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79. 집공순이를 이불 밖으로 끄집어 내는 법
#79. 집공순이를 이불 밖으로 끄집어 내는 법
***
수진과 재현이 선호를 만나기 전.
수진이 들고 온 자료를 보며 재현은 고심에 빠졌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그렇죠? 그,그럼 제가 바로 연락을.."
"1학년 치고는 대단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첫 원정이나 다름없는 곳에 S급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아,아니. 부학장님께서 어차피 부탁하신 일도 있고 한데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수진아. 네 업무가 그런 것이다 보니,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너는 너무 사람을 체스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가장 기본적으로, 그의 부모님께 허락은 받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수진이 그의 말에 입을 벙긋하다 이내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부모가 '비상'의 박정호와 이선희다. 알고 있나?"
"네.."
"이제 갓 재능이 개화 하기 시작한 병아리를 S급 게이트에 끌고 갔다고 치자. 설령 그 원정이 성공했더라도 네가 부모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
"..."
"나도 자식을 낳아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 후폭풍이 상당히 피곤할 것으로 예상이 되는군. 더군다나 '그' 이선희다. 그녀의 악명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나는 들어가서 죽었으면 죽었지,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군."
"마,말을 뭐 그렇게 해요? 그럼 재현 씨는 그를 어디에 보내려고 그랬어요?"
"뭐, B급 정도면 본인도 만족하겠지. A급은 어차피 예정도 없잖아?"
"그럼 이렇게 해요. 부모 동의 받고, 만약 본인이 B급에 만족 못 한다고 하면 결국 갈 곳은 한 군데 밖에 안 남는 거잖아요? 그럼 그땐 제 말대로 그가 레드 드래곤 원정에 참여하는데 반대하지 않는 걸로."
"흠. 아무리 본인이 그렇게 원한다고 해도 뜯어 말리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이긴 한데.."
재현도 그가 이선희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재현씨. 이렇게 차려진 밥상인데도 불구하고 박선호 군을 굳이 원정에서 배제하겠다면, 그를 대신해서 제가 무조건 따라가겠어요. 선택하세요."
이어지는 서슬 퍼런 수진의 말에 결국 그가 한 수 접는 수밖에 없었다.
***
"반갑습니다. 선호군. 장재환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선호입니다."
스포츠머리가 잘 어울리는 날렵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부학장의 소개로 만난 신화 클랜의 대표헌터 장재환.
부모님과 같은 A급 헌터이자, 창을 이용하는 딜러였다.
딜러들 대부분이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지만, 근접 무기를 전문으로 사용할 경우 그 파괴력은 원거리를 훨씬 웃돌았다.
언뜻 말라보이지만 압축된 실전 근육이 돋보인다.
마주 잡아 오는 손에는 굳은살로 뒤덮여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래. 부학장님께 사정을 전달 받긴 했는데, 실적이 많이 필요하다고요?"
"네. 스쿼드를 하나 운영 중인데, 들어갈 수 있는 등급에 한계가 있더군요."
그가 옆에 서 있던 비서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B급 정도면 괜찮겠나?"
"B급이요!?"
고작 B급 게이트를 출입하려고 부학장 찬스까지 쓴 것인가, 후회가 막심했다.
"저.. 좀 건방지게 들리실수도 있는데, 혹시나 해서 여쭤 보는 건데요. B급 말고 더 높은 곳은 못 가나요?"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옆에 서 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태블릿 PC를 하나 건네준다.
"신화의 이번 달 일정표입니다. 게이트의 정보가 간략하게 적혀 있으니, 특별히 원하는 곳이 있다면 골라 보시겠어요?"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일정표에는 다양한 등급의 게이트 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 S급 '레드 드래곤' 이라는 곳에 빨간색 형광펜으로 큼지막하게 동그라미와 별이 가득했다.
나머지도 살펴보니 A급은 없었고 B와 C만 즐비했다.
'B말고는 S밖에 없네.. S급 게이트라.. 궁금하긴 한데, 가고 싶다고 해도 안 들여보내 주겠지..?'
선호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장재환을 응시하자,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옆의 단발머리 여성이 그의 팔뚝을 연신 꼬집으며, 뭔가 말하기를 강요하는데 그는 입을 꾹 닫았다.
'뭐,뭐지?'
"저 혹시 여기 S급.."
단발머리 여성이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인다.
'아, 이거는 시그널이다.'
"저 여기 S급 '레드 드래곤'으로 가고 싶습니다. 제가 고작 B급에 가려고 했으면 신화까지 올 이유도 없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자네 부모님도 현재 게이트 출입 중이라 연락이 안 되더군. 그런 상황에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것을 허..켁!"
"잘 생각하셨어요! 자세한 설명은 이쪽에서 해 드릴게요! S급 게이트라니! 공략 헌터의 로망 아닌가요?"
단발머리 여성이 장재현의 쪼인트를 까버리고는 내게 팔짱을 끼고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 하다는데, 게이트 내부에 들어가 현재 부재중인 지 꽤 된지라 서류 한 장으로 대충 퉁쳤다.
몇 장의 서류에 사인하고, S급 게이트 레드 드래곤의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전설'클랜이 공략 중인 게이트에 '신화'에서 지원조를 파견한다는 내용.
작전 진행은 일주일 뒤였다.
오랜 기간 클리어하지 못 하는 이유는 들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만, 전투를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부상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근데 괜히 레드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은 아닐 텐데.
'설마 본체로 현신하면 수백 미터 쯤 되고 9서클 용언 마법을 난사하는 판타지 드래곤은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자살행위밖에 안 되는데 설마 그럴까 싶다.
"쉬리. 게이트 내부 상황 좀 알아볼 수 있을까?"
[어디?]
"S급 게이트. '레드 드래곤' "
[알겠음]
"땡큐~"
오늘은 처음으로 연주 누나와 밖에서 데이트하는 날이다.
허구한 날 집에만 처박혀 있는 집순이다 보니 꼬셔서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도 힘이 들었다.
어떻게든 꼬셔서 데리고 나오려다 보니 여러가지 조건이 덕지덕지 붙고 말았지만, 그래도 결국 집 밖으로 유인하는 데는 성공했다.
첫 번째 조건이었다.
남성이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했다.
차가 없으니 렌터카를 빌려 갈 예정이었는데, 그런 차는 탈 수 없다고 격식에 맞는 차를 선물해 준다 더니 말도 안 되는 슈퍼카, 아니 하이퍼카가 도착했다.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도 수십 개에 시동을 어떻게 거는 지부터 막막했다.
설명서 따위는 읽지 않는 상남자에게 설명서를 정독하기를 강요하는 차였다.
이름도 무슨 바이올리니스트같이 생긴 이름이라 외우기도 힘들었고, 외형은 전형적인 하이엔드 슈퍼카에 낮고 대담하게 연철된 카본 파이버가 프론트 바디킷의 역동적인 감성을 자아냈다.
특유의 사이드미러는 기능에 충실하기보다는 예술품의 영역으로 봐도 될 정도로 클래식하면서도 화려한 디테일을 갖추었다.
대담하고 강력하게 조율된 자연흡기 V12 엔진은 터보나 슈퍼 차저 등의 개입 없이 순수한 자태를 뽐냈다.
- 부르으으응!
공차 중량 1050kg에 불과하지만 850마력에 이르는 파워 유닛은 트랙 지향의 경쾌하고 가벼운 움직임을 보장하며 주차장을 스스륵 빠져나갔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경고음에 안전벨트를 매는데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불편하다.
그것은 두 번째 조건이었다.
격식에 맞는 의복을 갖출 것.
대체 밥을 어디서 먹는 지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의 정성이면 비빔밥도 참기름 대신 금가루를 비벼 먹어야 격식에 맞을 것 같다.
그녀가 특별 주문한 턱시도를 입긴 했는데, 맞춤이다 보니 몸에 딱 맞아 왠지 모를 답답함이 목을 조이는 넥타이와 함께 불편함을 호소한다.
여태 입었던 정장은 정장이 아니었다.
양말부터 신발까지 모든 것이 세트로 구성 돼 있다.
*
"어~지은아, 어디로 가면 돼? 알겠어."
10분 정도 달리니 대로변에 서 있는 한지은이 보였다.
예전에 훈련에 도움을 준 딜러들에게 밥을 한 번 사겠다는 약속을 한 뒤로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 기회에 불러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본래라면 내가 서연주를 태우러 가는 것이 맞겠지만, 그녀는 자신은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약속 잡은 여성들 중 한 명을 태워오라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세 번째 조건이었다.
-빵 빵!
디헤드럴 싱크로 헬리스 도어, 일명 랩터 도어라 불리는 형식으로 문이 좌우로 서서히 튀어나와 수직으로 회전하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열린다.
"히에엑!! 이거 뭐야?"
"야, 타!"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다.
고전으로 전해지는 야타족.
그냥 차를 몰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보이면 다짜고짜 야! 타! 라고 하면 여성들이 스스럼없이 차에 올라타는 전설의 헌팅법이다.
차가 차다 보니, 헌터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여성 각성자가 짧은 치마 속으로 팬티가 보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낑낑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선호야 안녕~ 와~ 이 차 네 거야?"
"응. 받았어."
"에엑~? 이런 걸 어디서 받아?"
"여자친구가 줬어."
"와~ 여자친구 능력 좋다~ 선호랑 만나려면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줄 수 있어야 되는 구나?"
"내가 이런 거 받으려고 여자 만나냐? 그런 거 아냐."
"그럼? 특별한 기준이라도 있어?"
한지은이 눈을 반짝이며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데 가슴 골이 강조됐다.
눈이 저절로 그쪽을 향하니, 그녀가 눈웃음을 씨익 짓는다.
"난 가슴 예쁜 여자가 좋아.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흐응~ 그래? 난 어때? 괜찮아?"
"괜찮은 편이지."
"뭐야? 괜찮은 편? 그게 다야? 꼭 언제 만져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하.."
예전에 이미 실컷 만져 보긴 했다.
그녀의 가슴도 훌륭한 편이지만, B급에 불과했다.
B급과 A급은 넘어설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는 것이라, 내 여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배고프지? 일단 출발하자. 다른 애들은?"
"응~ 주소 보내줬으니, 알아서들 찾아올 거야. 너무 기대돼! 난 네가 밥 산다고 해서 적당히 아카데미 근처 식당이라도 갈 줄 알았더니 르 메우리스라니~~ 여긴 예약이 3년은 꽉 찬 곳인데, 무슨 수로 예약한 거야?"
"나도 모르지.."
-부르르르응!!
한지은을 태운 슈퍼카는 날카로운 배기음을 토해내며 도로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Restaurant Le Meurice]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초호화 식당이다.
도착하면 네 번째 조건을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