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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EP060-운


특성에 대해서 알게 된 직후 의사의 기억을 지워버린 건 꽤 훌륭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작은 아쉬움, 약간의 궁금증이 두 가지 남아 종종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으니. ‘내가 내 기억을 지우면 어떻게 되는 거지?’ ‘평균적으로 반나절이라고 했는데, 그 이상의 기억을 덮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려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내 기억이 더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매번 눈살을 찌푸리고 실망하며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기억을 남겨주기 싫어 특성을 사용하지만…. 정작 나는 내 끔찍한 취향과 그에 따르는 사람들의 기피를 전부 기억하고 있다. 때로는 이렇게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얼굴만 보고 멋대로 다가와서 좀 거칠게 대했다고 피하는 저 사람들이 잘못한 거야.’ 방어기제. 그런 초라한 핑계로 나를 변호할 수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귀게 된 지 곧 1년이 되어간다며, 1주년에는 같이 뭘 할지 재잘거리는 너를 보면. 벌써 1년이나 이렇게 나를 숨기고, 너를 사랑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신중하고, 조심한다면 네가 내 옆에 계속 머물러주지 않을까. 언젠가는 결혼을,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그렇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을 때 즈음에는 내 지독한 취향도 서서히 옅어졌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부풀린 기대감이 너무 컸던 걸까? 조금 이르게 빚어진 내 꿈은 너무 무거운 현실이 되어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게 찾아왔다. *** 여우가 말했다. 네가 네 시에 찾아온다고 하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그 작은 행복을 누리고자 항상 약간 이르게 약속 장소에 나와 너를 기다리고 있으면, 너는 웃으며 나에게 온다. 평소에는 늘 그랬다. 웃으며 다가와 손을 잡던 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긴장되고 굳어진 표정을 하며 다가온 너였다. “…뭐라고?” “나… 새, 생리를 안해. 할 때는 꽤 많이 지났는데….” 콘돔을 빼놓고 관계를 가진 적은 없다. 하지만 콘돔은 완벽한 피임구가 아니기에 너무 과신해서는 안된다. 운이 없었다는 말을 하며 세상의 탓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 “…….” “테스트기 써봤어?” “아니이…. 무, 무서워서.” “…오늘 해봐. 같이 보자.” 지금까지 실컷 즐겨왔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직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은지는 이제 겨우 대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나이라고. 나는… 아직 은지에게 숨기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언젠가 은지에게 모든 걸 털어놔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겁쟁이야. 그래도 1주년에는 조금이나마 솔직하게 말을 꺼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 “…후아.”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다. 임신 테스트기에 그어진 두 개의 붉은색 선을 마주하고, 잔뜩 굳어버린 은지를 간신히 집 앞까지 데려다준 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 한 마디를 건네었다. “괜찮을 거야.” “…웅.” ***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은 품삯은, 전부 너에게 줄 돈이었다. 하지만 은지의 부모님은 생각보다 더 엄격한 분들이었고, 얌전했던 딸의 비행을 눈감아주기엔 내가 저지른 짓이 너무 컸다. 부모님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은지는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아주 가끔 연락이 오는 게 전부였다. 안부도, 인사도… 걱정도 아닌 짧은 한 마디. ‘오빠 보고싶다’ 처음에는 내가 찾아가서 은지의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은지가 그건 절대로 안된다며 말렸다. 대략적인 사정만 들어도 고아인 내가 널 임신시킨 것만으로도 내 인식이 어떨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진 나는 그저 미친듯이 일만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평소처럼 물류 센터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잠에 들기 직전. 우우웅- 우우웅- “여… 여보세요?” ‘오빠아…. 목소리, 오랜만이네.’ “어, 어떻게 됐어? 어디야? 집이야? 괜찮아?” ‘나… 지금 밖인데.’ 그대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다. 은지는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나를 보면서 살짝 웃음을 지어주는 은지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은지야.” “…오빠아.” 하고 싶은 말들이 어지럽게 뒤엉킨 목구멍이 막혀버린 탓에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은지의 옆에 앉아 가볍게 손을 잡을 뿐. 예전보다 조금 앙상한, 그럼에도 여전히 곱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 “왜… 아무 말도 안해? 나 오랜만에 봤는데… 별로야?” “…아니. 예뻐.” “화장… 하나도 못하고 나와서, 좀 부끄럽다….” 은지가 내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댄다. “…이제, 괜찮아. 엄마아빠랑 많이 싸우기는 했는데….” “뭐가 괜찮다는 거야….” “아니이… 이제는 진짜로 괜찮아.” 그렇게 말을 하는 은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예전처럼… 다시 만나면 돼, 우리.” “…은지야.” “우리 처, 처음 만났을 때…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거, 하… 하나도 없으니까….” “…….” “그냥… 응? 다시… 우리 둘만, 다시. 으응?” 목이 메여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하는 은지는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내가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여전히…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주는 너였다. 그런 네 말에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반복해온 추태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은지야.” “으, 으응…?” “내가… 먼저 말해야 할 게 있어.” *** 전부 털어놓았다. 나의 특성, 나의 취향.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뒤에 기억을 지우고 다니기 시작한 과거. 그리고 너를 만났지만 네가 실망하고 떠나버리는 게 두려워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한 나.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너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버린 내 실수까지. “…미안해.” “…….” “내가… 처음부터 그랬으면 안됐는데.” 처음부터 너를 똑바로 밀어내지 못한 내가. 나중에 입을지도 모르는 상처에 지레 겁을 먹고 하룻밤의 일을 덮기에 급급했던 내가. 그렇게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아무것도 변하지 못한 나는 이렇게 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는 구나. …아니지. 지울 수… 있다. “…없던 일로 해줄까?” “…….” “내가… 해,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거야. 이번 일부터 해서, 일 년 정도 기억… 내가 지, 지워줄게. 전부.” 나는 겁이 많아, 네가 느낀 고통을 내가 보살펴주겠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보다 내가 가진 능력이 너를 덜 힘들게 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우리 사귀는 거 아, 아는 사람도 없고, 나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다 잊게 해줄게.” “…….” “부모님 때문에 힘들었으면… 부모님도 네가 임신했던 거, 기억 못하게 할 테니까.” “…오빠.” “…….”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옆으로 살짝 돌아가는 턱. 횡설수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던 말을 뱉기 급급하던 내 뺨에 얼얼한 통증이 올라온다. 너에게 뺨을 맞았다는 걸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는 몇 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거… 아니잖아. 오빠 그런 사람 아니잖아.” “…….” “그냥 하겠다고… 알겠다고 말하면 되잖아. 오빠 맨날 그렇게 해줬잖아… 내가 해달라는 거, 다… 다 해줬잖아.” 그래. 나는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처음이라서. 네가 하자는 것만 다 들어주고, 네가 가자는 곳을 따라가기만 했다.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를 해보려 머리를 굴려가며 계획해낸 제안은 역시나 최악이었다. “…미안.” “…….”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해줄까? 은지야.” 내 모든 진상을 듣고 난 뒤에도 네가 여전히 나와 같이하고 싶어할까? 이번에도 나는 답을 너에게 구한다. 잠시 고민을 하던 은지가 꺼낸 말은…. “…처음부터 다시.” “응?” “오빠도, 나도… 둘 다. 기억을… 지우자. 전부. 평범한 기억으로 덮어버리자.” “…안돼.” “왜? 감정은 남는다며…. 그럼 우리는 무조건 다시 만날 거야. 무조건.” 이런 짓을 저지른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건 큰 잘못 아닐까? 너는 언제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 사랑을 마땅히 갚아야 한다. 하지만 내 기억을 지워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내가 그러지 못할까봐 무서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내가 만약, 너를 놓치고 혼자서 세상 편하게 살아갈까봐 두려웠다. 아주 만약에 네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만나게 되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잃게 될 것만 같았다. “싫어… 싫어. 그냥 내가 자, 잘 해줄게. 응? 앞으로 네 기억을 지우지도 않을 테니까.” “아니야. 오빠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오빠가 바라던, 평범한 사랑이잖아.” “…….” “나… 사랑하지? 오빠.” “…응.”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사랑해줄 거지? 나 좋아한다고 말도 많이 해주고, 계속 옆에서… 사랑해줄 거지?” “…그럼.” 그 날 이후 사흘 동안, 우리는 서로의 흔적을 일상에서 지워나갔다. 사진을 지우고, 선물을 정리하고, 나중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들을 없앴다. 부모의 품을 반강제로 떠나게 된 은지가 머무를 방도 구하고, 마지막으로 준비를 끝낸 다음. 마지막까지 안심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은지가 마련해준 작은 안전장치를 남겨둔 채로. 나는 은지의 지난 일 년을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 덮어씌웠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 기억을, 내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그걸 사용한 기억까지 전부 지웠다. 그게 가능하냐고? 나도 모르겠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 의사에게 물어본 다음에 기억을 지웠을 텐데. 그걸 모르는 지금은, 그저… 은지의 말처럼 과거는 말끔하게 잊혀진 채로 처음부터 다시. 그렇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우우웅- “으… 으윽. 뭐야….”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는 날. 그런데 때아닌 알람이 울려서 단잠을 방해한다. 이불 밑에 파묻힌 알람의 근원을 찾아 손을 뒤적거리다가 잡힌 휴대폰을 꺼내서 알람을 확인을 해본다. ************서점 가기(매우 중요)************ “…이건 또 뭐야?” 오늘 날짜로 설정된 알람이다. 이런 알람을 맞춘 기억은 없는데… 아, 다음 학기에 필요한 전공책 사려고 맞춰뒀나? 며칠 전에 새로 사야 하는 책 목록이 안내가 되긴 했지…. 꾸역꾸역 침대에서 일어나서 간단하게 씻고. 만날 사람도 없으니 옷은 대충 걸친다. 천천히 집 밖으로 나가서 슬리퍼를 끌며 서점으로. “…….”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서점 안에 다른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 “…아.” 잠깐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예쁘다는 말보다는… 왠지, 사랑스럽다는 인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조금 낯설고 울렁거리는 기분이 올라온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걸까? 책… 책이나 고르자.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책장 앞에 서다가 힐끗, 옆을 보는데, 하필이면 또 다시 눈이 마주쳐버렸다. “…….” “…….”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오히려 살짝 웃어준다. 귀엽다. 내가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으니까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까?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봐도 나, 미친놈 같은데. “그…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결국 먼저 말을 걸어버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생각치도 못하게 이런 사람을 마주치게 된 나는… 꽤 운이 좋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운을 놓치지 않는 것부터는 나의 몫이다. “…되게 제 스타일이셔서.” “…….” “혹시… 만나는 사람 있으세요?” “저요? 저, 전… 없는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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