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EP061-믿음
‘A랑 단둘이 있게 해달라고?’
‘그래.’
어차피 네 관심, 네 목적은 여기가 아니라 저 아래에 있잖아.
반대로 내 볼일은 이쪽에 있거든.
못해줄 이유도 없지?
“…….”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살짝 비켜나 잠시, 가만히 기다리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두 명의 발소리.
“아무리 그래도 테러 가능성이 있는 현장인데… 승윤 씨를 혼자 두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더스트 씨?”
“괜찮아. 이 건물도 1층에서 통제하고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구출 작업이 우선이야. 본인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고.
아무리 헤이즈가 폭발 계열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하에서 특성을 쓰면 그대로 매몰될 가능성이 높아.”
충분히 두 사람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움직인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가면… 내 장난감이 무릎을 꿇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웃음은… 나오지 않네.
이상해.
나는 지금 그 어느 순간보다 재미있는데 말이야.
***
“…아.”
뭐지? 방금, 머릿속을 스쳐간 그거….
꿈? 환상? 망상?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 다, 당신은 왜 여기….”
“나는 당신을 담당하는… 의사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직업의식이 투철한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이상한 건지.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은지는 지금도 저 밑에서….
“저 아래에 여자친구가 갇혀 있는 건가?”
“…네.”
“음.”
“…….”
“지부장과 같이?”
“…….”
“닮았네. 지부장이 은퇴하게 된 그 날의 일과… 아주 닮았어.”
역시 달갑지 않은 여자다.
오자마자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부분을 콕 집어서 건드리고 있다.
“매몰된 건물의 잔해 아래에 고립된 여성 히어로 한 명, 그리고 지부장… 한 명이 더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
“그 당시에는 종마 프로젝트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수도 없이 받으며 스트레스가 꼭꼭 쌓여있던 지부장이야.”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미 몇 차례 떡도 치고, 입에 자지도 꽤 자주 물린… 취향에 딱 맞게 꼴리는 암컷이랑 갇혀버렸네.”
이 여자가 나타나자마자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역시 이상하다.
“왜 일어나려고 하는 거지?”
“…당신, 여기 왜 왔어요?”
“방금 말했을 텐데. 나는 당신을 담당하는 의사니까.”
“…….”
왜… 지금까지는 왜 눈치채지 못했지?
이 여자,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던 그 빌런이랑 제법… 닮았잖아.
분위기나, 외모,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꽤 비슷해.
설마… 아니, 분명….
“하나 묻지.”
“…….”
“당신의 연인이 저 아래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돌아와도, 예전처럼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나?”
불꽃이 인다.
건물 아래에서? 아니, 이 옥상에서… 정확히는 저 여자에게서.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나고 있는 호텔을 내려다보는 의사.
그 노을빛을 그대로 머금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다, 당신…?”
“대답해. 대답 안하면 죽일 거야.”
“…….”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두려움? 공포?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 앞의 이 여자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로 이어지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구출까지 몇 시간이 걸릴 지는 아무도 몰라. 감금된 시간 내내 지부장에게 탐해지고, 수도 없이 자궁으로 씨앗을 받아내며 더럽혀진 연인을.”
그려진다.
어둡고 좁은 공간 안에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돋아나 이성을 잃은 매튜 씨가 은지를 덮치는 모습이.
나는 매튜 씨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지부장… 그 남자도 물론 히어로지. 하지만 이성을 잃고 슈트를 벗어던진 채, 그저 종마의 역할에 충실한 수컷이 된다면?”
“…….”
“어차피 이 아래에서 있던 일은 두 사람만의 비밀이 될 테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
“…….”
“처음에는 힘에 압도되어 강간을 당하던 연인이 어느 순간 순종을 선택하고 직접 허리를 흔드는 거야.”
…아니다.
은지가 그럴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지는… 나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길을 찾고 있을 거다.
“종마… 그리고 그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S급 히어로. 완벽한 짝이지, 그렇지?”
“…….”
“모든 일이 끝나고 당신에게 돌아왔지만 자궁에는 이미 꾸덕한 좆물이 가득. 임신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겠지.”
“…….”
“연인은 괜찮은 척을 하겠지만… 이후로는 두 가지 삶을 병행하게 될 거야. 당신의 연인, 그리고 히어로… 겸, 종마의 짝.”
내가 원치 않는, 떠올리려고 노력한 적도 없는 망상이 자꾸만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에 그려낸다.
더없이 현실적이고 생생한 순간이 자꾸만 눈 앞을 가린다.
심장이 뛴다. 떨리는 것처럼 빠르게.
“당신과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어느 날, 당신에게 고백하는 거야.”
“…….”
“사실 이 배 안에 든 건… 지부장의 아이라고.”
듣기만 해도 역겨운 거부감이 올라온다.
그 고통을 즐기려고 하기엔… 괴롭다. 너무나도 괴롭다.
“어때? 당신이 기껏 죽음을 각오하고 살리려 했던 연인이 지금, 저 아래에서, 다른 남자의 여자로 변해가고 있다면.”
“…….”
“내가 말한 이야기대로 삶이 흘러간 끝에 진실을 마주한 당신은… 여전히 연인을 사랑해줄 수 있나?”
이 여자는… 빌런이다.
지금 내가 이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내놓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했던 것처럼, 내 머리를 살짝 주물러서 망가트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당신이 말한 얘기처럼… 그렇게 될 리가 없어요.”
“가능성은 충분해.”
“맞아요. 가능성은… 있죠. 하지만 저는, 믿어요.”
“왜?”
“…히어로잖아요.”
히어로, 영웅. 은지는 영웅이다.
특성이나 등급은 의미가 없다. 이미 각성하기 전에도 너는 나를 구했으니까.
“저 같은 평범한 시민이 히어로를 믿지 못하면… 히어로는 의미가 없는 존재잖아요.”
“힘이 없으니 가만히 믿기만 하고… 그 믿음에 배신을 당해도 탓하지 않겠다?”
“…….”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당신의 사랑까지 전부 배신당하더라도?”
“…배신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까지 이미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 나는 히어로를 믿는다는 나를 믿는 거야.
히어로인 헤이즈를 믿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인 은지를 믿는 거야.
콰아아아아앙-!!
굉음.
무언가 크게 터져 나오는 듯한 폭발음이 건물 아래쪽에서 들려온다.
간신히 시선을 돌려서 호텔이 있는 쪽을 내려다보자 익숙한 연보랏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건물의 잔해 속에서 난 커다란 구멍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한 사람, 한 영웅.
은지다.
“아… 아.”
“…봤죠? 제가 뭘 믿는지.”
“그래. 아주 잘 보이네.”
“…절 보고 있으면서 뭘 봤다는 거예요? 저 아래, 은지를 보라고요.”
“아니… 난 정확하게 보고 있어.”
의사가… 아니, 이제는 의사가 아니라 마스터마인드라고 해야 하나.
내 쪽으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한다.
분명 이 사람이 나에게 걸었던 피학 – 망상은 여전히 내 머리를 비틀고 있을 텐데….
어째서인지, 방금까지 느껴지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 기분이다.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맑다. 정신이 선명하다.
“어? 어어? 다… 다가오지 마세요. 오, 오지 말라니까요?”
“나는 말이야, 영화가 슬슬 끝날 것 같으면 그대로 영화관을 나가.”
“네?”
“난 모두를 만족시킬 완벽한 엔딩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나를 즐겁게 해준 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걸 원하기도 하고.”
“가,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놀이도 마찬가지야. 이번에는 그 끝을 보고 싶기도 했지. 하지만 역시 영화든, 이야기든, 놀이든… 이어지는 게 좋겠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여자는 가만히, 뚫어져라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내 옆에서, 옥상의 난간에 선 의사의 몸이 서서히 밖으로 기울어진다.
“어, 어어어!”
나와 은지를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지만, 내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난간 너머로 기울어진 의사의 팔을 붙잡고 간신히 옥상 쪽으로 끌어당기자…
기초적인 물리학, 작용 반작용 법칙으로 인해 이번에는 내 몸이 바깥쪽으로 넘어간다.
“에?”
“…병신.”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그대로 엄청난 높이의 고층 빌딩 옥상에서 떨어져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내 몸.
그리고, 낙하가 시작된 지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나를 낚아챈다.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던 나를 붙잡아준 사람은 당연히… 나의 영웅.
“오빠!”
“으… 은지야.”
히어로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네, 이거.
떨어지는 나를 공중에서 붙잡아 안아주는 너.
그리고 저 위, 옥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사악하고 못된 빌런.
권선징악? 글쎄, 영화에서는 그런 메시지를 꼭 전달하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저 여자가… 죽는 걸 바라지는 않아.
죗값은 알아서 적당히 치르게 될 테니까.
마지막에 한 말의 뜻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이게 만약 히어로 영화라면, 지금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거나 후일담이 나올 타이밍이지.
…아니지. 아직 한 명… 아니, 두 명이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