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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화 - 혼숙 [1]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 연선누나와 수연, 명옥, 그리고 나는 2호선 신천역 근처에서 만났다. 나는 세훈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조를 탈퇴하지도 못했다. 수강 신청취소나 학점 포기를 할 수 있었지만, 틀림없이 하림의 귀에 들어갈 테니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분명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고 하림이 말했어.“ 지금의 내 행동엔 하림의 책임도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 중이었다. “언니, 이런 곳에서 버스가 설까요?” 우린 표지판이나 정류장이 없는 평범한 아파트촌 사이의 이면도로에 서 있었다. “그러게.. 나도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들어서..” 누나도 내심 걱정되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내 배낭을 멘 등산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줄이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12시 30분에 도착한 버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탑승해 있었다. 오색까지 가는 심야 전세버스였다. 우린 당일치기 일정으로 가장 빨리 강릉에 도착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내가 삼각대를 버스의 짐칸에 싣는 사이 명옥과 수연은 뒤쪽의 창가 자리를 하나씩 잡았다. 나는 얼떨결에 명옥의 옆자리에 앉았고, 조금은 아쉬워하는 수연의 눈길이 느껴졌다. 나는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었고 중간 검문소에 버스가 멈춘 기억이 난다. 헌병에게 신분증을 보여준 뒤 다시 잠을 청하려 할 때 머리를 기댄 명옥이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버스는 휴게실에서 잠시 정차했고 중간 경유지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차했다. 그리고 컴컴한 새벽 다섯 시에 우린 목적지 오색에 도착했다. ‘이곳이 설악산이라는 곳이구나.’ 초행길이었던 우리는 방금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을 붙잡고 길을 물어야 했다. “여기서 강릉 시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강릉? 아이고 거기까진 아직도 먼 길인데...” 남자는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알려주더니 서둘러 헤드 랜턴을 켜고 숲으로 사라졌다. 우리 일행만이 숲속 도로에 남겨진 것이다. 차가운 공기에서 박하향이 났다. 우린 띄엄띄엄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한 시간 가까이 걸어 내려갔다. 고생문의 시작이었고 겨울처럼 추운 날씨였다. 힘겹게 도착한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0분을 기다린 후에 시내로 가는 첫 버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두 번째 갈아탄 강릉행 시내버스 안에서 우리는 일출을 맞았고, 오전 8시가 조금 넘어서 강릉 변두리에 위치한 적산가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했다...” “우리 큰일 났어. 언니...” 어렵게 찾아간 적산가옥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멍하니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사람 사는 곳이니?” 문 앞엔 연탄재와 쓰레기가 가득했고, 오랫동안 방치된 목조주택은 폐가를 보는 듯했다. 벽을 타고 올라간 덩굴식물과 잡초는 아직 음침한 겨울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언니, 책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데?” “그래도 연탄재를 보니 사람이 사는 것 같아요.” “어쩌지.... 내 잘못이야.” 자책하는 연선누나를 위로할 겨를도 없을 만큼 우리는 절망했다. 그만큼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안동이나 전주로 알아볼까? 큰일 났네.” 리포트의 마감 기한은 열흘 정도 남았지만, 평일 시간을 뺄 수 없는 우리에겐 오늘이 답사가 가능한 마지막 하루였다. <끼이익> 그때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오더니 절뚝이며 지나갔다. 집 관리가 안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나, 우리가 이곳을 청소해 드리면 어떨까요?” 난 연선누나에게 말했다. “응?” “쓰레기와 넝쿨, 잡초만 정리하면 제법 고택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그런가... 너희 생각은 어때?” “전 찬성이에요.” “하늘도 파랗고 사진찍기엔 죽여주는 날씨야.” “유리창에 반사된 구름 봐.” 카메라를 든 명옥이 셔터를 누르며 말한다. “할머니 몸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 좋은 일도 하고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우린 할머니에게 빗자루와 쓰레받기, 호미를 빌렸고, 철물점에서 물 호스와 커다란 비닐봉지를 사 왔다. 고택의 담벼락과 기둥을 타고 올라간 넝쿨을 걷어내고 마당의 성긴 잡초도 뽑아냈다. 쓰레기를 모아 밖으로 내놓고, 바지를 걷고 맨발로 바닥 석을 닦았다. 수연도 빗자루질하며 거들었다. “수연아, 치마에 물 튀어. 넌 쉬고 있어.” “아냐, 괜찮아.” 수연은 펄럭이지 않도록 치맛단을 다리 사이에 모아 잡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고 해를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처럼 그녀의 피부가 하얗게 빛났다. “대영, 너 왜 자꾸 수연이만 챙겨?” “챙기긴 무슨...” 우린 청소를 끝내고 물기가 마르는 동안 할머니와 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쓸쓸해 보이는 적산가옥의 대문 앞에 카메라를 걸고 모두가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찰칵!> 강릉의 적산가옥에서 저녁까지 얻어먹은 우리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다. 다들 눈에서 잠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하림에게서 받은 핸드폰을 열어보지만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먼저 전화할 일 없을 거라는 그녀의 말처럼 오늘 핸드폰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아직도 천안인가?’ “명옥이랑 대영이 우리 집에서 잘래? 어차피 기숙사 문 닫혔잖아.” “언니 난 상관없어.” “저는 현모형 집에서 잘게요.” 실은 하림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불편하게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자. 고생한 사람들끼리 간단히 뒤풀이라도 해야지.” “누나 집은 추워요. 여럿이 잘만한 장소도 없고...” 누나의 작업실은 방이라 할 수 없는 입식 구 조인 데다, 침대 둘이 간신히 누울 만큼 작은 사이즈였다. “너 연선언니랑 친하구나? 거기서 자봤어?” “나? 자기 내가 거기서 왜 자...” 난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흠흠, 수연인 집이 고속버스터미널 근처라고 했던가?” 대화에 끼어든 연선 누나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언니, 저도 재워주시면 안 돼요?” 갑작스러운 수연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난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허락받아야 하잖아.” “수연아, 우리가 전화해볼까?” 명옥이 수연에게 말했다. “그럴래? 그래 줄 수 있어?” “뭐 어려운 일이라고... 대영아, 전화기 좀 빌려줘.” “그래. 여기...” 나 역시 지금은 수연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혼자 택시 태워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결국, 실례를 무릅쓰고 연선누나가 수연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니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너희 어머니 목소리 젊으시더라.” “대영아, 이 번호로 전화하실지 모르니까 전화 잘 받아. 남학생이 옆에 있는 거 알면 놀라실 거야.” “알았어요.” 수연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일행이 늘어난 우리도 활기가 넘쳤다. 네 명이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 앞 명옥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추위에 떨며 고생했으니 연선누나의 작업실 대신 온돌이 있는 명옥의 집으로 목적지를 바꾼 것이다. 차가운 밤공기에 잠은 달아났지만, 허기를 느낀 우리는 근처 슈퍼에서 장을 봤다. 명옥의 집은 작은 정원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길고 낮은 담을 지나 작은 쪽문을 열자 명옥이 사용하는 작은 현관문이 보였다. 반지하라던 명옥의 집은 길가 도로보다 세 뺨 정도 낮은 1층 같은 지층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길쭉한 형태의 복도가 보였다. 현관 좌측에 화장실이 있었고 복도 끝에 방문이 보인다. 말하자면 그 복도가 주방 겸 마루, 보일러실인 셈이었다. “춥지? 복도는 보일러가 안 들어와.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명옥은 보일러를 먼저 켰다. “수연이 먼저 씻고 올래?” “나? 내가 먼저?” “오늘 치마랑 구두 때문에 불편했잖아.” 수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쟨 왜 또 얼굴이 빨개지고 그런 거야?” “원래 부끄러움이 많은 애잖아. 대영이도 옆에 있고...” 여자들이 먼저 화장실을 쓰는 동안, 나는 방을 정리하고 상을 폈다.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가구가 없어 좁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씻고 나왔을 땐 모두 얼굴이 벌게진 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얘들아, 라면 들어간다~” 연선 누나가 라면을 끓여왔다. 냄비가 작아 5개만 끓였다던 라면은 말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졌다. 수연의 젓가락도 멈추질 않았다. “수연인 라면 못 먹는 거 아녔어?” “학교 들어와서 배웠어요.” 밖에서 사 온 맥주가 떨어지고 대화도 간간이 끊어질 즈음, 모두 하품을 반복한다. 피곤이 밀려온 것이다. “명옥아, 내일 일요일인데, 여기서 늦잠 자도 될까? “그래요, 방이 작아서 다닥다닥 붙어 자야겠지만...” “기숙사 방은 이보다 작아.” “것보단 대영이가 밤에 돌변할까 봐 그러지.” “대영이가요? 저 숙맥이? 하하, 한번 보고 싶네.” 명옥과 연선누나가 수다를 떠는 사이 나는 수연과 상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내가 설거지할게. 넌 들어가 있어.” “아니야, 같이 해.” “싱크대도 좁고 바닥 차가워. 얼른 들어가 쉬어. 너 오늘 피곤했잖아.” “그럼 내가 이불 펴 놓을게.”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 보니, 모두 누워 졸고 있다. “내 자린 어디야?” “벽 쪽 끝에 이불 깔린 자리야.” “나만 보료가 있어?” “바닥 이불은 한 갠데 수연이가 네 자리에 깔더라고.” “수연아 땡큐.” 방에 불이 꺼지고 나는 벽 끝에 누웠다. 내 옆으로 연선누나와 수연, 명옥이 차례대로 자리를 잡았다. “누나, 좁으니까 넘어오지 말아요.” “너, 권태훈처럼 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 “푸하하하” “답사도 둘이 다녀온다고 하던데.” “커플이잖아.” “했겠죠?” “아마도.” “콜록콜록.” “야, 그만해. 수연이 사레 걸렸잖아.” “전 여자들은 그런 농담 안 하는 줄 알았어요.” “크크크.” “수연아 진정해.” 한참 동안 수연인 사례에 걸려 고생을 했다. 나는 수연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배는 불렀고 바닥은 서서히 따뜻해지고 있었다. * * * 갈증 탓인지 몸을 뒤척이는데 옆자리 연선누나가 기척에 눈을 떴다. ‘역시 깊은 잠은 무리인가.’ 수연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연선누나가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나 화장실로 갔고, 누워있는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의 오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저렇게 시끄럽게...’ 그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 잠결에 움직인 것처럼 몸을 굴리더니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것이다. 의도된 동작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가슴이 뛰어 진정되질 않았다. ‘어쩌지. 얘가 왜 이래?’ 수연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가 정말 잠든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고 우린 얼굴을 마주 보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수연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을 때 쌔근거리던 수연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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