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서큐버스의 각성
“일어났어요?”
온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뻐근했다.
분명히 이랬던 경험이 있었는데. 언제였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내 몸은 양팔을 감싸여져 밧줄로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여긴 스텔라의 집이었지.
내 몸을 감싼 것은 스텔라의 팔. 나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선 느긋하게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요? 당신, 나한테 납치당한거예요.”
“뭐, 뭐라고?”
“납치 몰라요? 납치.”
나를 마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농담인 것을 깨닫는다.
하긴, 그녀가 나를 납치할리 없지.
그런 사람, 아니 악마잖아.
“밧줄도 아니고 팔로 끌어안는 납치범이 어디 있어?”
“왜요? 남자가 야하게 생겼는데 그럴 수도 있죠. 납치범도 여자라구요.”
“그래? 그럼 납치범씨, 신고하기 전에 이 팔을 좀 풀어 주시겠어요?”
“그럼, 문제 하나 낼까요?”
“문제?”
“당신, 누님을 보고 어디 달라진 것 모르겠나요?”
현대인이 제일 싫어하는 ‘오빠 나 어디 달라진 거 없어?’ 같은 느낌인가?
세상에 이 드립을 내가 들을 줄이야, 그것도 이 세계에서.
“어, 정말 모르겠어요?”
“잠깐, 나 방금 일어났잖아.”
달라진 점?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빤히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서 ‘더 예뻐졌나?’ 같은 소리하면 한 대 맞겠지?
“어어? 정말 몰라요?”
정말 모르겠는데. 뭐지?
그나마 지금 그녀에게서 특이한 점을 찾는다면 보통 섹스가 끝나면 금방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텐데. 아직 서큐버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붉은 안광을 살짝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 내 대답을 듣고 싶어서 빤히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은근히 그 시선이 부담이 되어서 슬쩍 고개를 숙여 눈길을 돌린다.
워낙 바짝 끌어안고 있어서 달라진 곳을 찾기도 힘든데. 묘하게 가슴을 바짝 붙이고 있는 것도 조금 신경이 쓰였고...
가슴?
그러고 보니 가슴이 느껴진다.
솔직히 이전의 그녀라면 남자 같이 바짝 달라붙어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나쁘게 말하면 껌딱지나 다름없던 가슴이 끌어안았다고 느껴질리 없었다.
“가슴이... 커졌나?”
“어머, 드디어 알아주셨네요. 맞아요. 조금 커졌어요.”
내 정기를 꾸준히 섭취하더니 결국 가슴이 조금 자라난 건가?
몸을 살짝 떼어 바라보려고 해도 아직도 바짝 끌어안고 있었기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몸으로 느껴질 정도라니. 많이 성장하긴 했네.
“어때요, 이제 좀 여자 같아요?”
“원래 여자였잖아.”
“그래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맨날 존댓말 쓰면서 거리를 벌리길래. 그냥 직원으로만 보는 줄 알았죠. 하긴, 언제부턴가 말을 편하게 놓고 있었네요. 당신.”
“그러게, 언제부터 말을 놓았지?”
그녀가 먼저 말을 놓아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녀는 다시 나를 대하는 말투가 오히려 존댓말로 변해 버렸다.
장난치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많아졌지만 되려 말투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다니.
원래는 서큐버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엔 마음껏 반말하지 않았던가.
“글쎄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저는 듣기 좋은 걸요.”
붉은 안광이 서서히 줄어들며 뿔도 스르륵 사라진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천천히 나를 구속했던 팔을 풀어 주고서 침대에서 내려와 나를 슬쩍 바라본다.
“같이... 샤워할래요?”
오, 제발... 남자가 그런 말을 들으면...
분명히 죽어 있던 자지가 다시금 발기하려 한다. 움찔, 반쯤 솟아오르려던 것을 이불로 꾹 누르곤 고개를 젓는다.
“아냐, 먼저 씻어. 나중에 들어갈게.”
“쩝, 뭐 그래요.”
분명 지금 입맛을 다셨지? 입맛을?
설마 또 하려고 했던 거야?
아무리 섹스가 하고 싶어도 그 정도로 노골적으로 다가오면 내가 질리겠다 질려.
고개까지 저어가며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니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가득 담은 채로 혼자 욕실로 들어간다.
여자의 샤워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던데, 그녀는 제법 오래 걸렸다. 미지근한 물로 먼저 샤워를 마치는 동안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본다.
아직 해가 중천에 오기에는 조금 덜 떠 있는 시간. 이 정도면 쉴 시각은 충분한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본 듯한 햇빛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한가하게 밖을 바라보다가 마침 나온 스텔라.
샤워를 마치고 다가오는 그녀를 잠깐 힐끗 바라보고는 창밖을 응시하니 그녀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샤워 안 해요?”
“음, 조금만 쉬고 들어가려고.”
“흐응, 그렇게 여유가 넘쳐요?”
“으으, 쫌만 쉬자 쉬어.”
“그래요? 그러다 오픈 시간 늦을 걸요?”
“응?”
“어제가 휴일이었잖아요.”
“아닌데, 어제는...”
오, 잠깐만. 설마?
“하루 종일 잔 거야?”
끄덕.
**
서큐버스는 언제나 목이 마르다.
어쩔 수 없지, 남자들은 언제나 모자르고, 인간의 정기를 먹고 자라는 서큐버스들은 언제나 영양부족으로 살아왔다.
멋대로 남자들의 정기를 훔처먹다가 정기에 빨려 죽어 버리면 대대적으로 서큐버스를 잡아 죽이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 세상.
이제는 전설 속에서나 있는 강인한 남자들이 넘치던 시절, 그때에는 서큐버스도 부흥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이미 몇백년도 지난 먼 과거의 이야기.
이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동화보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단지를 돌리던 사내를 본 이후로, 내 생각은 달라졌다.
전설의 남자는 실존했다고.
비록 몸에 마나를 쌓지 못 하는 남자의 몸이라서 신체적인 능력 자체는 여자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몸에 내제된 정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넘쳐흐를 정도였다.
저 만한 정기를 빨아먹는다면, 나도 전설 속의 서큐버스가 될 수 있을까?
첫 접근은 그렇게 의도적이었다.
마침 남자는 여종업원을 구하고 있었고, 여자가 고작 종업원 따위를, 그것도 처음 보는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의 종업원을 할 만한 이유가 없었을 만큼, 지원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면접자 0명. 그 와중에 나타난 유일한 면접자를 거절할 리 없었던 남자는 단번에 나를 합격시켜 주었다.
그 옆에서 계속 매료를 틈틈이 걸어놔도 매일 쌓이던 매료는 어느샌가 매일 밤 사라져서 나타나는 바람에 그를 항상 바라보며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접한 정기를 가진 남자에게 거는 매료는 언제나 툭 건들면 넘어올 정도로 손쉬운 존재였기에 꿈에 들어가 정기만 빨아먹고 나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남자를 꼬시는 방법도 몰랐고, 특히나 내 육체는 가슴도 작아 여자로서의 매력은 거의 없는 추녀가 아니던가.
정기가 강한 그의 눈에 찰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그가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고 나는 그 사고를 통해 그를 꼬드겨 정기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의 정기는 황홀했다. 그저 꿈에서 정기를 흡수하는 것으로도 다른 남자들의 생기까지 빨아먹는 것보다 몇십배는 될 정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것을 직접 정기를 섭취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만한 정기를 가진 남자는 평생을 뒤져 보아도 없을 거라고.
내 몸에 쌓인 정기는 내가 평생을 모았던 정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서큐버스에게 이만한 정기를 맛보고 나서 다른 남자를 찾는다?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래,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남자의 정기를 맛본 순간부터 이 남자에게 평생을 속박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진한 정기는 나를 취하게 만들었고 중독시켜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단 하루임에도 그의 정기를 흡수해가며 매말랐던 오아시스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은 이제 이 남자의 정기만으로 가득 채워져 버렸다.
온몸이 남자의 소유가 된 기분.
나의 몸 구석구석, 이 남자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는데.
나를 소유한 남자는 다른 여자의 냄새를 가득 묻히고 나를 찾아왔다.
몰골을 보아하니 심지어 그의 의지도 아니었다.
역겨웠다.
처음 느껴진 것은 다른 여자의 흔적을, 음기를 가지고 온 그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게 왜 모르는 여자를 따라가서, 그렇게 따먹히기 좋은 몸을 하고, 그만한 정기를 가지고 여자한테 접근하면 그런 꼴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이 남자는 그걸 몰라줄까.
정기고 뭐고 이 남자를 죽여 버릴까.
아니, 아니지. 아니야.
내 몸에 가득한 그의 정기가 나를 일깨워준다.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를 미워했을까.
잘못한 것은 하나하나 따져 보아도 전부 그 여자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그의 정기를 받아 목숨을 유지하고, 이렇게 추한 여자와 매일 몸을 섞어 주는 그에게 분노를 가지다니. 말도 안 돼.
그래, 잘못한 것은 전부 나야.
내가 잘못한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지켰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한눈을 팔고 말았어.
내가 왜 그에게 화를 내었을까.
그 자리에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마음대로 훔쳐갔던 그 여자에게 질투했던거구나.
나를 구성하는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남자를 가져간 것에 화가 났던 것이구나.
그의 눈을 바라봤다.
떨려오는 심장. 너무 급하게 뛰어서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심장.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떨리는 심장은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의 아기를 가져.’
그래도 될까? 그의 아기라니.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의 얼굴만 보아도 떨려오는 심장.
‘나의 주인님.’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애써 무시했던 그의 욕망마저도.
나는 그것을 전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로서 너무나도 비참하고 처참한 행위였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내 입은 이미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아주세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