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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화 - 축제, 오픈하우스 [1]


하림과 수연 사이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몇 주 째 이어지고 있었다. 하림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변했노라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두 명의 여인은 공간과 시간대가 겹치지 않았고, 내가 이 이들과 사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명옥은 애초에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는 아이였고, 연선누나는 모른 척하는 것이 둘 사이를 도와주는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지난주부터 미술학원 소묘 강사를 시작했는데 학교와 가깝다는 점 외엔 조건이 좋지 않았다. 전임 소묘 강사가 중간중간 지적한 부분을 학생 앞에서 실제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이 보조 강사인 내가 할 일이었다. 학생을 책임지고 지도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급하게 구한 일자리라 최저시급에 가까웠지만, 다행히 수연과의 데이트에는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을 배려해줬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앞 번화가의 시끄러운 분위기는 우리 커플과는 맞지 않았다. 수연과 나는 술과 유흥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며 몸을 쓰며 노는 것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없는 평일엔 수연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우린 지하철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싸우덱이나 클림트의 작품집을 함께 보거나 책을 읽었다. 학교에선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던 수연이었지만 내 옆에선 쉴 새 없이 수다를 쏟아냈다. 더 깊은 스킨십을 나눌 공간이 없었기에 매일매일 서로에게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말엔 주로 실기실 데이트를 했다. 실기실은 항상 개방되어 있었고, 주말까지 학교에 나와 과제를 하는 1학년은 드물었기 때문에, 우린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서 만났다. 당시엔 토요일 교양 수업이 있던 시절이라 우린 학생식당에서 데이트하며 종일 학교 안에 머물렀다. 우린 실기실에 있는 동기들의 눈을 피해 와우산 근처 놀이터에 한참을 앉아있다 온 적도 있다. 수연은 학교에선 여전히 말이 없었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 * * 아침엔 엄지손톱만 했던 꽃망울이 오후엔 주먹만 한 장미 송이가 되어있었다. 학교는 다음 주로 예정된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고, 별 관심이 없던 나까지 덩달아 바빠졌다. 단과대는 물론 동아리까지 크고 작은 주점과 행사를 기획했다. 기숙사 사감은 친구와 부모님을 대상으로 기숙사 건물을 개방하는 오픈 하우스 행사를 예고했다. “행사 때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데려올 사람 있어?” 저녁 식사늘 마친 방장 준모형이 도서관에 가져갈 가방을 챙기며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다른 방은 한 명에게 몰아주기를 한다던데요.” “형님은 데려올 여자 없을걸.” “응. 난 종일 도서관에 있다가 늦게 올 거야.” 토목과 2학년인 용섭이 준모형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으로 이죽거려보지만 실패한 것 같다. “형님, 정말 여자친구 없어요?” “그래, 없어. 나 취직하면 대영이가 소개해줄래?” 이미 공기업에 붙었단 소문이 있었지만 준모형은 여전히 도서관에서 취업을 준비했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암튼 너희가 알아서 해. 제비뽑기하던지...” “전 빠질게요. 여자친구 데려와 봐야 할 것도 없고...” 경영대 1학년 동인은 오리엔테이션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아직 잘 지내는 모양이다. “그럼 나도 양보.” “대영아 축하단다.” 용섭까지 빠지자 동인이 코를 찡긋하며 어깨를 툭 친다. “뒤처리만 잘 부탁할게.” 용섭은 자신의 1층 침대를 가리키며 밖으로 나갔다. 난 엉겁결에 수연과 오붓하게 방을 쓸 기회를 얻었다. 오픈 하우스까지 3일이 남아있었다. * * * 축제 며칠 전, 나는 동기 몇 명과 조교실로 불려가 일손을 돕고 있었다. 졸업생에게 발송할 도록에 주소를 붙이는 일이었다. “축제 준비로 바쁜데 미안하다.” 조교인 수찬 선배의 ‘미안하다’는 말은 습관처럼 입에 배었을 뿐,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오빠, 조각회 분량 끝났으면 그거 먼저 붙이고 와요.” “그럴까?” 수찬 선배는 남희누나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애들 몇 명 데려가야 할걸요. 직인 찍으려면.” “그래야겠네. 얘들아 가자.” 우린 수찬 형과 함께 우편물이 가득 담긴 박스를 하나씩 들었다. “대영인 남아 봐. 한 명은 있어야지.” 남희누나가 나를 지목하며 불러 세웠다. “우리 다녀올게. 일 보고 있어.” 둘만 남게 되자, 남희 누나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무래도 너한테 얘길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야.” “네?” 누나는 말을 망설였다. 남희누나가 하림의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최근 들어 그녀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으니까. “너 신원조회가 들어왔어.” “신원조회요?” 이미 신군부가 사라진 지 한참 되었고, 학생회 간부들은 서총련이 휘어잡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시국에 학생 신원조회라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요즘도 심심치 않게 그런 의뢰 들어온대.” “자주 있는 일인가요?” “아니, 나는 처음 봐.” “어디서, 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 문제 있는 사람은 아빠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월북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나에겐 얼굴도 모르는 혈육일 뿐이었다. “글쎄.... 나도 공문을 직접 본 게 아니라서...” 남희누나는 정말 모르는 것인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더는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에... 알겠습니다.” “학교 기록엔 별 내용이 없어. 넌 학생회도 아니고.” “......” “그래도 너는 알고 있어야겠다 싶어서.”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일 있는 건 아니지?” “네...” “그래 별일 아닐 거야. 기운 내.” 학기 초에 학생회 걸개그림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명판에 서명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다.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미 앞서 이름을 적어낸 수백 명의 학생은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결국 이번에도 역시 가족 내력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가 내 신원조회를 의뢰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서류 더미에 깔려 내 존재조차 잊힐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수연의 아버지가 배후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저녁 늦은 시간. 우린 다시 남문 매점에서 만났다. 핑크색 티셔츠 안에 숨겨진 하얗고 포근한 가슴이 다시 보고 싶었다. 탄력 없는 재질의 치마 위로 솟아오른 그녀의 도톰한 엉덩이에 손을 대고 싶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전혀. 왜 무슨 일 있어 보여?” “너 표정 안 좋잖아.” “피곤해서 그런가 봐.” “아르바이트를 줄여. 어깨 아프다며.” “여름까지만 할게.” “피곤한데 기숙사 들어가서 쉬어. 혼자 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말?” 오늘 활짝 웃는 수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정말 섭섭할 뻔했다. 나는 수연과 함께 있는 순간이면 참고 있던 욕망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수수한 차림 뒤에 숨겨진 도톰한 엉덩이와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생각났고, 익숙한 샴푸 향이 스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서버리는 물건이 나를 괴롭혔다. “갈까?” “응!” * * * 축제 첫날. 대부분 시간을 동기들과 주점에서 보냈다. 주방은 2, 3학년 선배들이 맡았고, 우린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거나 재료를 사다 나르는 일을 도왔다. 난 수연과 단둘이 얘기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 옆을 지날 때 슬쩍 말을 걸었다. “3시에 시간 낼 수 있어?” “왜?” “너랑 갈 데가 있어.” “오픈 하우스?” “엇, 알고 있었구나? 룸메이트들이 양보해주는 바람에 오늘은 너와 단둘이...” 수연이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왜 미리 얘기 안 했어?” “놀라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수연은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동기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오지 않을까 봐 마음졸이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수연은 3시 정각 남문 매점 앞에 나타났다. “화났어?” “화난 거 아냐.” 그녀를 빈방으로 데리고 가려는 검은 목적을 들켰기 때문에 화난 것으로 생각했다. “미안, 내키지 않으면 안 가도 괜찮아.” “너 바본거야? 나도 준비란 걸 해야지 이렇게 갑자기...” 난 수연의 집에서 맺었던 관계를 우리의 첫 경험이라고 여겼는데, 그녀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던 첫 섹스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이다. “앞장서.” 수연은 의식을 앞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빨리 걸어! 너 오늘 걸음이 왜 그래?”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수연이 앞장서 유리문을 열었다. 손잡이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는 걸 보니 그녀도 적잖게 긴장한 모양이다. 다행히 로비는 한적했고 아는 얼굴도 없었다. “여기가 로비야. 2층부터 생활관이고 지하엔 식당과 샤워실.” “와, 이런 곳이구나. 대영이의 기숙사.” “식당 가볼래?”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응, 그래.” 수연은 어느새 밝은 목소리로 바뀌어있었다. 배식시간이 아닌 이유로 식당엔 아무도 없었다. 식당을 간단하게 구경시켜주고 2층 생활관으로 함께 올라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방향제 향이 났다. 창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먼저 환기를 시킨 모양이다. “오... 생각보다 깔끔한데...” “좁지?” “응. 너무 좁다. 여길 4명이 쓴다고?” “익숙해지면 괜찮아.” “대영이 침대는 어디야?” “2층, 오른쪽.” “올라가 봐도 돼?” “1층이 편할 텐데.” “네 침대로 가. 거기가 편할 것 같아.” <딸깍> 방문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훗.’ 수연이 작은 소리로 웃었지만 별말은 없었다. 우린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갔다. 2명의 손님을 처음 받는 침대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제 나 옷 벗어?” 농담처럼 던진 수연의 한마디에 우린 함께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거야. 화가 나거나 싫어서가 아니고.” “응, 미안해.” 수연은 셔츠를 먼저 벗더니 얌전함 모양으로 개어놓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했지만 벗은 옷을 정리하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벗은 바지는 침대 난간에 걸었다. “춥다.” 속옷만 입은 수연이 내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천장에 닿은 구부정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마음이 바뀌거나 아프면 바로 얘기해.” 나는 수연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의 속옷 위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연의 속옷은 고등학교 때부터 입던 브래지어였던 모양이다. 가슴 크기를 감당하지 못해 옆으로 삐져나온 젖가슴에 살짝 입을 맞추고 등으로 손을 넣어 후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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