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107 - 기사의 왕 레이드 中
“진군이 확인 됐습니다.”
“군 편성에 대해 보고하라.”
“에틸가의 칼날 길렌 백작을 필두로 1만 5천의 병력이 라피에 초원에서 대기 중입니다. 에틸가의 가드 로반 공작을 필두로 1만의 병력이 수도 근방에 2천씩 배정되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은 에뉴다 백작과 시미어 백작, 그리고……”
뮬러 7세는 살기가 넘실대는 눈으로 한 왕실기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페멜로 백작과 델폰 남작이 귀환하기 전에 편성은 끝내놓았다. 키런 왕국이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에 대비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귀환했을 때는 언제든 전쟁을 열 수 있었다.
당연히 릴본 자작의 사망 소식까지 들었다. 델폰 남작이 피눈물을 쏟으며 건넨 수급. 그걸 받은 뮬러 7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지금처럼 온갖 업무를 보고 있었다.
“길렌 백작에게는 증원한 군 편성에 대해 설명 했나?”
“예. 다만 기존 왕국군에 비하면 질이 떨어지나 그건 보급한 장비의 품질로 커버했습니다. 또한 에틸가의 칼날에 군마 500필을 선두로 여러 물품을 지원했으니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자 늑대에 대한 방비책은 어찌 되었지?”
“그 부분은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힘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기에 병력을 증원 후 지휘체계를 삼중으로 보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다. 나머지는 칼날과 가드의 판단에 따르라.”
“알겠습니다.”
외교장관 슌 후작은 계속 말이 없었다. 지금 그의 역할은 전쟁 중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났을 때를 대비해 지금까지 소진된 물자, 인명 피해를 머릿속에 기입할 뿐이었다.
그런 슌 후작의 곁에는 델폰 남작이 서있었다. 슌 후작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를 곁눈질 했다.
“좀 쉬는 게 어떤가, 델폰 남작.”
“전 괜찮습니다, 슌 후작 각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환하고 눈 한 번 붙이지 않았잖나.”
아무리 유한 후작이라지만 이런 건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델폰 남작은 핏발 선 눈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 그가 말한대로 남작은 돌아온 뒤 조금도 쉬지 않았다. 원래 강골이었다면 모르겠으나 검 한 번 제대로 못잡은 그가 이렇다는 건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눈을 감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버티고 있다면 탈진해버릴 게야. 어차피 당장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이만 물러나게.”
“……조금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정말 조금만…….”
“허허……”
슌 후작은 나직하게 웃었다. 종종 왕성에 찾아와 탄원하던 모습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허망함과 분노에 먹힌 남자 밖에 없었다.
‘망가지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
“이야, 우리 백작님 참 뻔뻔해지셨네. 입국 신청도 없이 망명을 온 거야?”
“……미안하게 됐네.”
“덕분에 우리는 전쟁 준비를 하게 됐어요.”
페이니는 골드로츠와 조우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른하게 사무실 책상 앞에 있었다. 골드로츠는 근처에 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꾀죄죄한 차림새는 둘 째 치더라도 정말 처지가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원인은 이쪽에 있으니 더 이상 따지고 들진 않을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런의 왕이 미치게 된 것도, 전쟁의 명분을 만든 것도 버트였다. 그렇다고 해도 골드로츠가 뻔뻔하게 굴 수는 없었다.
“고맙군. 혹여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신다면 사례는 꼭 하지.”
“정말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하나요?”
골드로츠의 눈이 떨렸다.
“그건……”
“전의상실한 기사를 괴롭히는 취향은 없어요.”
페이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쉬고 계세요. 결과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골드로츠는 맞잡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말을 뱉었다.
“부탁이 있네.”
“부탁이요?”
페이니는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골드로츠는 차분하게 몇 마디를 던졌다. 그의 단촐한 부탁을 들은 페이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입장 아니란 건 아시죠?”
“알고 있네. 이게 얼마나 뻔뻔한 부탁인지 알고도 있고. 그러니 부탁하는 거네. 지금 여기서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건 자네 뿐이네.”
페이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드로츠의 정수리만 빤히 보았다.
“후우, 조건이 있어요.”
*
첸스터 산맥 인근. 키런 왕국군은 산을 넘은 뒤에 곧장 진군했다. 그런데도 단 한 명도 지친 표정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검은 빛이 일렁였다. 이들을 지휘하는 수 백의 기사들의 몸에는 검은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4만 남짓. 단순히 계산해봐도 병력 차이는 2배에 가까웠다. 거기에 병사들의 질도 남달랐다. 기사의 나라인만큼 일반 병사들의 수준도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틸카스의 힘으로 강성해졌으니 산을 넘고서도 기운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행군. 그들의 발소리는 한 번 밖에 나지 않았다. 휘청거리거나 숨소리가 거칠어지지도 않았다.
이들의 전진은 라피에 초원까지 직행했다. 판테스 왕국에서는 아예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병력을 물린 뒤였다. 그래서 요새를 포함한 모든 마을이 비어 있었다. 심지어 식량조차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들의 목표는 수도였다. 약탈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전진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이 나이트 마스터 데이론과 마주할 때 쯤에 키런 왕국군과 판테스 왕국군은 초원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다각- 다각-
키런 왕국 측에서 검은불꽃의 기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섰다.
“나는 키런 왕국의 영예로운 기사 코르슬란이다. 그대들에게 배짱이 있다면 나와서 나의 검을 받아라!!”
그 말에 길렌 백작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다 군대 위를 날아오르는 그림자를 보았다.
찻-
거대한 하얀 늑대. 화이트슈트가 나타났다. 그는 판테스 왕국군을 넘어서 코르슬란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크르릉-
코르슬란이 타고 있는 말이 벌벌 떨었다. 그래서 코르슬란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았다.
“크흐흐, 뭐냐, 멍멍아. 네가 나의 상대냐?”
화이트슈트는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한 번 털었다.
탓-
그의 머리에서 누군가 내려앉았다.
곳곳에 먼지가 묻은 갑옷의 무장. 지저분하게 떡진 금발. 다만 들고 있는 검만큼은 깔끔했다.
“샬론 백작?”
코르슬란은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파하하하!! 키런을 버리고 달아나서 적국으로 도망친 거냐! 이 얼마나 한심한 몰골인가!”
코르슬란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보아라! 폐하께서 내려주신 은총이다! 어찌하여 폐하의 곁을 보필하고 지켜야 할 황금늑대가 이런 똥강아지가 되었는가! 역시 이모탈의 성질머리는 못 버린 건가!”
그의 목소리는 전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목적은 뻔했다. 우선 탈주한 황금늑대가 적국에 있다는 사실을 까내리고 사기를 높일 셈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하지 않아도 키런 왕국군의 사기는 높았다. 그래서 부가적인 목적을 이루려 했다. 판테스 왕국군의 사기를 꺾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황금늑대 기사가 망명했다는 소식은 아직 병사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심지어 거대한 흰늑대를 타고 나타났단 건 판테스 왕국의 영지에 있단 소리였다.
“혹시 기사를 빼돌려서 전쟁이 열린 건가?”
“저 문양 황금늑대의 문양이 맞는데…….”
“왜 저런 몰골로 나타난 거지.”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거 아니야?”
판테스 측에는 이제 막 육성된 병사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후우-”
길렌 백작은 선두에 있었지만 그들의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쩌억-
귀를 찢는 듯한 손뼉소리.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전방에 있던 병사들은 귀를 부여잡았다.
길렌 백작은 박수 한 번으로 모두를 진정시키고 앞을 보았다.
“나의 검을 받아라!”
코르슬란은 골드로츠와 검을 섞었다. 골드로츠는 검을 튕겨냈지만 여유롭지 않았다.
‘강하다.’
그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 불순한 전쟁을 막는 것. 황금늑대였던 자신의 목소리라면 그들에게 닿을 거라는 생각에 이곳에 찾아왔다. 키런 왕국은 대대적으로 전쟁을 할 때 기사전을 신청하곤 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라이칸슬로프의 힘을 빌려 여기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말을 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컨디션 난조! 키런 왕국을 주파하고 쉴 틈도 없이 다시 전장에 나섰다. 심리적 압박감이 강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차캉!
그래서 골드로츠의 검은 평소보다 둔했다. 그에 비해 코르슬란은 평소보다 더 강해졌고 사기도 높았다.
그래도 골드로츠는 물러나지 않았다.
“난 아직도 명예로운 황금늑대다! 내가 키런을 떠나온 건 폐하의 뜻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드로츠는 코르슬란의 검을 튕겨냈다. 그러나 코르슬란은 곧장 반격해왔다.
“폐하의 명령을 의심한다는 거 자체가 반역이다! 그 뜻을 거역하다니! 그것이 과연 기사인가! 이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봐라! 자신의 판단으로 폐하를 거스른 자는 그저 들개가 될 뿐이다! 빛 바랜 털가죽으로 어딜 황금을 논하는 거냐!”
코르슬란은 온 힘을 다해 골드로츠를 내리쳤다.
쩌걱-
“카흑……!”
골드로츠는 충격에 속이 뒤틀렸다. 바로 검을 쳐내지도 못하고 휘청거렸다.
“말해봐라! 들개여! 네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놈인지 직시해라! 하물며 이모탈로서 기사직을 얻었는데 그 명예를 저버리다니!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가! 네놈은 기사가 아니다! 그저 콩고물을 찾아다니는 도적일 뿐이다! 그게 아니면 뭐냐! 지금 네 모습이 도적이 아니면 뭐냔 말이다!”
“츠하앗!!”
골드로츠는 코르슬란의 검을 쳐냈다. 하지만 코르슬란의 연격을 쳐내지 못했다.
차캉! 창! 차캉!
쾅!
코르슬란은 단숨에 골드로츠를 쳐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마지막 공격을 막아냈지만 골드로츠의 몸은 붕 떠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대답해봐라, 골드로츠! 네가 어딜 봐서 기사인가!”
“나는 기사다!”
골드로츠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일어났다.
“어리석은 명령에 굴하지 않고 약자를 지키는 기사! 아무리 높은 지위와 강대한 힘을 상대하더라도 올바른 뜻을 쫓는다! 그것이 기사다!”
“웃기고 있구만! 이모탈 주제에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정처 없이 방황하는 기생충 주제에!”
“알고 말고! 기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지!! 누구보다 동경하고 누구보다 염원하던 게 바로 기사였으니까!”
“동경해? 무슨 이유로?”
“이유? 단순해.”
골드로츠는 한 번 휘청이더니 검을 겨누었다.
“좆간지나잖냐.”
팟-
“근데 지금 폐하는 존나 후지다고!!”
{빛뚫기}
골드로츠의 섬광과도 같은 찌르기. 그의 검은 코르슬란의 갑옷을 찔러 들어갔다.
타캉-
“그래서 동경하던 기사의 모습이 고작 이거냐?”
코르슬란은 멀쩡히 섰다. 덤벼든 골드로츠를 걷어 차버릴 여유까지 있었다.
“지위와 힘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네 모습이 동경하던 그 기사의 모습이냐!”
“아니지! 물론 아니지! 카흑…… 케흑…… 아으씨, 리미터 풀렸나 존나 아프네……”
골드로츠는 바닥을 뒹굴었다.
“그래도 멍청한 것보단 낫다! 개줄에 묶인 똥강아지보다 낫다고!!”
“개줄?”
코르슬란은 정색하며 검을 들었다.
쐐액-
차캉!!
골드로츠를 향해 내리친 검, 그걸 막은 건 골드로츠 본인이 아니었다.
길렌 백작이었다.
“어?”
골드로츠는 얼이 빠져 뒤를 돌아보았다. 길렌 백작은 나른한 표정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코르슬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언제?
그들이 있는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두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한가운데. 말을 타고 달려도 몇 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길렌 백작은 맨몸이었다.
순식간에 이 거리를 주파한다? 그럴 수 있나?
코르슬란은 당황해서 검을 다시 휘두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대체 언제……”
“기사답지 않아.”
길렌 백작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길렌 백작은 훨씬 전부터 전장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검을 맞대는 순간부터 존재감을 죽이며 여유롭게 걸었다. 전의조차 드러내지 않은 산책 같은 이동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상대를 죽이는 건 전쟁에선 당연해. 하지만 이건 기사 대 기사의 싸움이잖아? 예의를 갖추는 게 어때.”
“판테스에서는 도적들도 기사라 부르나? 하기사 명예도 모르는 것들이 뭘 알겠어.”
“분명 침입자에게도 정정당당하게 검을 섞던 모습을 봤는데 말이야.”
길렌 백작은 한 바퀴 빙글 돌며 검을 휘둘렀다.
스학-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다른 병사나 기사들도 그대처럼 변질되었다고 보면 되겠군.”
길렌 백작이 돌아선 사이 코르슬란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등을 보이다ㄴ”
털썩-
코르슬란의 상반신이 쭉 미끄러졌다. 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키런 왕국군의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목이나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코르슬란이 무너지고 소름끼치는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자긍심과 사기가 높아진 키런 왕국군이었지만 길렌 백작의 한 수와 살기를 받아내지 못했다.
“위축되지 마라! 상대는 고작해야 기사 흉내나 내는 떨거지들이다! 수와 질, 정신, 모든 것이 우리가 우위다!!”
“우오오오-!!”
“와아아아악-!!”
길렌 백작이 돌아가고 화이트슈트가 골드로츠의 목덜미를 물고 후방으로 돌아갔다. 키런 왕국군은 포효를 하며 진군했다.
전쟁은 시작됐다.
*
키런 왕국과 판테스 왕국군이 격돌했다.
데이론은 수 십의 플레이어들을 쓰러뜨리고 검은늑대 기사 셋을 잃었다.
그 사이 별동대가 키런 왕국의 수도를 공격했고 수비군과 맞딱뜨렸다.
선두는 귀신도끼였다. 그는 키런 왕국과 힘을 합쳐 지옥파수견 레이드 때 활약했던 플레이어였다. 그는 녀석의 살점을 뜯고 피를 마시며 괴랄한 힘을 얻어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수도에서 귀족과 거래를 하고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골드로츠의 영상으로 판도는 뒤집혔다. 귀신도끼는 강한 힘에 비해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지금 여기서 키런 왕국의 편을 든다면 레이드 보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건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키런 왕국이 이기든 지든 이들은 플레이어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힘을 합쳐 쓰러뜨린다! 귀신도끼는 수도 곳곳에 숨어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바다하피의 깃털로 전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과 합류하여 내부에서부터 전투에 나섰다.
“내가 바로 귀신도끼다!”
귀신도끼는 이름에 걸맞는 거대한 양날도끼를 휘둘렀다. 그를 상대하는 건 키런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힘은 강하지만 느릿느릿한 걸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귀신도끼는 그걸 온몸으로 버텨냈다.
“어림없다!”
그는 「야수」 세트의 힘을 발현했다. 힘에 비례하여 방어력이 올라간다! 그의 피부는 웬만한 갑옷보다 단단해졌다. 그래서 병사들이 휘두른 검 정도는 가볍게 튕겨낼 수 있었다.
“가자!!”
귀신도끼는 힘차게 도끼를 휘두르며 전진했다. 그의 도끼에 정면에 얻어맞은 병사는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도끼날을 막으려고 검을 들었던 병사는 애매하게 반쪽이 나버렸다. 공격에 직접 닿지 않았어도 도끼가 일으키는 바람에 휘청이며 균형이 흩어졌다.
후웅- 훙-
“가자-!! 선두는 내가 맡는다!!”
그렇게 귀신도끼가 왕성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이미 두 사람이 성에 도착했다.
“너 참전한 거 살리마 왕국이 곤란하지 않아?”
“그러는 넌 판테스 왕국에 불난 거 끄러 가야 하잖아?”
모든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벨.
이모탈 중 최초로 마스터 타이틀을 얻어낸 어쌔신 마스터 에니스트.
두 사람은 서로 틱틱거리며 왕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라이만 있어도 침투는 문제없었다.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방비를 해둔 살리마 왕국이나 판테스 왕국이라 해도 막을 수 없을진 데 키런 왕국이라 해서 이렇다 할 방책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왕성 근방에 나타날 뿐 직접 들어서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왕성을 중심으로 그 근방의 모든 마법을 일그러뜨리는 술식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왕이 마법에 심취라도 한 건가. 이 정도 규모의 수식은 살리마에서도 펼치지 못해.”
라이의 말에 니스는 검을 빙빙 돌리며 혀를 찼다.
“얘기 못 들었어? 버트가 준 마검 때문이라잖아.”
“그 검이 준 힘이 문제지. 마법을 깨달은 건지, 정령의 힘을 쓰는지, 신성을 깨우친 건지, 아니면 신적인 능력을 받은 건지를 알아야지.”
“그거 귀찮게 됐네. 분석은 아직?”
“당연한 걸 뭘 물어. 지금까지 게임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
라이는 씩 웃었다. 니스도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네.”
니스는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파생된 그림자가 문을 단숨에 잘라냈다. 그 안에는 미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헤딩팟이었지.”
“크오오오-!!”
병사들은 기묘한 포효를 내지르며 검을 휘둘러왔다. 니스는 차분히 발을 뻗어 병사 한 명의 검을 발로 걷어차며 걷어냈다. 동시에 손을 뻗어 다른 병사가 내리치는 검날을 정확히 단검의 끝으로 찍어 막아냈다.
“이거 뭐야?”
“분석 끝. 용린병이야. 드래곤에게 개조 된 놈들이네. 항마력도 높고 딴딴할 거야.”
“……용린병?”
니스는 크게 뒤로 물러나며 그림자 분신을 소환했다. 「그림자」 세트의 효과 중 하나인 ‘검은 자객’. 착용자의 전투력 일부를 가진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녀석들은 치고 들어오는 용린병들을 막아냈다. 그리고 곧장 그들을 밀어내 니스의 안전을 지켰다.
“드래곤이랑 관련되었단 건 몰랐는데?”
“그건 나도 놀라고 있던 참이야.”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빼곡이 들어찬 용린병을 보았다. 그리고 그 건너편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키런의 왕을 보았다.
“어쩔래? 요격해볼래? 너 마법 얼마나 쓸 수 있어?”
“적당히 쓸 수는 있는데 정공법으로 가자. 이것들 남겨뒀다가 뒷감당 못할 거 같아.”
“설마 자폭같은 걸 하겠어?”
“……네가 그 말 하니까 더더욱 정공으로 가야겠어.”
“정말 신중하다니까.”
니스는 검을 가볍게 털며 전방에서 격전 중인 분신들을 보았다. 아무리 니스가 강해졌다지만 용린병들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몇몇은 입에서 불꽃을 뿜어대기까지 했다.
“적당히 힘 써줘. 시간 끌어줄게.”
니스가 앞으로 튀어나가자마자 라이의 몸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라이의 주변에 얼음 결정이 서서히 맺히다가 쏘아지는 새하얀 구체가 만들어졌다. 머리 위에는 불덩이가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붉은 구름이 만들어졌으며 공기층을 타고 번갯불이 터졌다.
라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지속 마법을 손쉽게 발현하고 새로운 주문을 외웠다.
*
“불경한 자로군.”
바틸카스. 그는 왕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성에 침입한 건 두 사람. 하나는 살리마 왕국의 마탑주 라이벨이었다. 그도 이모탈이었고 살리마 왕국에도 선전포고를 해뒀으니 참전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의 심경을 거스르는 건 다른 한 명이었다.
니스의 그림자 분신. 심지어 그녀가 쓰는 검술도 그림자늑대 기사단이 쓰는 것과 유사했다.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는 건 라이였지만 바틸카스의 눈에는 니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늑대들이여. 저 간악한 년을 붙잡아 와라.”
“예.”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그림자늑대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전투 중인 병사들의 그림자 속으로 이동하며 니스에게 접근했다.
푸학-
용린병 하나에게 접근하던 니스의 눈앞에 그림자늑대 다섯이 솟구쳤다. 니스는 단검을 휘두르려는 자세 그대로 그들을 눈으로 훑었다.
목, 어깨, 옆구리, 허벅지, 총 네 곳으로 짓쳐들어오는 검격. 그 중 하나는 니스의 배를 노리고 검을 뻗었다.
탓-
탓-
순간 그림자늑대의 눈앞에서 니스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빠르다.
니스는 그들이 검을 휘두르고 찌르는 그 타이밍에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 들었다. 검이 닿기도 전에, 그들이 합공으로 이루어낸 검의 포위망이 형성되기도 전에 파훼되었다.
그리고 유연하다!
그들은 인체의 움직임을 상정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니스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고기처럼 허리를 비틀고 상체를 뒤틀었다. 심지어 발끝으로 살짝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기행에 가까운 묘기였다.
츠카칵-
니스는 그들의 품에 파고 들면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 회전을 따라 니스가 휘두른 단검이 그림자늑대 몸 곳곳에 궤적을 남겼다. 그들의 습격도 정말 빨랐지만 니스의 대처와 반격은 훨씬 빨랐다.
푸샥-
니스가 바닥에 내려선 순간 그림자늑대들의 형체가 흔들렸다. 니스는 단검을 거꾸로 쥐고 녀석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 직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츠카캇-
그림자늑대들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행히 니스가 마지막에 벌인 공격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위험하군.”
“내가? 글쎄.”
니스는 짧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녀석들의 수준은 상정한 것 이상이었다. 기습하는 속도도 빨랐고 반격에 반응하는 것도 놀라웠다. 심지어 조금 시간이 있다고 해도 데미지를 입은 상태에서 추가 공격을 막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최악은 아니었다.
“나보다 더 위험한 녀석이 있는데.”
니스는 옆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보인 건 머리카락이 역류할 정도로 넘쳐흐르는 푸른에너지와 거기에 뒤덮인 라이였다.
“인드라.”
푸른빛은 단숨에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림자늑대들이 다급하게 양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라이의 손에서 뿜어진 번개를 피할 수 없었다.
팟-
붉은 번개는 순식간에 용린병과 그림자늑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걸로도 모자라 바틸카스의 눈앞까지 번개가 들이닥쳤다.
바틸카스는 그걸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강한 힘이다. 무심코 검을 뽑았지만 이미 번개는 눈앞에 다다랐다.
쩌엉-
공기가 터지는 소리. 바틸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기척만 느껴질뿐 자신이 무사하단 걸 깨닫고 눈을 떴다.
찰랑이는 금발.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미남자가 그의 앞에 서있었다.
“상정 외의 것들이 나타났네.”
금발의 남자 샤누흐는 라이가 쏘아낸 번개를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그걸 본 라이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걸 막아?”
“저게 흑막인가 보네.”
니스는 입을 삐죽거리다 라이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파동에 거리를 벌렸다.
“그럼 이것도 받아 봐.”
라이의 몸에 다섯 색상의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그걸 본 샤누흐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방금 샤누흐가 받아낸 건 11성 대마법이었다. 그것도 라이가 약식으로 발현한 게 아니라 작정하고 캐스팅한 마법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받은 것처럼 보여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수준의 마법을 한 번 더 발현하고 있었다. 그것도 순식간이었다. 이 정도면 드래곤에서도 강한 부류가 아니고서야 힘들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라이는 그저 한 가지 마법을 더 준비했을 뿐이었다. 11성 마법을 다중 영창한 것이다. 실상 이것도 샤누흐조차 버거운 수준이었다.
“브라흐마.”
라이의 손에서 뻗어난 다섯 색상의 에너지가 샤누흐를 강타했다. 샤누흐가 당황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바틸카스를 지켜준 건 버트를 끌어내는 미끼였고 한 번 정도는 막기 쉬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쩌정- 쩍- 쩌억-
샤누흐는 연달아 다섯 에너지를 얻어맞고 뒤로 크게 밀려났다. 어떻게든 버티려던 샤누흐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이어서 여력이 남은 에너지가 샤누흐를 두들겼다.
콰가가각-
라이는 샤누흐를 노려보며 숨을 헐떡였다.
“혹시 몰라서 둘 정도 준비해뒀는데 다행이네.”
“진짜 괴물이네, 그 경지인데도 아직 매지션 마스터가 아니야?”
“한참 멀었어. 그 늙은이 힘 숨긴 거 생각하면 최소한 그 끝자락은 가야 해.”
라이는 땀을 훔쳐내며 새로운 주문을 외웠다. 니스는 분신을 불러내어 마법에 휩쓸린 용린병과 그림자늑대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서도 샤누흐가 쳐박힌 벽을 예의주시했다.
“그래서 방금 그 녀석은 살아있는 거야? 마법은 왜 또 준비하는 건데?”
라이는 주문 영창을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니스도 마음 놓지 않고 벽을 노려보았다.
“카학!!”
예상대로 샤누흐는 잔해를 헤치고 걸어나왔다. 그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해제한다. 말리지 마라.”
샤누흐는 그렇게 말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던 니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샤누흐를 보았다.
츠즈즛-
순간 샤누흐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졌다. 방금은 느낄 수 없던 엄청난 압력이 라이와 니스를 덮쳤다.
“네가 바라는 대로 놀아주마, 열등종.”
“얼굴은 잘 생겼는데 말하는 싸가지가 없네.”
니스는 이죽거리며 단검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샤누흐가 손을 뻗은 그 순간…… 니스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충돌함과 동시에 라이는 다음 마법을 전개했다.
“권위로 일으켜라, 오시리스. 권위로 짓눌러라, 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