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36화 - 수연의 집 [2]
“안녕하세요. 윤대영입니다.”
나는 빈손으로 온 것을 후회하며 그녀의 안내로 넓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더운데 힘들었죠?”
“아닙니다. 가까웠어요.”
그녀는 눈주름 때문에 좀 더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하림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웃지 않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밝고 우아한 얼굴이었다.
“우리 방으로 올라간다.”
수연이 신발을 벗더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응, 그래.”
“네, 그럼... 저도...”
난 냉랭한 태도로 돌변한 수연을 대신해 그녀에게 몇 번씩 고개 인사를 해야 했다. 이모란 분은 수연이 벗어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더니 두 손을 부여잡고 뒤에서 우릴 바라봤다.
“금방 간식 올려줄게.”
“됐어, 안 먹어.”
“그럼 음료수라도...”
“됐어.”
주방과 거실을 연결하는 아치형의 벽면 한가운데 커다란 괘종시계가 놓여있었다. 천정이 높고 창도 컸지만, 어둡고 무거운색의 소파 때문인지 아니면 애보니색의 나무 바닥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였다.
‘빈집이라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빈집이나 마찬가지야.”
평소엔 모깃소리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들으란 듯 큰소릴 잘도 낸다. 난 얼른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이모님은 주방에 들어가신 모양이다.
“친 이모님이셔?”
“아냐. 일하는 이모야.”
“그러면...”
“식모.”
계단의 벽엔 식구들 사진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었다.
수연의 아버님은 작은 키에 말랐으며 검붉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수연처럼 마른 체형에 인자하신 어머님, 그리고 언니와 오빠로 보이는 사람들도 액자 속에 있었다.
집이 높은 만큼 올라야 할 계단도 많았다. 난간 옆으로 길게 늘어선 사진 속 인물들의 마중을 받으며 수연의 방에 들어섰다.
“여기야 내방.”
“아...”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거실에 비해 수연의 방은 작고 아담한 크기였다. 잔디정원과 골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큰 창과 짙은 마호가니 색 책상, 레이스로 장식된 철제침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과제부터 시작할까?”
“그러자.”
모니터 위에 문서창을 띄우는 데는 수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식구들은 어디 가셨어?”
“아빤 석가탄신일 행사 때문에 절에 가셨어.”
“그렇구나.”
“언니랑 오빠는 지금 한국에 없고...”
“네가 막내구나.”
엄마 얘기를 빼놓는 덴 사연이 있어 보였고,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읽어볼래?”
“우와... 많이 썼네.”
이미 완성에 가까운 리포트를 수연 혼자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당시의 워드프로세서는 그림 파일 편집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우린 인화된 사진을 출력된 종이에 오려 붙여야 했다.
“글 좋은데.”
수연의 얼굴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읽히는 글이었다.
“정말?”
“도입부도 좋고, 적산가옥에 대해 정리해놓은 부분도 눈에 쏙쏙 들어와.”
수연은 어느새 내 옆에 바짝 의자를 당겨 앉아 있었다.
“빈말... 아니지?”
“그럼.”
수연은 칭찬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난 수연의 글을 플로피디스크에 백업한 뒤 어울릴만한 사진을 골랐다.
<똑똑>
“네, 열려있습니다.”
“들어와.”
이모님이 수북이 담긴 수제 모나카와 과일,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꽃무늬 쟁반에 가져오셨다.
“대영 학생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난 하얀 접시에 담긴, 한눈에도 공들여 깎은 티가 나는 사과를 입에 넣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모님은 큰 사과 조각을 한입에 넣고 서걱서걱 씹다가 ‘꿀꺽’ 삼키는 내 모습을 넋 잃고 보고 있었다.
“잘 먹으니까 너무 보기 좋아요.”
“이모님, 말씀 놓으세요.”
그녀는 손아랫사람인 나에게조차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봤는데 벌써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럼 그럴까요?”
“안 나가? 일 봐야지.”
“수연아...”
”아녜요. 마침 저도 볼일이 생겨서...
수연아, 나 잠깐 밖에 다녀와도 될까.”
“밖에? 왜?”
“외가께서 터미널로 물건을 보내셨나 봐.”
“알았어. 아빠는?”
“절에서 점심 먹고 오실 거야.”
“그럼 이모도 늦게 들어와.”
“난 식사 준비해야지.”
“우린 알아서 먹을게.”
“대영 학생, 점심 먹고 천천히 놀다 가요.”
“네, 감사합니다.”
“인제 그만 나가면 안 돼?”
“알았어. 대영 학생 뭐 좋아하는지 물어...”
수연은 이모의 말을 끊고 허리를 밀어내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야, 너 왜 그래?”
존대 없는 말투와 사나운 행동이 버릇없게 느껴졌다.
“이모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인사했다.
“네, 장 봐올 테니 저녁까지 먹고 가요.”
“감사합니다.”
이모님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난 수연에게 말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어른에게 그러면 안 돼.”
이모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연은 다시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돌아왔다.
우린 사진관에서 뽑아온 사진의 뒷면을 칼로 긁어 코팅 면과 여러 개의 종이 층을 각각 분리했다. 이렇게 사진을 얇게 만들면 풀도 잘 먹고 인화지가 일어나지 않아 깔끔한 리포트를 만들 수 있었다.
“출력은 어디서 할거야?”
“1층 서재에 프린터 있어.”
“집에 프린터가 있었구나.”
“가볼래?”
이모님은 벌써 밖으로 나가셨는지 사람의 인기척이 없다.
“들어가도 괜찮은 거지?”
“프린터 쓴다고 말해놨어.”
서재엔 두꺼운 커튼이 쳐진 창이 있었고, 중역 책상과 2인용 카우치가 한대 붙어있었다.
방의 삼면은 천정까지 올라온 책장이 놓여있었는데, 책보단 사진과 감사패, 상장 등의 물건이 더 많아 보였다.
‘이게 다 뭐야?’
수연이 프린터를 가동하는 동안 난 방 안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누군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속의 인물들은 모두 검은색 정장이거나 군복차림이었다.
“안전기획부?”
인물사진의 배경에 선명히 박힌 현판. 난 그제야 시계와 감사패, 공로장에 적힌 ‘국가안전기획부’란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연아... 너희 아버님 혹시...”
내 질문에 맞춰 ‘따딱따닥’ 거리는 도트프린터의 소음이 귀를 때렸다.
“뭐라고?”
책상을 짚은 채 프린터를 바라보던 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원피스의 선은 길고 잘록한 허리와 적당히 벌어진 골반, 동그랗게 자리 잡은 엉덩이이의 실루엣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허리를 약간 숙였을 뿐인데 허벅지가 모두 드러날 만큼 짧은 치마가 되었다.
“대영아.”
프린터 소음에 묻혔지만 가까이 오라고 말과 손짓으로 얘기한 것 같다. 난 수연의 옆에 바짝 다가갔다.
“응?”
살짝 맨살끼리 닿은 팔에서 자기장 속의 자석처럼 ‘부르르’ 떨림이 느껴졌다.
우린 그 느낌을 모른척하고 한 줄 한 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검은색 활자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프린터의 소음이 멈추자 정적은 더 크게 느껴졌다.
강촌에서의 엠티와 명옥의 자취방...
갑자기 좁혀져 거리가 두렵기까지 하다.
수연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아까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아까?... 아...”
“무슨 얘긴데?”
“사진보다가 궁금해서...”
“아... 저기 울 아빠 회사 맞아.”
그렇게 흉측한 곳을
안기부를 수연은 회사라 불렀다.
하긴 흉측한 소문들은 십몇 년 전의 이야기였고, 예전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할 말이 그거였어?”
“아... 사진을 보다가 궁금해서...”
“난 또 뭐라고...”
수연은 프린터의 절단선을 따라 인쇄물을 잘랐다.
“전에 네가 했던 말 있잖아.”
“뭐? 어떤...”
“사귀자고 했던...”
“풉,”
“......”
난 진지하게 말했는데 그녀는 왜 웃음을 터트렸을까.
“아, 미안.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런데 그게 벌써 언제적인데...?”
수연은 오래된 얘길 왜 지금 꺼내냐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다. 짓궂은 얼굴이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더니 뺨이 화끈거린다. 아마 귓불까지 빨개졌을 것이다.
교내 동기 중 누구도 수연의 이런 모습은 알지 못할 것이다.
‘고백은 자기가 해놓고...’
“나도 좋아해. 너 좋아한다고.”
그러나 수연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너도 참 딱하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엠티 다녀와서 바로 얘기할 줄 알았는데, 넌 쳐다보지도 않았잖아.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선...”
“그건 네가...”
“그럼 나 화나 있던 것도 몰랐겠네?”
“화났었어?”
“내 그럴 줄 알았어!”
수연은 출력된 종이를 빼내 들고 카우치에 앉았다. 당겨진 원피스 아래로 허벅지가 드러났다.
“한 번 더 읽어보자. 이리와 앉아.”
달라붙는 옷은 아니었지만 천이 닿는 부분은 굴곡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의 몸매까지 상상하게 했다.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과 편한 옷차림은 경계심 없는 움직임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드러나는 수연의 속살로 나는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빨리 앉아.”
수연은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하얀 목선과 허벅지를 노출한 그녀 옆에 앉았다.
“읽어줄까?”
“응.”
“건축학개론 근현대건축물 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연에게 입을 맞췄다.
달콤한 사과 향이 났다.
“흐음.”
몸을 붙인 채 수연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책장에 몸을 기댄 모양이 되었고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둘 곳 없어 머무른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긴장과 땀으로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입술을 떼려 하자 수연의 얼굴이 따라온다. 난 다시 숨을 몰아쉬고 그녀의 입술을 모두 삼켜버렸다.
“흐흡...”
수연이 주먹으로 가슴을 가볍게 ‘툭툭’ 밀어낸다.
“깨물면 아파...”
“아, 미안...”
나는 당황하여 몸을 뺐다.
“그런데... 너 웃기다.”
“왜?”
“고백도 안 해놓고 키스하고 가슴 만졌잖아. 그것도 명옥이네 집에서...”
수연은 열꽃이 핀 것처럼 얼룩덜룩 달아오른 얼굴로 ‘피식’거리며 웃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델 것처럼 빨간 얼굴을 해 갖고선...
“그럼 이제 가슴 만져도 되겠네?”
“뭐?”
갑자기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어 수연의 몸을 당기자 중심을 잃은 그녀가 나를 안고 넘어졌다. 그녀의 가슴에 ‘철퍽’ 하고 부딪힌 순간 탄력을 가진 뭉클함이 느껴졌다.
입술을 가져가자 수연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팬티라인을 스치듯 손이 지나가자 원피스의 치마도 함께 올라갔다.
“하으으응...”
가슴을 만지면서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봤지만, 그녀는 잠깐 움찔할 뿐, 거부하지 않았다. 까슬까슬한 순면 팬티에 손가락이 닿아도 수연은 반응이 없다.
“하아, 하아압...”
그녀의 모든 감각기관이 키스에 집중된 것 같았다.
엇갈리며 스치는 혀의 느낌 때문에 정신을 잃은 걸까. 혀끝으로 입천장을 간지럽히자 수연은 목을 뒤로 꺾으며 몸을 들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