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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 그때 늑대 엄마가 나타났다


아리스톨 마을 외각의 숲.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서 퀸 문라이트 울프가 털을 곤두세운 채 서 있었다. 그녀가 피워 올린 기세에 짐승과 몬스터가 헐레벌떡 도망치고 벌레마저 숨을 죽였다. 시선이 향한 곳은 아리스톨 마을의 한복판. 마침 자신의 딸과 정을 나눈 그 인간이 느껴지는 장소에서 사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하나. 퀸 문라이트 울프의 눈매가 더욱 좁혀졌다. -크르르르…. 혐오감과 살기가 어린 눈빛을 흘리는 그녀의 아래에서 딸인 늑대 소녀 월광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미를 바라봤다. "끄응?" 평소 같지 않은 어미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한 모습. 그런 월광이를 놔둔 채 퀸 문라이트 울프가 마력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치며 월광이는 무심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더러운 암흑 신의 숭배자들이….] 인지를 벗어난 영물의 마력이 섭리를 비틀어 그녀의 의지를 인식 가능한 언어로 사방에 퍼트렸다. 그녀의 턱이 쫙 벌리자 빛이 빨려 들어가듯 막대한 양의 마력이 모였다. 한계를 넘어선 압축에 의해 주위에 자전이 일어나며 흙먼지와 자갈이 중력에 거스르듯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라!] -콰아아아아아!!! 마치 신의 분노를 방불케 하는 위력. 모든 것을 불 싸지르며 하늘을 향해 뻗어간 마력의 빛줄기는 허공에서 둘로 갈라지더니 각각 사기가 감지된 방향을 향해 떨어졌다. * * * 신성력을 두른 검이 암흑 사제를 베어버리려는 찰나, 상공에서 대기를 뒤흔드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 "음!?" 나와 암흑 사제가 동시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을 집어삼킨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우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그대로 떨어지는 것 같은 위압감에 몸이 경직된다. '아, 이거 죽었….' 순간 죽음을 앞둔 내 시야에 슬라코가 손을 뻗고 있었다. * * * 커젝스가 사기를 해방하자 그곳은 절망과 공포가 지배했다. 눈에 담기만 해도 정신이 찢어지며 어릴 때 시달렸던 악몽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두려움이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몇몇 레벨이 높은 기사들이 이에 저항하며 검을 치켜들었으나 무의미했다. 전장에 사기가 퍼지기 시작하자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저절로 무릎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사기의 생명력 강탈 특성이 아리스톨 백작가의 기사들 거의 전원을 무력화시켰다. “아으….” 그 속에서 메이브는 마력을 방출해 사기를 몰아내며 어떻게든 버텼으나 그녀가 쓰러지는 것도 곧 시간문제였다. 케이트와 강태진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덮친 마족의 습격. 기사들의 전력을 봤을 때 어떻게든 버틸만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문득 강태진의 부재가 뼈에 사무쳤다. 그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저 주종 관계에 지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와서 메이브는 자신이 그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자각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메이브는 지금껏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곁에 없다. 메이브는 지팡이를 단단히 붙잡고 마력을 계속해서 방출했다. 부디 힘이 다하기 전에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빌면서. 그러나 그런 그녀의 소망은 하늘에서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꼈을 때 산산조각이 났다. 전장의 모든 이들이 하늘을 우러러봤다. 커젝스마저도 이를 무시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치켜들었다. 허공에 또 하나의 태양이 생겼다. 태양은 강렬한 마력장을 일으키며 커젝스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을 집어삼키고도 남아 기사단에마저 피해가 갈 크기였다. 커젝스는 처음으로 재빠른 동작을 보이며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오러 블레이드에 사기의 검은 마력이 엮이며 거대한 암흑의 검을 자아냈다. 이내 태양의 마력탄과 사기검이 격돌하고, 세계가 뒤흔들렸다. * * * 바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왕군 병사들의 기척을 느끼며, 용사 김현수가 조용히 눈을 떴다. 멀리서 막대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대규모 파괴를 위한 상급 마법을 터트린 것 같은 그 위력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마왕군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피나.” 현수가 중얼거리자 줄곧 고개를 떨구고 있던 파티의 궁수 피나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시작하는 거야?” “응, 부탁할게.” “좋았어!” 덧니가 보이게 웃으며 피나가 턱을 벌렸다가 한순간에 꽉 닫았다. -키이이잉! 그녀의 입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이 터져 나왔다. 마력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더니 현수, 피나, 미온, 클레어의 손에 스며들어 갔다. 그 순간 그들의 손에는 각자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피나는 만약을 대비해 일회용 매직백 아이템을 뺨 안쪽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마력을 두른 무기 네 자루가 휘둘러지자 그들을 속박하던 사슬이 조각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흐으으읍! 겨우 풀려났네.” “미온, 냄새가 심하니까 스트레칭은 저쪽에서 해주세요.” “야, 너도 냄새나거든?” 미온과 클레어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현수, 피나와 마찬가지로 멀쩡했다. 며칠을 꼼짝도 못 한 채 감금당한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클레어가 짧은 주문을 외치자 그동안 쌓인 노폐물과 악취가 깔끔히 사라졌다. 현수가 마지막으로 모두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감옥의 구석에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케이나를 향했다. “케이나. 너는 어떡할 거지?” 현수의 말에도 케이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틈타 사천왕을 칠 생각이야. 성공하면 네 고향인 아리스톨을 마왕군에서 해방할 수 있어. 함께 가지 않을래?” 현수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으나, 케이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나와 나름 친하게 지냈던 피나가 말을 걸기 위해 나서려고 했으나 클레어가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케이나를 포기한 현수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가자.” 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쇠창살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쇠창살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현수의 파티는 쇠창살이 사라진 틈 밖으로 몸은 내밀었다. 피나가 불안한 듯 살짝 뒤돌아봤으나 이내 현수와 동료들을 따라 감옥에서 탈출했다. 도중에 만난 마왕군 병사들을 전부 베어 넘기며 나아가며 현수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고찰했다. ‘사천왕 세이네루스를 없애고 아리스톨 영지를 되찾는 것까지는 괜찮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군. 아리스톨 백작이 죽은 현재 이 땅의 정통한 후계자는 케이나와 케이트야. 케이트는 그루올 숲에서 죽었으니 케이나뿐이라고 봐야겠지. 그런 그녀가 저런 상태여서야, 영지를 구한 후의 반응과 보상이 걱정되는군.’ 여기서는 케이나가 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일어나서 영지를 구하는데 일조하는 흐름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멘탈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약했던 것 같았다. 아리스톨 영지를 해방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백작은 분명 케이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야지 향후의 일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파티에 넣기에는 애매해도 적어도 자신의 의무만은 제대로 지켜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조차 바라기 힘든 상황인가. 하아. 아무리 내가 주인공이라 해도 절망한 히로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내키지 않는데. 그런 전개는 너무 낡아서 인기가 없다고.’ 현수는 결국 이 일을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 상황에 집중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는 길에 나타나는 마왕군을 모조리 다 처치해버리고 싶은데, 생각대로 되기는 어렵겠지. 막판 보스까지 체력이 버티지 못할 거야. 특히 그루올 숲에서 우리를 잡으러 왔던 그 커젝스라 하던 중급 마족. 그 녀석은 위험했어. 성검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현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뭐, 그것도 그때까지의 일이지. 한 번 싸워본 것으로 조건이 충족됐어. 다시 붙게 된다면 여신님께 받은 스킬이 녀석을 쓰러트리게 해주겠지. 그럼 우선은….’ 건물 밖을 나오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볕을 느끼며 현수가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영주성까지 기척을 숨기면서 간다. 가급적 전투는 피하고 세이네루스만을 노리자. 다들, 준비는 다 됐지?” 동료들이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그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영주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야야야….” 온몸이 저리는 느낌에 저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방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아무래도 그 거대한 마력탄을 맞으면서 땅속 깊숙한 곳에 처박힌 듯했다. …어쩐지 익숙한 장면인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아! 늑대 엄마!” 어둠 길드 ‘블랙 서펜트’와 싸우고 있었을 때 난데없이 난입한 숲의 주인이 쏘아댄 빛의 브레스와 비슷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브레스를 맞고 지하로 떨어졌었지. 어째서 페르고트가 아닌 이 먼 곳까지 늑대 엄마의 브레스가 날아온 건지는 모르지만, 아마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기도 지하인가?” 머리가 눅눅해질 정도로 습한 공기에 곳곳에서 악취가 풍겨왔다. 바닥도 물에 잠겨있어서 온기가 뺏기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 불쾌감. 사방이 암흑 사제가 뿜어대던 것과 똑같은 사기로 가득했다. “뀽.” 그때 바로 밑에서 슬라코가 뛰어 올라왔다. 팔을 뻗어 익숙한 자세로 슬라코를 받아낸 후 꼭 끌어안았다. “역시 슬라코야. 덕분에 살았어.” “뀨웅~” 늑대 엄마의 브레스가 떨어지려는 그때 슬라코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고, 그 순간 머릿속에 브레스를 피할 방법이 떠올랐다. 저번처럼 똑같이 슬라임 보디 스킬을 사용해 육체 표면의 재질을 바꿔 견디는 것이었다. 슬라코와 이어진 손으로 정신이 동조되자 스킬을 사용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전보다 레벨도 높아져서 방어력도 올라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옷은 저번처럼 다 타버리고 사라졌지만.” 하지만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지. 나는 곧장 판데모니아를 열어서 안에서 대기 중이던 칼랑가에게 지시를 날렸다. 그러자 판데모니아의 어둠 속에서 칼랑가의 팔이 뻗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여벌 옷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었다. “자, 그럼.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뀨웅?”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운 지하에서 나는 슬라코와 함께 고민했다. “일단 빛부터 키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불안하네.” “뀽.” 그리고 곧장 초급 마법 ‘라이트’를 시전해 주위를 밝혔다. 순식간에 사방이 환해지며 지하의 모습을 들췄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깔끔했지만,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물이 흙빛을 띠고 있어서 순식간에 불쾌감이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으, 더러워….” “뀽, 뀽.” -철퍽…. 그때 지하 저 멀리서 물을 헤치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런 지하에 사람이라도 있나? 라이트를 움직여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본 나는 그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오늘 아침에 엘프와 만나면서 나눴던 이야기. -“암흑 사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여 시체에 빙의시키죠. 그렇게 만들어진 불사자들은 고통도 지치는 것도 모르고 오로지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은 무시무시한 악의 군세입니다. 거기에 더해 아리스톨은 이미 한 차례 마왕군의 침략을 받아 많은 희생을 치렀지요. 자, 그럼. 그 많던 시체를 마왕군은 과연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나는 떨리는 팔을 부여잡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곳에서. “아아… 아아아아….” 살가죽이 썩어 내려앉은 무수한 좀비 떼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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