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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화.


카이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처음 느껴보는 독한 술기운과 생각하지도 못했던 레베카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훈련을 하며 녹초가 된 육체를 더욱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카이가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자 은은한 촛불이 먼저 보였다. 옷을 벗으며 테이블 앞에 다가가서야 엎드려 있는 아르테를 발견했다.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불편한 아카데미 시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바람을 피우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르테의 몸을 안아 들었다. 가볍고 따뜻했고 그녀의 머리칼에서 기분 좋은 풀 향기가 났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에도 충격이 느껴졌는지 아르테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꺄앗! 도련님 이게 무슨 일이예요! 저 엄청 무겁단 말이예요!” 당황한 아르테가 내려달라고 발버둥 쳤지만 카이는 그 모습이 귀여워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하나도 안 무거운데?” 아르테는 왠지 모를 심술 난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그게…… 곧 있으면 실습평가가 있거든. 그래서 연습하다가 밖에 나오니 밤이지 뭐야?” 아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카이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가 지은 묘한 표정을 읽었다. 그 표정을 물어볼 틈도 없이 갑자기 아르테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밤이라구요?” 카이는 어두워진 창밖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꺄악! 큰일이야.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카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 아르테를 붙잡으며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자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르테는 카이를 올려다보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 그런 말씀은 정혼자에게 하는 거예요. 정말 음흉하시다니까. 그래도 걱정해주셨으니까 답례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잠깐만 가까이 와보세요” 아르테는 두 손을 뻗어 카이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더니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더니 카이가 잡을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카이는 미묘하게 어색한 아르테의 모습이 신경이 쓰였지만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반지를 떠올리고는 서둘러 테이블 위에 의식을 준비했다. 아슈모다의 말대로였다. 낯선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게 반지를 빠르게 채울 수 있었다. 벌써 붉은 기운이 보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아르테는 카이의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복도 근처의 벽에 몸을 기댔다. 차분히 숨을 내쉬었지만 맞잡은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여자가 쓸 법한 화장품 냄새였어’ 아르테가 잠에서 깨는 순간 낯선 화장품 향기를 먼저 맡았다. 귀족들이나 쓸 법한 단아하고 상큼한 향이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면서 방을 나왔다. 아르테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걸 꾹 참고 심호흡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각오하고 있었다. 아르테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주던 카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할 꼬마일 때도 다른 시녀들에게 혼이 나 울고 있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던 카이였다. 그래서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아카데미 입학식 전 카이의 돌발 행동에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결국에는 보내줘야할 운명이라고.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닥치자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그래도 도련님께 들켜지 않아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아르테는 진심으로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길 빌었다. * 텅 빈 방안에 아르테의 향기가 맴돌았다. 카이는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며 의식을 치를 준비했다. 먼저 반지에 깃든 붉은 기운을 뽑아냈다. 아슈모다의 말대로 낯선 여자와 가지는 첫 관계는 보석을 가장 빠르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르테와의 관계로는 세 번을 해도 보석 한 개를 가득 채우기 힘들었을 텐데, 레베카와의 첫 관계로는 두 개의 보석을 만들 수 있었다. ‘아르테와의 첫관계는 보석 한 개 분량이었는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건가?’ 알 게 뭐람. 카이는 익숙하게 아슈모다의 소환의식을 준비했다.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익숙한 형태로 변했다. 아슈모다는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카이의 눈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흐~음, 이거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봤지. 그렇게 내숭을 떨더니 이 냄새들은 뭐지? 벌써 두 계집을 동시에 상대하는 경지에 오른 거야?” 카이는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죽어도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 얼굴 좀 치워” “어머? 인간들의 취향은 시대별로 다르다지만 내 얼굴이 그렇게 못 봐줄 얼굴은 아닌데……” 그녀는 상처받은척 눈가를 훔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슈모다는 카이가 본 여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랬기에 같은 눈높이에서 빤히 바라보는 행동이 카이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볼 때마다 하는 농담도 적응하기 힘들고’ 카이는 또 말이 길어지기 전에 본론부터 말했다. “한 번 더 근력을 늘리고 싶다” 아슈모다는 테이블에 놓인 붉은 보석을 가져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다음에도 근력을 더 올리고 싶다면 세 개를 준비해야 해”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난질하지 마!” 아슈모다는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들었어? 아직 젊어서 그게 얼마나 좋은 선물인지 모르는 거구나?” “정말 필요 없으니까 얼른 축복이나 내려 줘” 아슈모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보석을 톡톡 두르려 깨트렸다. 그리고 카이를 향해 입김을 후 불며 검은 연기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다음에는 날 더 반겨 줬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남긴 아슈모다의 말이 귓가에 맴돌며 특유의 피로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카이는 털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코끝에 아르테의 풀 향기가 맴돌았다. * 카이는 평소처럼 준비하고 실습실에 도착했다. 당연히 먼저 와 있을거로 생각했던 레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녀가 먼저 도착해서 혼자 연습하고 있었지 지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그녀가 올 때까지 몸을 풀며 기다렸겠지만 괜히 어젯밤일이 마음에 걸렸다. ‘찾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카이가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가자 벌컥 문이 열리며 한 인형이 들어왔다. 카이는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고 살펴보자 익숙한 옷차림이 보였다. 포리오였다. 그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오다 카이를 발견하고 히죽 웃음을 지었다. 카이는 먼저 인사를 했지만 포리오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들고 있던 창을 내밀었다. “혹시 인사를 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검을 가져와라 어제 하다만 수련을 마저 하도록 하지” 카이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도리어 포리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카이는 진지한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레베카가 신경 쓰였지만 어제 받은 축복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제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나는 내가 활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군 대련이 설레는 걸 보니’ 카이는 무기 진열대에서 검을 가져와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어제는 그래도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면 오늘은 마치 나무막대를 쥔 듯했다. 카이가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자 바람을 찢는 소리가 났다. 대단한 일이었다. 앞으로 한 두 번 더 근력을 강화 시킨다면 마왕군의 괴물들과도 순수한 근력으로 붙어 볼 만 했다. 물론 다음번 근력을 강화시키는 건 보석을 세 개나 소모해야 했으니 고민을 해 봐야 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포리오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기 행동을 빤히 보고 있었다. 카이는 그 순간 아차하는 심정이 들었다. ‘하루 만에 너무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때 포리오가 말했다. ”너 밤에 운동이라도 한 거냐? 오늘은 검세가 예사롭지 않은데?” ”운동은……매일 하죠” “그래? 아주 좋은 자세다. 그리고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곳에서 나와 대련하지”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레베카가 포리오의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만요! 오늘 온 것도 좀 그런데 매일 대련을 한다니요? 교관이 아카데미 학생을 개인적으로 지도하는 거 불법 아닌가요?” 포리오가 레베카를 돌아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너 그 옷차림은 뭐냐?” 카이도 그녀의 옷차림에 말문이 막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붉은색의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카이는 평소에 아카데미 정복 차림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성숙한 몸매에 눈을 땔 수 없었다. 훤히 드러난 쇄골과 윗가슴이 보였고, 갈라진 드레스 사이로 희고 매끈한 다리가 카이의 색욕을 자극했다. “너 그러고 오크랑 싸우려는 거냐?” “뛰어난 마법사는 옷차림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보다 수업날이 아니라면 복장은 자유니까요” 카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삼일 뒤 있을 평가날까지는 각자 자유롭게 연습하는 기간이니까” 카이의 말에 포리오는 혀를 쯧쯧 찼다. 레베카는 그 드레스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카이의 곁으로 스쳐 지나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때?” 카이는 홀린 듯 대답했다.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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