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27화 - 되살아난 기억
시간은 별일 없이 흘러갔다.
진영누나와 세훈은 학교에서 제법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혜영 누나의 졸업 전시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성철 선배와는 다시 만난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나 역시 바쁘지만, 무료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마친 후엔 하림의 집에서 그녀의 육체를 탐닉했다. 난 거의 매일 그녀와 섹스를 했고, 평균 두세 번씩 하림의 몸 안에 정액을 쏟아냈다. 일주일에 하루 이상을 외박했으며, 그녀의 가족 외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연애를 이어갔다.
그래서인지 학교 친구들과는 조금 소원해진 상태였다. 현모는 선미에게 빠져 수업 시간 외에는 얼굴 보기 힘들었고, 수연은 어쩐 이유에선지 나를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겉돌다 보니 연선누나 일행과도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고 5월이 되자 교양과목들 위주의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자 여러분, 이제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기간이죠?”
“네~”
우린 <건축학개론> 교수님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예고한 대로 중간고사는 조별 리포트로 대체할 겁니다.”
계단식의 종합 강의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학생들 대부분 조별과제를 처음 접해보는 데다, ‘근현대 건축물 체험’이라는 주제 역시 제법 난이도가 있어 보였다.
“세훈아, 넌 계획 있어?”
난 옆자리 세훈에게 함께 해보자고 권유할 참이었다.
“조별과제 리포트?”
“응.”
“아. 미안. 난 진영누나랑 둘이 하기로 했어.”
낭패였다. 이 클래스에서 아는 남학생은 권세훈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래. 알았어. 할 수 없지.”
내가 낙담하고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영! 너 우리 조 들어올래?”
“4명까지라고 했으니까 네가 들어오면 딱 맞겠다.”
연선누나와 명옥이었다.
그리고 수연이 함께 앉아있었다.
“할거지?”
명옥이 생글생글 웃으며 답을 재촉한다.
하필 수연과 같은 조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강촌에선 멋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렸고,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와선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무덤덤했으며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 조에 들어오는 거지?”
“왜? 싫은거야?”
내가 하림 미술학원을 관둔 것도, 매일 하림과 섹스 하는 사이란 사실도 비밀이었다. 뚜렷한 대상 없는 죄책감이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아... 아뇨. 저야 고맙죠.”
사실 나로서는 감사한 제안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30분 후에 학관 휴게실에서 볼까? 답사 일정도 짜고 각자 할 일을 나눠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 * *
학관 휴게실은 처음 들어와 본다. 백평 쯤 되는 큰 홀에 자판기가 몇 대 있었고,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먼저 도착한 수연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누나랑 명옥인 아직 안 왔어?”
어쩔 수 없이 먼저 아는 척을 해버렸다.
“도서관갔어. 금방 올 거야.”
“커피... 마실래?”
“응... 좋아.”
난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고 급하게 돌아섰다.
빠르게 지나간 몇 주의 시간 때문인지 둘만의 시간이 어색했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는 손이 살짝 떨렸다.
“고마워 윤대영.”
‘또 윤대영...’
“우리 엠티 이후로 처음이다. 그치?”
“... 그렇지?”
수연이 엠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그날 밤은 덕분에 따뜻하고 좋았어.”
“풉!! 오, 오늘 날씨가 좋네.”
나는 급하게 말을 돌린다.
그러나 밖은 찌푸린 하늘과 강한 바람 때문에 제법 추운 날씨였다.
캠퍼스에 떨어진 봄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너 이런 날씰 좋아해?”
‘피식.’
그녀가 피식 웃는다. 비웃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쭙잖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웃었다.
“대영아, 시간 괜찮으면 우리 밥 먹을래?”
“밥? 밥을 먹자고?”
“응. 모임 끝나고 남문서 만나.”
“우리 둘이?!”
엉겁결에 너무 큰소리를 냈다.
“응. 너랑 밥 먹고 싶어.”
말없이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
표정 없이 대화하고 곁을 주지 않는 아이.
그래서 모두 차갑다고 얘기하던 아이가 나에게 밥을 먹자고 한다.
대답을 망설이며 멍한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는 사이, 명옥과 연선누나가 학관으로 들어왔다.
“너희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니?”
“여~ 박수연 너 말할줄 아네?”
“답사지 얘길 하고 있었어요.”
“그래 맞아. 답사질 먼저 결정해야지.”
우린 긴 회의 끝에 강원도 강릉으로 답사지를 정했다.
아르바이트로 바쁜 나와 외박이 불가능한 수연을 배려해 당일치기가 가능한 장소를 고른 것이다.
명옥이 도서관 자료를 찾기로 했고, 발표자는 연선누나가 맡았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은 연선누나와 명옥이 함께 하기로 했고, 말주변이 없는 수연은 자료정리와 워드작업 담당이 되었다.
“전 뭘 하죠?”
“그러게... 그러고 보니 대영이가 의외로 쓸모가 없네.”
“답사지에서 보디가드 해야지. 힘세잖아. 너.”
“대영인 수연이 작업 보조해라. 할 거 없으면 커피라도 타.”
연선누나는 나를 박수연의 작업 보조로 붙여놨다.
회의 도중 가끔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뛰어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고 예쁜 두상과 또렷한 이목구비, 검은 눈동자를 가진 수연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녀를 더욱 지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난 회의를 끝내자마자 교내 우체국 옆 공중전화부스부터 찾았다.
<여보세요.>
다행히 하림이 직접 전화를 받는다.
“나야.”
<어 윤쌤. 웬일이세요.>
아마도 주위에 수강생이나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아, 수업 중인가요?”
<네. 수업 중입니다.>
“아, 그럼 1분 후에 다시 걸겠습니다.”
<네, 윤쌤 지나가다 꼭 들러요. 건강하시고요.>
난 학원을 관둔 상태였고, 학원생들에겐 우리의 연애가 비밀이었다.
1부터 60을 센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주위에 누구 있어요?”
<아뇨. 나 지금 원장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일?>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서...”
<아, 정말? 많이 늦어요?>
“아니 많이는 아니고...”
<저녁은요? 오늘 초밥 포장해가려고 예약해놨는데...>
잠깐의 침묵이 너무도 길고 불안했다.
<대영씨,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그동안 과제가 밀렸잖아.”
<과제요?>
사실이었다. 난 몇 주 동안 하림의 육체에 빠져 살았으니까.
“너무 밀렸어.”
<아... 그럼 오늘은 들르지 말고 과제 해요. 내일은 올 수 있죠?>
“응...”
<내일은 자고 갈수 있어요?>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같이 자고 싶어?”
<응! 난 매일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거야?”
<이그, 정말... 난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하는 사람 맞아? 어제도 먼저 올라탔...”
<됐어요. 저 수업중이라 끊을게요.>
“......”
<왜 말이 없어요?>
“끊는다며...”
<풉,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내일 봐요.>
“하고 싶냐고.”
<대영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전 몇 번이든 좋아요.>
“누나...”
<모야... 뭔 얘길 꺼내려고 그렇게 부르는데...>
“나 많이 사랑하지?”
<호호호...>
“......”
<대영씨는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사랑한단 말로 모자랄 만큼...>
“그래 고마워.”
5월이지만 어느새 해가 지고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캠퍼스를 방황하다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너무 늦었나 싶어 남문까지 뛰어 내려갔다.
“미안, 기다렸지?”
역시나 수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무릎까지 내려온 수연의 베이지색 치마가 저녁 해를 받아 붉게 빛이 났다.
‘아깐 바지였는데...’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수연을 치마의 끝단을 밑으로 끌어 내린다.
“치마가 너무 짧은가?”
“아냐... 이, 이뻐...”
왜 이렇게 심장이 쿵쿵거릴까. 나 때문에 옷까지 갈아입은 거라면...
감정이 앞서나가지 않도록 자제하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뭐, 뭐 먹을까?”
“나 우동. 우동 먹고 싶어.”
“우동?”
나에게 우동이란 간단하게 먹는 저렴한 음식이었다. 내 고향 충무의 다찌집에서 내오는 기본서비스 안주이기도 했다.
“쌀쌀한데 우동 좋지! 아는 데 있어?”
“응!”
우린 화력발전소를 지나 골목 끝에 자리 잡은 메밀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전 기본 우동 주세요.”
“그럼 나도 우동을...”
“아냐 넌 다른 거 먹어. 여기 음식들 궁금하단 말야.”
내가 강촌에서 겪었던, 밝고 수다스러운 모습이 다시 보였다.
그때의 기억들로 가슴이 다시 몽글몽글해진다.
“그럼, 우동이랑 소바 하나씩 주세요.”
주문이 끝나자 따뜻한 메밀차가 나왔다.
“넌 여기 어떻게 알아? 대로변도 아닌데.”
“우리 실기시험 보던 날 기억나지? 소묘시험.”
“그럼, 당연하지. 엄청 추웠잖아.”
“그때 시험 마치고 아빠가 여기서 우동 사주셨어.”
“그랬구나.”
“대영이와 다시 오고 싶었거든.”
나와 다시 오고 싶었다고?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난 일부러 수연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소바가 뭐니? 첨 듣는 이름이야.”
“음식 나오면 나눠 먹어 보자.”
나눠 먹자고?
나는 위생에 대해선 너그러운 편이라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수연과 국물음식을 나눠 먹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소바 어디에 놔드릴까요?”
메밀국수가 먼저 나왔다.
“가운데 놔 주세요. 나눠 먹을 거예요.”
수연이 메밀면을 덜어 숟가락 위에 올리더니 국물을 적셔 내게 내밀었다.
“자, 아~ 해봐.”
수연은 한 손을 수저 아래에 받쳐 들고 나를 재촉했다.
“어, 고. 고마워. 내가 잡을게.”
나는 수저를 건네받아 면을 삼켰다.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때? 보기보단 맛있지? 조금 심심한가?”
“아냐. 맛있어... 맛있네.”
그리고 우동이 나왔다.
내가 알던 우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질그릇에 담겨 나와 국물이 뜨끈해 보인다는 정도였다.
“사실 나는 이런 부드러운 음식 밖에 못 먹어.”
우동면을 덜며 수연이 말했다.
“왜?”
“밥 먹다 이가 부러진 적이 있거든.”
“뼈가 약한가?”
“응. 선천적으로 아주 약하데...”
“아...”
“그래서 이다음에 결혼하면 출산도 하고 아기 젖도 먹여야 할 텐데... 그런 평범한 일들이 무서워.”
그런 얘기를 왜 굳이 내게...
“우동도 먹어 볼래?”
수연이 우동을 담아 다시 내게 내밀었다.
방금 수연이 먹던 그 숟가락이다.
“뜨겁겠다.”
수연은 내 눈앞에서 입김을 ‘후~’하고 불었다. 그녀의 살 냄새가 난다. 향긋하고 포근한 수연만의 살 냄새였다.
“뜨거워 조심해. 너도 이가 빠지면 안 되잖아. 후훗.”
“그래, 크크. 고마워.”
그 늙은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수저를 건네받아 우동을 삼켰다.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먹을게.”
수연에게 새 수저를 주려고 수저통을 여는데, 손이 잠깐 떨렸는지, 먹던 수저가 수연의 우동 그릇에 빠지고 만다.
“아, 미안.”
“대영아, 나랑 먹는 거 불편해?”
“아냐, 그럴 리가...”
수연이 나를 쳐다봤다.
“먹던 수저를 빠트렸으니 어쩌지...
바꿔 먹을래? 내가 우동 먹을게.”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양손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나눠 든 자세로 나를 쳐다봤다.
‘뭐지? 이 느낌...’
지금 그녀의 표정과 자세가 낯설지 않다.
마치 전부터 알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훗, 너 그날이랑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