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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03화 - 진영의 옥탑방 [1]


일요일. 우여곡절 끝에 아침을 맞았다. 진영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영 언니, 새벽에 떠났어. 걱정 안 해도 돼. 동기 명옥이 슬쩍 다가와 알려준다. 분위기는 살벌했다. 특히 여자 동기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 성추행범이 된 세훈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와? 뭔 일 있나?” 냄비 밥을 짓던 현모가 다가오더니 불쑥 말을 건다. “나중에 말해줄게.” “와? 몬 데?” 현모를 제외한 대부분이 어젯밤의 일을 아는 것 같았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1박 2일 먹을 양으로 장을 봐왔지만 결국 한 끼도 해 먹지 못했다. 남은 음식 재료는 자취생끼리 나눠 갖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즉석국과 쌀밥으로 아침을 해결한 우리는 예매했던 표를 입석으로 바꿨다. 세훈이 안타까웠던 나는 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청량리역에 도착한 우린 별다른 인사 없이 각자 뿔뿔이 헤어졌다. 최악의 첫 엠티였다. * * * “대룡식당에서 반주 한잔 하자.” “안 돼. 거긴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대룡식당은 우리 과 학생들이 자주 찾는 닭곰탕 집이었다. 우린 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런데 넌 왜 집에 안 가고 학교로 오는데?” 세훈의 집은 강남이라고 들었다. “도저히 이대론 못 가겠어.” 부티 나던 세훈의 얼굴이 지금은 탁한 잿빛이다. “그럼 고갈비 집으로 가자.” 주문하자마자 주방에서 갈비 굽는 냄새가 풍긴다. 갈비 양념 된 고등어 한 손을 바싹하게 구워낸 백반메뉴를 고갈비라 불렀다. “냄새 좋다.” “그러냐?” 정신 나간 놈. 그래도 후각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여학생회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을 벌여놓고, 태평이다. 그렇지 않아도 입안이 까끌까끌했는데 지금은 쓴맛이 돌았다. “그래서 어쩔 셈인데?” “후우... 그러게 어쩌면 좋겠니.”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했나 싶기도 하고, 조금 나긋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과부터 해.” “대영아, 난 사실 누나 좋아했다.” “흠….” “안 놀라냐?” 놀랬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세훈이 놀라웠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 일을 다른 애들도 알게 됐어. 특히 여자애들이…. 다음 주엔 전교생이 알 텐데, 그건 어쩌려고?” “다른 사람 시선은 상관없어.” “휴우우….” “진영 누나도 네가 좋아하는 거 알아?” “아니 모를 거야, 그런데 이제 고백하려고.” “잠을 좀 자둬. 잠을 자야 머릿속 생각이 정리된다.” “그래, 그런데 나는 지금도 누나가 보고 싶다.” 사랑의 감정은 숨기기 어렵다. 세훈의 얼굴이 바로 그랬다. * * * 월요일 아침. 실기실 공기가 무거웠다. 진영 누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세훈은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누나가 전화를 안 받아. 삐삐 응답도 없고….” “월요일이잖아. 좀만 더 기다려보자.” “나 아무래도 찾아가야겠어.” “지금? 어딜?” 흙 통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세훈은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곧 수업 시작이야.” “심장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떨고 있었지만 비장한 목소리였다. 세훈은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 * * 세훈은 버스를 타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본 적이 없다. 아직 4호선이 성북구까지 연결되지 않은 시기였고, 그 때문에 곳곳이 지하철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누나는 매일 이렇게 다녔던 거야?’ 세훈이 탄 7번 버스는 혜화를 지나 성신여대까지 도착하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주소만 보고 찾아갈 수 있을까….’ 동선동 2가 365-3 ‘동선동’은 지하철역 사거리와 주변 500미터 이상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작은 연립과 주택들이 붙어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략 이쯤인 것 같은데….’ 돈암동 성당 앞. 세훈은 두리번거리며 작은 슈퍼가 있는 골목을 서성거렸다. * * * 진영은 아까부터 골목 입구를 서성거리는 세훈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아는 척을 하기에도, 계속 모른 척 등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의 모습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여긴 363-7인가...?” 우편함에 적힌 번지수를 확인하고 있던 세훈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등장했다. 진영이었다. “엇, 누나!” 불과 5~6미터 앞 2층짜리 주택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찾았다! 누나 집!”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진영은 팔짱을 낀 채 짐짓 차가운 목소리를 낸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짚업 상의와 핑크색 돌핀 팬츠를 입고 있었다. 세훈은 진영의 허벅지를 보자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누나….” 세훈은 당황하여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냉정한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진영은 더 매섭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주눅 들어 보이는 어린 동생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더구나 이곳은 소문이 무서운 작은 골목이었다. “할 말 없으면 난 들어간다.” “저, 저기 누나!” 진영이 등을 보이자 세훈은 황급히 그녀를 멈춰 세운다. “뭔데?” “......” 세훈은 말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다. “듣고 있다고.” “누나…. 학교 왜 안 나왔어요?”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 “동생이 아팠어.” 동생이 있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지만, 세훈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동선동의 골목길을 헤매며 수백 번 연습했던 말들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왔냐고!” 진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다그친다. 세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돌아가.” “......” “모레쯤 학교에서 보자. 할 얘기 있으면 그때 해.” ‘철컹’ ‘탁탁탁탁’ 철문을 닫고 진영은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아직 세훈은 문밖에 그대로 서 있다. ‘아휴~ 저 답답이….’ 진영은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세훈에게 소리친다. “너, 왜 계속 그러는데?” 세훈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참다못한 진영이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신경질적인 발소리였다. “사람들 쳐다보니까 올라와.” 세훈은 진영을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앞선 채 계단을 오르는 진영의 엉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세훈은 민망한지 고개를 떨구고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오르자 맑은 서울 하늘과 멀리 북한산이 보였다. 커다란 물탱크가 늘어선 옥탑방의 군락이 지평선을 만들고 있었다. “자, 이제 얘기해.” “여기가 누나 집이에요?” “옥탑방 처음이야?” “네. 전망 좋네요.” “2층짜리 주택인데 전망은 무슨….” “저기가 북한산인가요?” “몰라.” 진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았다. 세훈이 기억하는 그녀는 다정하고 따뜻한 옆자리 누나였다. “전망은 좋은데…. 여자 혼자 위험하잖아요” 낮은 담이 있었지만, 옆집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맘을 먹는다면 옥상으로 충분히 넘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이 동넨 다 이런 식이야. 그리고 여기 너보다 위험한 사람 없거든.” “앗, 아아….” 세훈은 부끄러웠다. 그날밤 누나의 나신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진영은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가볍게 치며 세훈에게 말했다. “세훈아, 여기 잠깐 앉아 볼래.” 세훈은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너 여기 왜 왔는지 알아.” 세훈은 또 얼굴이 붉어진다. “그날 일…. 때문이지?” “누나….” 그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그녀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 허벅지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신고하거나 다른 누구에게 말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니?” 뭐라고? 전혀 상관없었다. “괜찮아. 그러지 마.” “누나아….” 세훈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난 세훈이가 착한 애인 거 알아.” 그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세훈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학교 다녀…. 응?” 세훈이 자리한 평상 아래에 눈물 떨어진 자국이 생긴다. “너 울어?” “흑흑, 누나 죄송해요.”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네가 왜 울어.” 진영은 세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세훈의 어깨가 살짝 떨린다. “그만…. 그만 울어” 평상을 짚고 있던 세훈의 팔이 떨렸다. 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사내자식이 그깟 일 갖고 울어? 우리가 뭐 대단한 거 했어? 그냥 뽀뽀였잖아.” “제가 누나 좋아했어요.” “세훈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걱정 많이 했어요.” 진영도 눈시울도 붉어지기 시작한다. “누나 화 많이 났을까 봐, 그래서 다시는 얼굴 못 볼까 봐, 걱정했어요.” “세훈아, 잠깐만.” 진영은 말을 끊으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누나가 신고할까 봐, 다른 사람에게 말할까 봐 걱정한 게 아녜요!” 터져버린 둑처럼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난 계속 누나 생각만 하고…. 여기까지 오면서도….” 잘 듣던 귀여운 동생이 진영의 앞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미움과 원망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세훈은 갑자기 진영의 얼굴을 낚아채더니 거칠게 입술을 들이댄다. 그것은 키스라고 할 수 없는, 접촉사고 같은 것이었다. “야! 풉, 아프잖아~” 헛웃음이 나오는 어설픈 입맞춤였다. “요놈 아주 맹랑하네. 어디 벌써 어른 흉내를 내려고….” 진영은 손을 들어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한다. “따라와!” 진영은 세훈의 손목을 잡아끌고 옥탑방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보일러와 세탁기, 그리고 싱크대가 놓여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딸깍’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너 입술에 피나잖아.” 진영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너 키스도 처음이야?” “누난 많이 해봤어요?” “하아…. 너도 참….” 진영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리고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네가 무서웠어.” “네?” “나를 가벼운 여자로 볼까 봐 무서웠고, 친구들한테 ‘내가 따먹은 애야.’라고 말할까 봐 무서웠어.” “누나 어떻게 그런….” “알아, 네가 그런 아이 아닌 거 알지만, 그냥 무섭더라….” “......” “그래서 학교 못 간 거야. 네가 너무 무서워서….” 진영은 세훈의 입술에 난 핏자국을 손으로 닦았다. “아까 옥상에서 너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몰라.” 그녀는 쉴 틈 없이 말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갈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원래부터 말이 많았던가. “그런데 네 얼굴 보니까, 핼쑥해진 네 얼굴을 보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반가웠... 웁!” 세훈이 진영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빨아 당기자 민트향이 났다. 진영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진영은 말없이 방문을 열고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해를 받은 작은 방은 붉고 노란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동생분은요?” “걘 며칠 안 들어와. 맹장이 터졌어.” 둘은 좁은 싱글 침대에 걸터앉았고, 세훈이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 “크크, 너 입술 터졌거든.” 진영은 세훈의 입술을 핥았다. 쇠 맛이 났지만, 그마저도 향기로웠다. 목을 안고 팔을 두르자, 세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티셔츠 밑으로 손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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