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7. 폭풍 속의 고요
#47. 폭풍 속의 고요
***
모두가 입을 다물고 서연주를 지켜본다.
'이게 대체….'
아리는 자신의 편은 하나도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외롭고 괴로운 상황에 폭풍처럼 등장하여 대중을 휘어 잡은 여성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부스스하게 풀어헤친 머리, 전혀 꾸민 흔적이 없지만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어여쁜 외모.
눈에는 특이한 외알 단안경을 끼고 있는 상태인데 라일락과 같이 수수한 외관에 보랏빛의 은근한 매력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혜빈의 첨예한 목소리가 조용해진 사위를 뚫었다.
"뭐..뭐야? 그렇게 사기를 친다고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분명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누군가에게 짜르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구와 통화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혜빈은 눈앞의 커다란 여성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후훗. 힐러조무사 년들 답게 역시 멍청하네. 그걸로는 상황 유추가 안 된단 말이지?"
서연주가 우습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좌로 가볍게 까딱 눕혔다.
아리와 같이 치유 관련 특수 능력도 없고 강화계나 방출계 쪽 재능도 없는,
마법사를 하기에는 지능과 재능이 부족한 각성자 여성들이 주로 친한 친구끼리 치유 마법을 나눠 배워 힐러 포지션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연히 게이트 내부에 진입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는 지라 갈수록 효율 좋게 써먹진 못한다.
그래도 치유 능력자는 귀한지라 이렇게 하자가 있어도 낮은 급에서는 적당한 대우를 받았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하듯 힐러 조무사도 이에 빗대어 그녀들과 같은 각성자를 비하하는 말이었다.
이혜빈의 입장에서는 역린이 벗겨진 상황.
"뭐!! 조무사!? 이 미친년이 말을 해도!!"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조무사라는 비하를 들은 이혜빈의 발작은 그녀의 벨 소리가 울리며 막을 내렸다.
"음? 역시 지현 언니. 액션이 빠르다니까. 얘 얼른 받아보지 그래?"
이혜빈은 순간 흠칫했다.
최지현. 그녀는 아버지가 몸담은 XK그룹의 여 회장이 아니던가.
뛰어난 수완으로 짧은 기간에 중소기업에 불과한 회사를 대기업에 가깝게 키워 낸 최지현은 이혜빈이 아는 한 굴지의 커리어 우먼이었다.
"여..여보세요..?"
-이혜빈!! 너 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게냐!!!!
이혜빈은 자신이 방금 잘못 들었나 싶어 전화가 걸려 온 곳을 재차 확인하였다.
발신자는 자신의 아버지 이영창이 확실했다.
자신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허허 웃으며 들어 주며 살면서 언성 높인 것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는데.
눈앞의 여성이 대체 누구길래.
그 딸바보로 유명한 아버지가 자신에게 이토록 혼을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아빠..그게 대체 무..무슨 말이예요?"
-회장님께서 노발대발하셔서 전화 오셨다. 네년이 회사 VVIP랑 척을 졌다고!! 딸자식 간수를 어떻게 하냐고!! 지금 너 때문에 우리 집안만 작살 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작살 나게 생겼단 말이다!!
"네..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네년의 행실을 봤을 때 분명 네년이 잘못했을 것이다!! 당장!! VVIP님께 무릎 꿇고 사과 드리거라!!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거라!! 호적에서 아주 파버릴 예정이니!!
스피커폰을 설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이영창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마치 스피커폰을 켜 놓은 듯 생생하게 대화 내용이 울려 퍼졌다.
이혜빈이 당황하여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놓쳤다.
툭-!
서연주가 떨어진 스마트폰에 다가가 주워 들고 스피커폰으로 설정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서연주라고 해요."
-아이고!! VVIP님 회장님께 평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제 딸년이 폐를 끼쳤다고..
"네. 폐만 끼쳤으면 다행이죠. 제가 아끼는 동생을 괴롭히는 데~ 사람 하나 자살 시키려고 작정했는지 입에 아주 독을 품었더라고요?"
-아이고오!!!! 그런 일이!!!!! 정말 제가 진심을 다해 사죄 드리겠습니다.. 딸자식 잘못 키운 제 탓입니다. 딸년에게도 호되게 야단을 쳐 꼭 사과를 드릴 터이니, 부디 회사에는 피해가 안 가게끔 모쪼록..부탁 말씀을..
"부탁이요? 그럼 사장님도 제 부탁을 들어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절대로 들어드려야지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여기 조무사 3명.. 누구 말하는지 아시죠? 이 3명은 앞으로 제 눈 앞에 안 띄게 해주세요. 아카데미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따님이 괴롭히던 피해자의 아버지가 그쪽 회사에서 일한다네요? 앞으로 사장님은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하도록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제가 원하는 건 그렇게 두 가지예요. 그럼 따님 바꿔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영창 사장은 커다란 회사의 오너급 임원 답게 상황 판단이 빨랐다.
회사가 갈기갈기 찢겨 줄 도산하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던 주식도 휴지 조각이 된다.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만 사라진다면 이렇게 비굴해질 필요가 없었다.
이어서 회사를 망하게 한 가해자로서 업무상 과실 피해 소송이 들어오게 될 것인데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이 부사장으로 내려오고 피해자의 아버지를 사장으로 임명하기만 해서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인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돈만 축 내고 있는 멍청한 딸년을 자퇴 시키는 것은 없는거나 다름없는 조건이다.
"자. 이건 돌려줄게."
이혜림이 스마트폰을 넘겨 받기 무섭게 이영창의 분노서린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울려 퍼진다.
-이혜리이임!!!!!! 당장 집으로 들어와!!!!!!!
서연주의 몇 마디 말로 아리의 앞에서 그 입을 벌리고 있던 지옥 같은 현실의 입구가 그 고개를 돌려 이혜림을 집어삼켰다.
조무사 삼인방은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서 발버둥 치듯 강의실을 떠났다.
"오늘은 얌전히 수업들을 기분이 아니네? 그치? 우리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갈까?"
"네..? 네..?"
폭풍 같이 등장한 서연주는 아리의 팔을 이끌어 팔짱을 끼고는 이혜림의 뒤를 이어 강의실을 떠났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 고요함이 찾아오듯 그들이 떠난 강의실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
선호는 신지윤의 뒤를 미행하는 중이다.
마법학 수업을 듣지도 않고 어디서 마법을 자꾸 배워오는지 그 비밀을 캐러 따라붙었다.
직접 물어봐도 배시시 웃기만 할 뿐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던 것.
별것도 아닌 걸로 언성 높일 필요도 없고 지금의 미행은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일 뿐이었다.
예전에 그녀도 선호를 스토킹 한 전과가 있으므로 혹시나 들키더라도 그다지 기분 나빠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와 마찬가지로 신지윤도 뒤늦게 각성하여 편입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얼마 됐다고 현역 마법사들이나 구사할 마법을 주문이나 준비 시간도 없이 곧잘 소화하는 것인가.
그것도 스펠의 단조화 과정을 의미하는 주문도 외우지 않고 무영창으로.
무영창은 배틀 메이지의 영역이다.
목표 의식을 갖고 재능이 충만한 자가 수년에서 수십 년을 그것에만 몰두해야 닿을 수 있는 경지.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다 해도 지금의 페이스는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다.
마교에서 배운 귀식대법은 이렇게 누군가를 미행할 때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분명 어딘가에 있지만 의식을 갖고 찾기 전까지는 발견해 내기 힘든 존재감이 옅은 사람.
현실에서 사용하는 귀식대법은 그런 식으로 존재감을 옅게 만들어주었다.
투명망토를 쓴 것처럼 눈앞에서 움직이는데 발견을 못 할 정도는 아니고 길 고양이가 경계심을 갖지 않고 무심코 지나칠 정도.
신지윤이 한참을 걸어 아카데미 변두리의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적당히 텀을 둔 다음 1층에서부터 어딘가 있을 신지윤을 찾기 시작했다.
도착해서 살펴본 그곳은 동아리 방을 모아 놓은 건물이었다.
동아리 인원이 적어 좋은 건물에 자리 잡지는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나 저들끼리 취미 생활이나 스터디를 하는 공간.
창문을 통해 내부를 둘러다 보며 가끔 그를 알아보고 동아리 방으로 이끄는 여성들을 뿌리치느라 곤혹스러운 상황이 조금 발생했다.
노골적으로 선호를 유혹하는 그녀들의 가슴을 평가하니 B급 이상은 없었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건물을 한참 뒤지던 선호는 결국 3층의 맨 구석에서 신지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윤 쨩~ 이거, 이거는 안 필요해?
안경,여드름,돼지 이 세 단어면 신지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남성을 표현하는 데 충분했다.
'뭐야. 저 돼지 새끼들은!! 순진한 애 꼬셔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선호는 눈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신지윤의 얼굴을 보며 약동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필요해….
신지윤이 특유의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안여돼1이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듯 경건하게 바치고 있는 책을 가져갔다.
몇 장 넘겨 내용을 훑어보더니 책상 구석에 올려 둔다.
-지윤 쨩~ 이거는? 이거 비싼 거야!! 아버지 몰래 갖고 나왔어!!! 미국에 유명한 포터 해리라는 마법사가..아..
신지윤이 안여돼2 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아 들고는 훑어본다.
-이것도 필요해….
역시나 몇 장 넘겨 내용을 훑더니 책상 구석에 올려 뒀다.
그렇게 쌓인 책들만 대충 봐도 십 수권은 돼 보였다.
-그럼 약속한 대가야….
신지윤은 노트에 마법식 같은 공식을 주르륵 써 내려 갔다.
잠시 후 작성한 노트를 안여돼2에게 넘겨 주고는 책상에 쌓인 책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우오오!!! 이것만 있으면 미쿠미 쨩을 구현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우리의 비원이!!!
선호는 그들이 있는 동아리 방의 팻말을 살펴보았다.
[하츠네 미쿠미 구현 프로젝트]
마법사들은 마법을 투사하여 무언가를 파괴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지만,
드물게 조형 된 마력을 형상화하고 유지하여 그것을 마치 정령이나 소환수처럼 써먹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불을 새의 형태로 형상화하여 그 자체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는 피닉스(Pheonix)라는 어빌리티를 가진 A급 헌터가 있다.
이들은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연구하는 동아리인 듯했다.
안여돼 두 명이 쿵쾅쿵쾅 춤을 추니 건물이 흔들리는 듯하다.
'뭐야 이것들. 크크. 졸라 웃기네.'
신지윤이 그들에게 삥 뜯은 책을 경량화하여 한 손으로 가뿐히 든 채로 동아리 방을 나오는 게 보였다.
'이크! 도망가자.'
뭔가 작은 모험을 한 듯 스릴 있는 미행이었다.
선호는 다음에 또 신지윤을 미행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건물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