같이 근무를 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종합병원에서는 친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같이 입사한 의사 동기 몇 명을 빼면 특히 간호사들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나는 특히 더 어려웠다.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과 신경전도 있지만, 딱히 난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동료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내가 배우는 부분들도 많이 있다.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간호사분들이 능숙하다.
산부인과는 한 명의 생명뿐만 아니라 뱃속에 있는 태아의 건강까지 신경 써야 하므로 다른 과와 다르다.
두 명의 건강을 체크한다고 똑같이 두 배의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세배, 네배 그 이상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 한 것 같다.
하지만 건강하게 출산하거나 회복이 빠르면 세배 네배를 넘는 보람과 감동이 찾아오기도 한다.
에리쌤은 그런 감성적인 부분이 발달 된 사람 같았다.
산모와 태아가 건강해지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안 좋아지면 진심 어린 위로와 슬픈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똑똑하고 예쁜사람이 저런 감성과 인성까지 갖추고 있다니… 그래서 더 눈에 띄고 호감이 갔던 것 같다.
물론 의사와 간호사들을 다 포함해서 가장 예쁜 얼굴과 몸매가 중요했지만.
***
에리쌤이 문자로 보내 준 일식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왜 보자고 하는 걸까…
설마 화장품 뚜껑 보지에 넣고 왔다고 이전 병원 사람들한테 소문이라도 낼까 봐 불안해서 입막음용으로 만나자고 하는 건가?
어차피 병원 사람들과 연락도 안 하는데... 뭐 얼굴 한 번 더 보면 좋지.
별별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식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에리쌤 목소리가 들렸다.
“태준 쌤~”
짧고 딱 달라붙는 블랙 원피스에 힐을 신고 회색머리를 한 에리쌤이 등장했다. 저번에는 모자와 후드로 꽁꽁 감추고 있어서 염색 한 줄 몰랐다.
원래… 갈색 머리 아니었나? 독특하긴 한데… 뭘 해도 잘 어울리는구나…
그리고 저 몸매는... 진짜 간호사 하긴 아까운 몸이란 말이지...
“어 에리 쌤… 염색… 했네요?”
“아! 쌤은 처음 보시는구나. 어때요…?”
“잘 어울려요. 연예인 같은데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쌤도 여전히…”
병원 방문 후 첫 만남이라 어색 할 줄 알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일식집에 들어왔다.
에리쌤이 예약해 둔 룸에는 이미 기본적인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내가 일식 좋아하는 걸 에리쌤이 알았나…? 에리쌤도 일식을 좋아하나…
“요즘 일식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쌤이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
“아 정말요?”
“네… 쌤 일식 좋아하셨잖아요.”
“네? 그걸 알고 계셨어요?”
“그럼요. 초밥이랑 돈가스 많이 드셨던 거 알죠.”
어…? 진짜 알고 있네 내가 일식 좋아하는 걸?
가끔 식사 시간을 놓치면 병원 근처에 있는 일식집에서 배달시켜 먹거나 에리쌤이 포장 해와서 자주 먹긴 했다.
근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다니...
태준은 의아해하며 에리를 빤히 지켜봤지만 에리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맛있는 요리들이 천천히 나왔다. 역시 음식은 뭘 먹느냐보다는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다.
최근에 계속 혼자 먹다가 에리 쌤과 같이 먹으니 음식 맛이 더 좋게 느껴졌다.
“갑자기 태준 쌤 그만두셔서 놀랬어요…”
“아…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원장님이 인원감축을 하신다고 해서… 저 말고 다른 쌤들도 짤리지 않으셨어요?”
“네…? 아직… 그런 쌤은 없는데…”
시발 어이가 없네. 병원 운영 문제로 인원감축을 할 테니 실적순으로 권고사직 한다더니…
한 달이 넘었는데 나 말고는 없다고?
그냥 처음부터 날 저격했네. 시발 치사한 새끼가 좆 같은 이유로 구구절절 말할 때부터 알아봤다.
환자도 없고 남자산부인과 의사가 미래성도 없어 보이니 1타겟으로 정하고 이유는 그냥 끼워 맞추기였다는 사실이 분노를 일으켰다.
싸가지 없는 원장새끼… 시발 어떻게 복수해야 하나… 살면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그냥 못넘어가겠네.
괜한 말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쪽팔린 건 둘째치고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았다.
“아 그래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태준 쌤은 개인병원 어때요? 개원하셨으면 연락이라도 주시지… 진짜 아무도 몰랐어요.”
“자랑할 만한 규모도 안 되고… 좋게 그만둔것도 아니어서…”
“전 좋던데요?”
“네?”
“근데 쌤은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 아니에요? 돈만 쫓는 종합병원이 질려서 작지만 개인병원 내신거잖아요”
맛있게 먹었던 참치회가 목에 걸린 느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왔는데…
물론 처음에는 에리쌤이 말한 돈보다는 의사적 사명이 강했지만 병원에서 짤린 분노와 다른 병원으로 가기 싫은 쪽팔림이 더 컸었다.
“네… 그렇죠… 근데 개인적으로 나와서 사업을 하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초심을 잃을 것 같아요.”
“잘되실 거예요. 산부인과가 원래 남자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인기 없다가 입소문 타면 오히려 더 찾기도 하잖아요.”
“그러면 좋겠네요.”
“저도… 그만두고 싶은데… 쌤이 잘돼서 저 고용해주세요~~! 진짜 열심히 할게요 뭐든!”
“왜요? 쌤 능력도 좋고 인기도 많잖아요. 여기저기서 데려갈라고 할 텐데…”
에리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 버렸다.
어떤 직장인이든 어려움은 있고 불만이 가득하겠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초점을 잃은 사람 같았다.
“주변에선 다 쌤 같은 반응이세요. 넌 걱정없겠다. 시집만 잘 가면 되겠다. 등등…”
겁에 질린 것도 아니고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다. 섣불리 말을 걸 수도 없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그냥 사실만 말한 건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이런 말도 질려 버린 건가?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창백해질 일이야? 인기많은 사람의 삶은 알 수가 없다…
되돌릴수 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쌤…”
“네 에리쌤…”
“저희 술 마시러 갈까요?”
“네? 술이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 에리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손목을 잡고 일식집을 급하게 뛰쳐나갔다.
에리쌤의 손에 이끌려가는 동안 보이는 뒷모습에는 특유의 밝음과 긍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술집을 찾아 술기운에 취하고 싶어 하는 단순한 목적의식만 있어 보였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근처 바로 자리를 옮겼다.
벌써 스트레이트로 네 잔째 마시고 있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다.
에리 쌤은 창백했던 얼굴에서 술 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일식집에서는 조금 경직된 자세였다면 조금 풀리면서 흐늘흐늘 해졌다.
섹시한 블랙 원피스와 다리를 꼬며 들어나는 뽀얀 허벅지가 강조 됐다. 뽀얀 허벅지 안쪽에 있는 보지까지 자연스럽게 연상 됐다. 보지를 많이 보니 투시 능력까지 생겼다.
바로 넘어 온 이후에는 말도 급격하게 줄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쌤이 보기엔 저 어때요?”
썸 타던 사이에서나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을 왜 하는 걸까. 그냥 단순한 술주정인가. 너무 뜬금 없어서 당황스럽네…
“쌤 눈에도 그냥저냥 그런 간호사로 밖에 안 보이죠?”
얇은 유리잔을 들고 날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에리의 눈빛이었다.
사석에서 보는 에리 쌤의 눈빛은 저렇구나. 섹시하다고 해야 할까… 고혹적이라고 해야 할까… 계속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 같다…
어리고 예쁜데 똑똑한 여자 친구를 갖고 있으면 어떨까? 재수 없거나 싸가지 없는 성격은 아닐 것 같고, 반전매력도 있을지 궁금하네.
가만히 있어도 빠져들 것 같은 눈빛이 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걸까. 그만 다가와. 술도 적당히 먹었겠다.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하지만 빠져드는 건 눈빛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변에 손님들과 바텐더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에리 쌤의 촉촉하고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을 시작으로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위스키의 쓴맛만 느끼고 있었던 나는 에리쌤 입술에 남아 있는 달콤한 위스키를 탐닉했다.
위스키의 달콤한은 에리 쌤의 입술과 혀, 타액으로 더 달콤해지고 있었다. 은주와 섹스는 했지만 키스는 하지 못해서 정말 오랜만에 하는 키스였다.
그리고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바텐더가 처음에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익숙한 시퀀스를 봤다는 듯 자기 할 일하는 것 같았고, 다른 손님들도 처음에는 바라보더니 다시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로 돌아갔다.
존나 맛있다… 입술이 이 정도면 다른 몸은 얼마나 맛있을까… 입술이 예쁘고 맛있는 여자 중에 100에 99은 보지도 존나 예쁘고 맛있던데…
키스하며 자연스럽게 뽀얀 허벅지로 손이 갔다. 당장에라도 치맛속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보지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지만 장소적인 문제와 첫 사석에서 만졌다가는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았다.
말랑말랑 할 줄 알았던 에리 쌤의 허벅지는 예상과는 다르게 탄탄했다. 평소에 운동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아직 에리 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었다.
허벅지를 살짝 만지작거리며 입술과 혀를 탐닉하던 중 고개를 뒤로 살짝 뺐다.
자연스럽게 얼굴의 위치를 바꾸며 키스를 이어 나가는 줄 알았는데… 처음에 빠져들었던 애잔한 눈빛을 보여 주었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하다가 마는 게 더 죄송한 거야.
“네? 왜요? 저는…”
“제가… 술에 좀 취한 것 같아요. 술을 전혀 못했다가 요즘에 술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속상한 일 있어요?”
“...”
에리 쌤은 내 입술 대신 술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마신다고 해결될 문제면 좋겠지만… 과도한 음주는 몸에 해롭…”
에리 쌤은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인 자세에서 날 쳐다 봤다.
순간 그 눈빛에 멍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 저도 알아요 쌤. 저도 간호사예요 간호사"
“그냥 저는 걱정돼서… 그거 엄청 강한 술인건 알죠?”
“술을 취하려고 마시지… 소주로는 취하지도 않아요. 취한 지금은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술과 쌤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네…? 저요?”
휘청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만 가요. 전 내일 또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